한국 축구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꼽히는 U-23 축구 대표팀 황선홍 감독(사진=스포츠춘추, 대한축구협회)
한국 축구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꼽히는 U-23 축구 대표팀 황선홍 감독(사진=스포츠춘추, 대한축구협회)

[스포츠춘추=분당]

황선홍(53·한국 U-23 축구 대표팀 감독)은 전설 중의 전설이다. 

황선홍은 1988년 12월 6일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조별리그 A조 1차전 일본과의 대결에서 A매치에 데뷔했다. 황선홍은 이날 A매치 데뷔골을 터뜨리며 팀 승리에 앞장섰다. 

역사의 시작이었다. 황선홍은 세 차례 월드컵(1990·1994·2002)에서 한국의 전방을 책임졌다.

황선홍의 A매치 통산 기록은 103경기 50골. 황선홍은 차범근(136경기 58골)에 이은 한국의 A매치 득점 2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황선홍은 축구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2002 한·일 월드컵을 꼽는다.

황선홍은 “부상으로 1998 프랑스 월드컵을 뛰지 못했다”“월드컵에서 미친 듯이 골을 넣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매일 남산을 뛰어 올라갔다. 팀 훈련을 마치면 운동장에 홀로 남아 슈팅 훈련을 했다. 그런 간절함이 2002 한·일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1차전 폴란드전 선제 결승골로 이어진 것 같다. 지금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한국은 축제였다. 모두가 행복했다.” 황선홍의 얘기다.

스포츠춘추가 2002 한·일 월드컵을 떠올린 황선홍을 만났다.


황선홍 “거스 히딩크 감독은 한국 축구의 미래를 바꾼 지도자”

한국 U-23 축구 대표팀 황선홍 감독(사진=스포츠춘추 이근승 기자)
한국 U-23 축구 대표팀 황선홍 감독(사진=스포츠춘추 이근승 기자)

황선홍은 한국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은퇴 후엔 전남 드래곤즈 2군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전남 1군 코치, 부산 아이파크, 포항 스틸러스, FC 서울, 대전하나시티즌 등에서 감독 생활을 했습니다. 그 과정 속엔 환희의 순간과 힘들었던 시간이 공존하죠. 지도자 황선홍은 얼마만큼 성장했습니까. 

처음엔 아무것도 몰랐죠(웃음). 부산 지휘봉을 잡았을 때가 생각나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축구를 구현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느꼈죠. 예나 지금이나 고민은 같아요. 어떻게 하면 한국 축구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느냔 겁니다. 어떤 강점을 살려서 경쟁력 있는 팀을 만들어갈까 하는 거죠. 제게 이런 질문을 던져요. 

어떤?

세계 최고 선수가 즐비한 유럽 축구를 자주 봅니다. 그들의 축구를 무작정 따라 한다고 해서 한국 축구 발전에 도움이 되느냔 거죠. 한국이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데 도움이 되느냐고 물었을 때 확답이 나오질 않아요. 지도자의 철학만큼 선수와 스태프 등의 상황도 아주 중요합니다. 팀은 함께 만들어가는 거예요. 

황선홍 감독은 ‘속도’를 아주 강조하는 지도자입니다. 

어떤 팀에서든 큰 틀은 확실히 제시해요. 현대 축구에서 속도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한 박자 빠른 패스와 생각 등이 더 좋은 축구로 이어진다는 믿음이 있죠. 축구란 게 뜻대로 되진 않아요. 하지만, 팀의 방향이 명확해야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수많은 지도자를 만났습니다. 지도자 황선홍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감독은 누구입니까. 

다들 아시지 않을까요(웃음). 거스 히딩크 감독이죠. 히딩크 감독은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만 이룬 게 아닙니다. 한국 축구를 체계적으로 바꿨어요. 많은 유망주가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죠. 히딩크 감독은 한국 축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무엇이 바뀌었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해줄 수 있습니까. 

히딩크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잡기 전까진 '1인 체재'였어요. 대표팀은 감독 중심이었습니다. 감독이 체력 훈련부터 수비, 공격, 전술 등 모든 걸 맡았죠. 히딩크 감독은 달랐어요. 훈련을 세분화했습니다. 수비, 공격, 전술 등을 집중적으로 책임지는 코치가 있었죠. 지금은 흔한 비디오 분석관, 피지컬 트레이너를 한국에 들여온 것도 히딩크 감독이에요. 

