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 최고의 스타로 자리매김한 이정후(사진=키움)
리그 최고의 스타로 자리매김한 이정후(사진=키움)

[스포츠춘추=고척]

‘신드롬’의 대상은 어딜 가도 그 존재가 느껴진다. 서태지 신드롬이 한국사회를 강타했을 때는 온 세상이 온통 서태지였다. TV, 음반, 길보드차트, 심지어 사회과학 서적과 논문에도 서태지가 등장했다. 서태지가 없는 곳에서도 서태지가 보이고, 만져지고, 느껴졌다. 

최근 한국야구는 이정후 신드롬이 한창이다. 이정후가 없는 곳에서도 온통 이정후가 보이고, 이정후가 들린다. 키움 히어로즈 경기장부터 다른 팀 경기장, 고교야구 대회, 그리고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보고서까지 야구장이 온통 이정후다. 부재 속에서 더욱 존재감이 빛나는 역설이다.

프로 선수도, 고교 선수들도 이구동성 ‘롤모델은 이정후’

휘문고 천재 타자 6년 주기설을 입증하는 김민석(사진=베이스볼 코리아)
휘문고 천재 타자 6년 주기설을 입증하는 김민석(사진=베이스볼 코리아)

키움 히어로즈가 아닌 다른 팀 경기에서 이정후가 보인다. 지난달 19일 KT 위즈 신인타자 유준규는 이정후를 쏙 빼닮은 타격폼으로 화제가 됐다. 스탠스, 배트 기울기, 타이밍 잡는 방법까지 이정후와 판박이였다. 멀리서 보면 양준혁 자선야구대회 출전선수로 보일 만큼 이정후를 완벽하게 복제했다.

타석에서 결과도 좋았다. 데뷔전에서 LG 트윈스 상대로 멀티히트를 기록했고, 20일에는 삼성 에이스 데이비드 뷰캐넌 상대로 안타를 날렸다. 고교 때부터 이정후의 타격 동영상을 보고 연습한 결과다. ‘히든 싱어’가 아니라 ‘히든 히터’다. 이제는 후배 타자들의 타격 교본이자 영감을 주는 선수가 된 이정후의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다.

고교야구 경기장에 가면 이곳저곳에서 이정후가 들린다. 최근 열린 제76회 황금사자기 고교야구 대회에서 만난 선수들은 너나없이 이정후를 롤모델로 꼽았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승엽을 필두로 이대호, 김태균, 박병호, 이용규 등이 주로 언급됐지만 이제는 완전히 대세가 바뀌었다. 타자들이 가장 닮고 싶은 타자 1위도, 투수들이 가장 상대해보고 싶은 타자 1순위도 이정후다. 

경남고의 우승을 이끈 외야수 김정민은 이정후와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는 선수다. 출신 학교도 다르고 성장한 지역도 다르다. 같은 외야수지만 이정후보다는 박해민-정수빈 과에 가깝다. 하지만 롤모델로는 주저 없이 이정후를 꼽는다.

“이정후 선배님은 야구를 워낙 잘하시고, 방망이도 수비도 다 잘한다. 배울 점이 정말 많다”고 추앙한 김정민은 “이정후 선배님처럼 팀을 대표하는 선수가 되고 싶다. 인기도 많고 야구도 잘하는 그런 선수가 되고 싶다. 이정후 선배님은 유니폼 입은 모습만 봐도 너무 멋지다. 플레이도 멋지고, 모든 면에서 다 닮고 싶다”고 말했다. 

31일 고척돔에서 만난 이정후에게 이 얘길 들려줬다. 이정후는 “고교생 친구들이 저를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정말 고마운 일이다. 쑥쓰럽다”면서 미소를 보였다. 

“아무래도 김태균 선배님 이후로 고졸 신인 야수가 바로 자리를 차지하고, 신인왕을 받고, 국가대표가 되고 좋은 성적을 내는 게 오랜만이잖아요. 후배 선수들이 저 같은 로드맵을 밟고 싶어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나 강백호를 많이들 꼽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정후의 말이다. 

‘제 2의 이정후’ 김민석 향한 이정후의 극찬 “고교 시절 나보다 훨씬 잘해”

이정후는 현재 리그에서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는 선수다(사진=키움)
이정후는 현재 리그에서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는 선수다(사진=키움)

제 2의 선동열, 제 2의 류현진, 제 2의 이승엽, 제 2의 이종범. 될성부른 신인 선수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전설적인 선수의 이름을 수식어로 동원한다. 이정후도 신인 시절에는 아버지 이종범 LG 퓨처스 감독이 수식어로 따라다녔다. 이종범의 현역 시절 별명인 ‘바람의 아들’에서 따온 ‘바람의 손자’로 불렸다.

이제는 이정후가 후배 선수들의 수식어가 됐다. 휘문고 직계 후배인 내야수 김민석은 ‘고교야구의 이정후’ ‘제 2의 이정후’로 불린다. 수도권 팀 스카우트는 “이정후처럼 타격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선수다. 컨택트 능력은 물론 투구 인식능력, 타격 기술, 배트 스피드가 모두 뛰어나다”고 칭찬했다. 

