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시즌 새로운 유형의 투수로 변신한 서준원(사진=롯데)
올 시즌 새로운 유형의 투수로 변신한 서준원(사진=롯데)

[스포츠춘추=대전]

“빠른 공이요? 지금도 던지려면 얼마든지 던질 수 있죠. 하지만 제가 안 던지는 겁니다. 이제는 스피드 욕심을 버렸으니까요.”

롯데 자이언츠 서준원은 올 시즌 완전히 새로운 타입의 투수로 변신했다. 마치 멀티버스에서 건너온 다른 버전의 서준원처럼 우리가 알던 경남고 에이스 출신 1차지명 서준원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까지 서준원은 강속구로 윽박지르는 투수였다. 평균 145~6km/h, 최고 150km/h대 빠른볼을 앞세워 힘으로 밀어붙였다. 경남고 시절에는 빠른 볼과 슬라이더만 던져도 제대로 치는 타자가 없었다. 한가운데로 던져도 죄다 헛스윙이었다. 이 매력에 반한 롯데는 1차지명으로 서준원을 선택했다.

그러나 프로 1군 무대에서는 스피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가운데로 몰린 공은 여지없이 얻어맞았다. 스피드만 빠르고 무브먼트가 크지 않은 속구는 타자들의 쉬운 먹이감이 됐다. 

데뷔시즌 4승 11패 평균자책 5.47의 성적은 신인이라 용인됐지만 2년차 평균자책 5.18, 3년차 7.33의 성적은 팬들을 화나게 했다. 팬들이 화난 만큼, 서준원도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누구보다 서준원에게 실망한 사람은 바로 서준원 그 자신이었다.

팔각도 내린 서준원, 구속 대신 무브먼트와 제구를 얻었다

서준원의 투구폼. 팔각도가 낮아졌다(사진=롯데)
서준원의 투구폼. 팔각도가 낮아졌다(사진=롯데)

올 시즌을 앞두고 서준원은 비장한 각오로 겨울을 보냈다. 결혼하고 아들까지 얻으면서 이제 야구가 밥벌이가 된 터였다. 머리를 짧게 깎았고 체중도 줄였다. 고교 에이스 출신이자 1차지명 선수의 자존심과 자의식을 내려놓고 생존을 위한 변화를 택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서준원, 스스로 되고 싶은 서준원의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났다. 

4월 22일 삼성전, 서준원의 시즌 첫 등판을 본 사람은 아마 깜짝 놀랐을지 모른다.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의 충격을 선사한 등판이었다. 이날 서준원은 패스트볼 평균 135.5km/h를 기록했다. 150km/h는 가볍게 던지던 투수의 구속이 130km/h 중후반대에 머무는 건 부상이 아니고서는 드문 일이다. 투구내용도 2이닝 2실점으로 좋지 않아 지켜본 팬들의 우려와 탄식을 자아냈다. 

다음 등판 SSG 랜더스 전은 더 좋지 않았다. 이날 서준원은 0.2이닝 동안 안타 3개 볼넷 2개로 3점을 내줬다. 평균구속도 139.4km/h로 첫 등판보다는 나았지만 140km/h를 넘지 못했다.

5월부터 달라졌다. 4일 KT 위즈전을 0.1이닝 1삼진으로 잘 막은 서준원은 5일 0.0이닝 6실점 ‘제로퀵’으로 물러난 스파이더맨, 아니 글렌 스파크맨을 대신해 5이닝 무실점 호투를 펼쳤다. 5이닝 동안 단 3안타 몸에맞는볼 1개만 내줬고 투구수 66개로 다른 의미의 제로퀵 투구를 펼쳤다. 

삼진보다는 인플레이 타구로 쉽게 쉽게 타자를 잡아내는 서준원의 모습은 낯설었다. 12일 NC전에서도 1이닝 무실점의 좋은 투구가 이어졌다. 지구-838에서 넘어온 새 버전의 서준원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래리 서튼 감독은 서준원의 변화에 대해 “첫 번째는 체중 감량의 효과”라고 설명했다. “체중 감량을 통해 신체적인 컨디션이 좋아졌다”는 설명이다. 이어 “1군 리키 메인홀드 투수코치, 임경완 코치는 물론 퓨처스 팀의 코치와 함께 많은 대화를 나누고 훈련했다”고 전했다.

자신에게 맞는 팔각도를 찾은 것도 달라진 점이다. 서튼 감독은 “서준원이 원래는 스리쿼터 형태로 다소 높은 각도에서 공을 던졌다. 한동안은 팔을 아예 내린 적도 있는데, 이제 그 중간 지점을 찾았다. 여러 시도를 통해 자신에게 제일 적합한 팔각도를 찾아냈다”고 했다.

보통 사이드암 투수가 팔각도를 높이면 구속이 빨라지는 대신 무브먼트가 감소하는 효과를 낳는다. 반면 각도를 낮추면 구속이 줄고 무브먼트가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준원도 팔을 내리면서 속구와 변화구 무브먼트를 극대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게 서튼 감독의 설명이다. 