지금은 K리그 모든 구단에 비디오 분석관과 피지컬 트레이너가 있지 않습니까. 

히딩크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잡기 전까진 없었어요. 감독과 코치, 선수들이 팀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주제로 논의하는 문화도 마찬가지였죠. 히딩크 감독은 각 분야 전문가에게 훈련을 맡겼습니다.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냈죠. 

2002 한·일 월드컵 준비 과정이 순탄했던 건 아닙니다. 월드컵 개막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치러진 북중미 골든컵 때만 해도 대표팀을 향한 비판이 심했습니다. 월드컵 개막이 코앞인데 경기력이 올라오지 않는다는 거였죠. 베스트 11을 확정하지 않고 체력 훈련만 하고 있다는 지적도 많았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자기 확신이 강한 지도자예요. 계획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흔들리지 않았어요. 선수들이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죠. 특히나 히딩크 감독은 이 훈련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걸 명확히 설명했어요. 어떤 팀을 만나든 분석도 철저했죠. 1998 프랑스 월드컵 때만 해도 정보가 매우 부족했어요. 

예를 들면?

차범근 감독이 모든 걸 책임진 시기였습니다. 비디오 분석관이란 직책을 아는 사람 자체가 없었죠. 우리가 상대해야 할 팀의 선수 프로필과 간략한 장·단점을 프린트해서 준 게 다였어요. 매우 열악했습니다. 세계 축구가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지 모르는 시절이었죠. 대표팀이 훈련장 걱정 없이 훈련하는 날도 흔치 않았습니다. 

네?

파주 국가대표 트레이닝 센터(NFC)가 2002 한·일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만들어졌어요. 그전까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훈련했습니다. 강원도 강릉, 부산 등을 전전했죠. 유랑극단이었다니까(웃음). 히딩크 감독은 전폭적인 지원에 대단한 성과로 보답했어요. 축구가 우리 삶에 어떤 기쁨을 줄 수 있는지 보여줬죠. 


“비쇼베츠 감독 시절 체력 훈련이 히딩크 감독 시절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한국 축구 대표팀 거스 히딩크 전 감독(사진 왼쪽)(사진=대한축구협회)
한국 축구 대표팀 거스 히딩크 전 감독(사진 왼쪽)(사진=대한축구협회)

한국 축구 대표팀에서 경험한 외국인 지도자는 거스 히딩크만이 아니었습니다. 대표팀 최초 외국인 감독인 아나톨리 비쇼베츠의 지도를 받았는데요. 1994 미국 월드컵 이후 대표팀을 이끌었던 비쇼베츠 감독은 어떤 지도자였습니까. 

고군분투한 감독이었죠(웃음). 히딩크 감독 시절처럼 체계적이지 못했어요. 비디오 분석관이 없어서 녹화 테이프를 반복해 봤던 기억이 납니다. 뒤로 돌렸다가 정지 버튼을 누르길 반복했죠. 열악했어요. 1990년대 중반이었으니까. 강도 높았던 체력 훈련도 기억납니다. 

체력 훈련은 히딩크 감독의 파워 프로그램이 가장 힘들지 않았습니까. 

전혀(웃음). 비쇼베츠 감독의 훈련이 훨씬 힘들었어요. 유산소와 근력 운동을 가장 강조했던 게 비쇼베츠 감독 시절입니다. 강릉에서 계단 오르내리기를 엄청나게 했죠. 히딩크 감독 시절엔 ‘공포의 삑삑이’로 불린 셔틀런할 때만 힘들었어요. 나머지 훈련은 공을 가지고서 했습니다.

이전까진 공을 가지고서 하는 훈련이 적었던 겁니까. 

공 없이 뛰는 훈련이 많았습니다. 400m를 '1분 내 들어오라'는 식이었죠. 히딩크 감독은 달랐습니다. 짧고 굵게 훈련하면서 회복 속도를 높이는 데 중점을 뒀어요. 웨이트 트레이닝의 강도가 높긴 했지만 버틸 만했습니다. 몸이 좋아지는 걸 느끼다 보니 재밌게 훈련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산을 오르거나 아스팔트를 무작정 뛰는 훈련이 히딩크 감독 시절에 없어진 거군요. 여러 국가대표 출신 선수가 “체계적이지 못한 훈련으로 무릎이 일찍 망가졌다”는 얘길 했습니다. 