올해 10경기에서 기록한 김민석의 타율은 0.667로 야구 만화에서나 가능한 수준이다. 이정후가 2학년 때 타율 0.521로 펄펄 날았던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김민석의 고교 3년 통산 기록은 타율 0.384에 출루율 0.489로 이정후의 휘문고 3년 통산(타율 0.384 출루율 0.474)과 매우 유사한 비율을 보이고 있다.

김민석의 롤모델도 당연히 이정후다. 여러 인터뷰에서 김민석은 이정후가 야구를 대하는 자세를 닮고 싶고, 신인 때부터 꾸준히 잘하는 모습을 따라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정후의 타격 영상을 보고 배우는 부분도 많다. 이정후가 휘문고에 방문했을 땐 인코스 볼을 치는 방법도 배웠다. 

‘제 2의 이정후’ 김민석을 이정후는 어떻게 생각할까. 이정후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민석이가 하는 걸 봤는데 너무 잘 친다. 나보다 더 잘 치는 것 같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 고교 시절보다는 확실히 민석이가 나은 것 같아요. 저는 프로에 와서 실력이 좋아진 케이스거든요. 고교에서 하는 것만 봤을 때는 민석이가 낫죠.”

이정후는 오태근 휘문고 감독이 고교 시절 자신에게 해줬던 말을 그대로 김민석에게 들려줬다고 한다. 이정후의 고교 시절 코치였던 오 감독은 어린 이정후에게 ‘넌 프로에 가면 무조건 신인왕을 받는다’ ‘3할 타율을 칠 선수다’ ‘타격왕을 차지할 거다’란 말로 자신감을 심어줬다. 

“솔직히 그때는 안 믿었죠.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정후의 말이다. 하지만 오 감독의 예언은 전부 현실이 됐다. 이정후는 입단 첫해부터 전 경기에 출전하며 최우수 신인상을 받았고, 3할 타율을 넘어 통산 타율 1위 타자가 됐다. 지난해엔 키움 코치로 합류한 오 감독이 보는 앞에서 리그 타격왕 타이틀을 따냈다.

이정후는 “올해 오 코치님이 휘문고 감독님이 되셔서 학교에 찾아갔다. 가서 후배들 운동하는 것도 보고, 함께 운동도 하면서 민석이가 하는 걸 유심히 봤는데 정말 잘하더라”면서 “코치님께 고교 시절 들었던 말을 나도 민석이에게 해줬다”고 했다. 이정후가 이룬 오태근 감독의 예언처럼, 김민석을 향한 이정후의 예언도 이루어질지 지켜볼 일이다. 

“야구 나 혼자 잘하는 것 아냐…주위 도움 없이는 불가능” 이정후의 진심 어린 조언

이정후의 환한 미소(사진=키움)
이정후의 환한 미소(사진=키움)

이제는 ‘모두의 정후’가 된 이정후가 후배들에게 정말로 들려주고 싶은 조언은 따로 있다. 야구가 아닌 야구 외적인 영역에 대한 조언이다. 

이정후는 “물론 야구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면서 “내가 잘하는 건 나 혼자 잘하는 게 아니다. 주위 사람들, 동료 선수들의 도움이 있기에 잘할 수 있다는 걸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팀에 주목받는 에이스 선수가 있으면 다른 선수들이 조금은 묻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동료들의 도움과 희생이 없으면 에이스 선수가 야구를 잘하기 쉽지 않아요. 부모님의 뒷바라지, 주위 분들의 도움, 동료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저 역시도 야구를 지금처럼 잘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나 혼자 잘나서 잘하는 게 아니라는 걸 후배들이 항상 생각했으면 합니다.” 이정후의 진심이다. 

이정후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키움 구단 직원들이 인정한다. 키움 홍보팀 관계자는 “이정후와 함께 일하면서 감동받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따금 구단 버스 대신 직원 차량으로 이동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이정후는 진심으로 고마워하면서 직원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한다”면서 “갓 고교 졸업하고 프로에 왔을 때부터 남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슈퍼스타로 성장한 지금도 전혀 변함이 없다. 한결같다”고 전했다.

이정후는 “야구 선수 생활은 길지 않다. 길어봐야 20년이고, 그 이후에 인생을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다”면서 “아버지께서도 야구를 잘할 때 어떻게 행동하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가 중요하다고 항상 강조하셨다. 언제나 겸손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잘해야 한다는 말씀을 해주셨다”고 했다.

“지금이야 제가 야구를 잘할지 몰라도 항상 잘하지는 못할 수도 있잖아요. 당장은 제 또래 친구들과 비교해 돈도 많이 벌고 유명할지 몰라도, 나중에 야구를 그만두거나 못하는 시기가 왔을 때는 그 친구들이 결코 저보다 못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잘할때일수록 사람들에게 더 잘해야 합니다. 그래야 못할 때도 저를 응원해주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요.” 야구인생 2회차를 사는 듯한 이정후의 마음가짐은 타격폼이나 타격 기술만큼 후배 선수들이 보고 따라야 할 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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