실제 올해 서준원은 패스트볼 상하 무브먼트가 크게 줄면서 아래로 떨어지는 움직임이 커진 것으로 나타났다. 트래킹 시스템의 수직무브먼트는 숫자가 작을수록 싱킹 무브먼트가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운드에서 ‘작대기’처럼 날아가던 속구가 이제는 투심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뜻이다. 커진 무브먼트는 올 시즌 서준원의 성공 비결이 맞다.

대전야구장에서 만난 서준원은 “구단에서 요청해서 팔각도를 내린 건 아니다. 나 스스로 선택해서 팔각도를 조정했다. 구단에서는 오히려 반대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구단에서는 ‘왜 굳이 좋은 스피드를 포기하려 하느냐’고 말렸다. 내 생각은 달랐다. 스피드가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내가 빨리 깨달은 셈이다. 많은 분들이 저를 150km/h 이상 던지는 빠른볼 투수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빠른 공으로 잘 던져본 적이 없지 않나”라고 자조한 서준원은 “공은 빠른데 움직임이 없고, 뒷받침할 만한 변화구도 부족했다”고 진단했다.

서준원은 변신을 위해 퓨처스팀의 이재율 투수코치, 그리고 1군 임경완 코치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임경완 코치와 롯데 팬들에게 ‘이왕기’로 더 친숙할 이재율 코치 둘 다 현역 시절 사이드암 투수였다. 

서준원은 “이재율 코치님이 정말 많이 도와주셨다. 던지는 법도 알려주시고, 잘 안돼서 스트레스 받을 때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다. 요새도 던지고 나면 매일 연락해서 대화를 나눈다. 1군에 와서는 임경완 코치님에게 많이 배운다”고 감사를 전했다. 

서튼 감독은 “모든 변화는 서준원이 자신을 믿고, 자신이 하는 훈련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코치들도 도움을 줬지만 서준원이 믿음을 갖고 했기 때문에 달라질 수 있었다”면서 “모든 공은 서준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칭찬했다. 

‘나 서준원이야’ ‘내가 낸대’ 생각을 버리니…새로운 가능성이 보인다

서준원은 달라진 지금의 자신이 꽤 마음에 드는 눈치다(사진=롯데)
서준원은 달라진 지금의 자신이 꽤 마음에 드는 눈치다(사진=롯데)

서준원은 ‘스피드 욕심을 버렸다’고 했지만, 사실 등판을 거듭하면서 서준원은 조금씩 원래의 볼 스피드를 회복하고 있다. 첫 등판 때 135.5였던 평균구속이 139.6km/h로 빨라지더니 12일 NC전에서는 142.4km/h까지 올라왔다.

서튼 감독은 “서준원은 140km/h 후반대를 던졌던 투수다. 그 정도를 던질 힘이 있는 투수”라며 “처음에는 새로운 팔각도에 익숙하지 않아 보니 구속이 떨어졌다. 지금은 서준원이 편안하게 던질 수 있는 팔각도를 찾았고 타이밍과 리듬이 맞아떨어지면서 원래 갖고 있던 힘이 전달되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서준원은 “스피드 욕심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스피드는 내가 일부러 안 내는 것이다. 지금도 내려면 얼마든 낼 수 있다. 한번씩 팔을 올려서 던지면 145km/h 이상 나온다”고 했다. 실제 12일 NC전에서는 147km/h도 한 차례 기록했다. 

서준원은 “이제 스피드에는 미련이 없다. 이제는 제구력과 무브먼트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전에는 공 3개로 타자를 잡았다면 이제는 1개를 던져서 잡는 방향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서준원은 달라진 자신의 모습이 꽤 마음에 드는 눈치다. 그는 “수원 KT전에서 결과가 좋았다. 5이닝 동안 66구면 많은 투구수가 아니다. 몸쪽 승부, 변화구로 승부했을 때 공의 움직임이 좋으니까 타자들이 반응하더라. 덕분에 스트라이크 비율이 높았다”며 미소를 보였다.

“최근 2, 3경기에서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목표대로 조금씩 결과가 나오는 것 같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더 공 던질 때 신중하게 던지려고 한다. 전처럼 대충 던지거나 세게 던지는 게 아니라 한 구 한 구 신중하게 던질 생각이다.” 서준원의 의젓한 한 마디다.

‘나 서준원이야’ ‘내가 낸대’라는 생각을 버리니 전에는 몰랐던 서준원의 새로운 가능성이 보인다. 서준원은 “2군에 있을 때 정호진 감독님이 ‘너를 내려놓으라’고 조언해 주셨다. 내 생각도 같다. 나를 내려놓아야 이 힘든 시기를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때 1차 지명이라는 수식어가 부담되기도 했다. 요새 드는 생각은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현재의 나는 이런 투수다. 앞으로 계속 이런 모습으로 남아도 좋다”라고 힘줘 말했다. 빠른 공보다는 정교하고 세밀한 투수, 무브먼트와 제구로 타자를 잡는 투수. 서준원이 말하는 지금의 서준원은 이런 모습이다.

물론 서준원이 언제까지나 현재의 모습에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가보지 못한 또다른 멀티버스에는 공도 빠르고 제구와 무브먼트까지 좋은 완전체 서준원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서준원은 이제 겨우 22세가 된 어린 투수다. 그의 앞에는 여전히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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