공감합니다. 한국엔 수술 경험 없는 선수가 없을 거예요. 당시엔 시즌을 마치면 병원으로 향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그런 것도 히딩크 감독이 바꾼 거예요.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훈련이 자릴 잡은 거죠. 또 생각났다. 

뭐죠. 

숙소를 1인 1실로 썼던 게 2002 한·일 월드컵 준비 과정부터였어요. 국외로 나갈 때 비즈니스 좌석을 탄 것도 이때부터였죠. 2002 한·일 월드컵 준비 전까진 훈련 수당도 없었습니다. 조리사가 선수들의 영양을 책임진다는 건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고요. 파주 NFC가 없었을 땐 훈련장에 갔다가 그냥 돌아온 적도 있었어요. 부산 해운대 모래사장에서 훈련한 기억도 나네요. 지금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야(웃음).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엔 막내로 참가했습니다. 당시엔 더 힘들었겠습니다. 

더 옛날이잖아요(웃음). (홍)명보랑 김치통 들고 다니던 시절이었지. 훈련 전엔 항상 공에 바람을 넣었고요. 선수들 유니폼 빨래도 막내들 몫이었죠. 당시엔 월드컵 최종예선을 한 장소에서 한 번에 치렀어요. 지금처럼 홈앤드어웨이가 아니었습니다. 1989년 10월일 거예요. 싱가포르에서 최종예선이 치러졌죠. 6개 팀이 3주에 5경기를 치렀습니다. 

일정이 빡빡했네요. 

선배들이 잘 먹어야 잘 뛴다는 거야. 제가 삐쩍 말랐었거든요. 매일 밥이랑 스테이크를 먹었습니다. 스테이크가 지금처럼 흔한 시대가 아니었어요. 입맛에 맞아야지. 힘들었습니다(웃음). 


“2002년 막내 박지성? 공은 좀 찼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가 될 거라곤 상상 조차 못했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대표팀 막내였던 박지성(사진=대한축구협회)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대표팀 막내였던 박지성(사진=대한축구협회)

2002 한·일 월드컵 20주년입니다. 

벌써요? 시간 참 빠르네. 2002 한·일 월드컵은 축구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에요. 선진 시스템을 경험하고 은퇴할 수 있어 감사한 시간이기도 하죠. 

선수와 지도자로 많은 선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선 박지성, 이천수, 차두리 등이 막내였는데요. 그 당시 베테랑의 눈으로 본 한국의 재능들의 실력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저는 1990 이탈리아 월드컵부터 쭉 대표팀 붙박이로 활약했습니다. 2002년은 은퇴를 앞둔 시점이었죠. (박)지성이나 (이)천수, (차)두리 등과 함께한 시간이 긴 건 아니에요. 당시 제 눈엔 아기였죠. 공은 참 잘 찼습니다. 어린 선수들답게 의지도 넘쳤고요. 

박지성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전설로 남을 거라고 예상했습니까. 

지성이는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아주 좋은 활약을 펼쳤습니다. 매 경기 기대 이상의 경기력을 뽐내며 한국의 4강 진출에 앞장섰죠. 축구 참 잘했어요. 그런데 지성이가 맨유에서 뛸 거라는 건 상상 못했습니다(웃음). 당시만 해도 맨유가 어떤 팀이야. 유럽에서도 최고의 팀이었어요. 지금처럼 유럽 리그에서 뛰는 한국 선수가 흔한 시절도 아니었고. 

박지성의 성공 뒤엔 히딩크 감독이 있지 않았습니까. 

선수가 좋은 지도자를 만나는 것도 아주 중요해요. 지성이에겐 히딩크 감독을 만난 게 더 큰 행운이었죠. 2002 한·일 월드컵이 끝나고서도 함께했으니까. 

박지성은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명문 PSV 에인트호번에서 히딩크 감독과 재회했습니다.  

지성이가 유럽 생활을 시작했던 PSV 에인트호번이 만만한 팀이 아니에요. 에레디비시 최고 명문이자 유럽에서 알아주는 클럽이죠. 그런 팀에서 기회를 잡았습니다. 여기에 지성이의 재능과 노력이 더해진 거예요. 그래서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세계가 인정하는 선수로 발돋움한 거죠. 후배지만 대단한 사람입니다. 


“빗속 혈투였던 한·일전 바이시클 킥? 몸이 먼저 반응해서 나온 골” 

황선홍은 1988년부터 2002년까지 한국 축구 대표팀의 전방을 책임졌다(사진=대한축구협회)
황선홍은 1988년부터 2002년까지 한국 축구 대표팀의 전방을 책임졌다(사진=대한축구협회)

황선홍 감독은 A매치 103경기에 출전해 50골을 기록한 최고의 스트라이커였습니다. A매치 역대 득점 기록에서 2위에 올라있어요. 1999년 J리그에선 득점왕을 차지했습니다. 한국 선수가 국외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유일무이한 기록입니다. 궁금합니다. 골 결정력은 타고나는 겁니까. 

솔직히 타고나는 부분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축구계엔 이런 얘기가 있어요. '노력으로 스타가 될 순 있지만 슈퍼스타는 될 수 없다'는 거죠. 축구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입니다. 저는 몸이 먼저 반응해서 골을 터뜨린 적이 많았어요. 

예를 들면?

동료가 크로스를 올려요. 이 공이 상대 선수 발에 맞고 굴절이 됩니다. 예상한 상황이 아니죠. 그런데 몸이 그걸 예상이라도 한 듯 상대 선수 발 맞고 흘러나오는 공간으로 향해요. 이런 건 말로 설명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가르쳐줄 수도 없고요. 축구엔 100%가 없으니까.

많은 팬이 기억하는 경기가 있습니다. 1998년 4월 1일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펼쳐진 일본과의 친선경기였습니다. 황선홍은 1-1로 팽팽하게 맞선 상황에서 멋진 바이시클 킥으로 결승골을 터뜨렸습니다. 

마찬가지죠. 제가 ‘이렇게 해야겠다’고 계획해서 넣은 골이 아니었어요. 볼 트래핑이 길어진 상황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날아올라서 차는 방법뿐이 없겠다' 싶었죠. 몸이 먼저 반응했어요. 스트라이커는 꾸준한 훈련과 경기를 소화하는 게 중요합니다. 골잡이는 머릿속으로 구상한 상황이 아닐지라도 골을 터뜨릴 수 있어야 해요. 

황선홍의 최고의 골 중 하나는 2002 한·일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1차전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터뜨린 결승골입니다. 이 득점도 감각적인 골이란 평가가 많습니다. 

폴란드전 골 잊을 수 없죠. 2002 한·일 월드컵은 내 인생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이에 앞서 세 차례 월드컵(1990·1994·1998)에 도전했지만 후회만 남겼어요. 마지막 월드컵에선 꼭 골을 넣고 싶었습니다. 팀을 승리로 이끌고 싶었어요. 한이 맺혀있었죠. 죽을힘을 다해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걸 쏟아냈어요. 그때의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황선홍은 국외 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유일한 스트라이커입니다. 손흥민이 2021-2022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에 도전 중입니다. 

손흥민은 급이 다르지(웃음). 저랑 비교할 선수가 아니에요. 손흥민은 ‘월드 클래스’잖아요. 얼마 전 리버풀과의 경기를 봤습니다. 손흥민이 선제골을 넣었던 경기였죠. 경기를 마치니 리버풀 클롭 감독은 물론 모하메드 살라, 버질 반 다이크 등 세계적인 선수가 먼저 다가와서 인사를 하더라고요. 손흥민은 세계가 최고라고 인정하는 선수예요. 꼭 세계 최고 리그 득점왕에 올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손흥민을 비롯한 후배들이 2022 카타르 월드컵에 도전합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을 아주 잘 치렀습니다. 팀 분위기가 아주 좋은 것으로 알아요. 부담 갖지 말고 자기들 능력을 100% 발휘했으면 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첫 경기입니다. 조별리그 1차전 우루과이전이 월드컵의 성패를 결정할 거예요. 잘할 겁니다. 지금껏 잘해왔으니까. 국민의 한 사람으로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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