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법원은 "동일한 ‘토지 매매계약서’를 활용해 다수의 매매계약을 체결했을 경우 약관규제법상 약관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법조계는 "이번 판결로 '복사하기+붙여넣기' 식의 토지 매매계약서 작성 관행이 근절될 것"으로 내다본다(사진=스포츠춘추)
최근 법원은 "동일한 ‘토지 매매계약서’를 활용해 다수의 매매계약을 체결했을 경우 약관규제법상 약관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법조계는 "이번 판결로 '복사하기+붙여넣기' 식의 토지 매매계약서 작성 관행이 근절될 것"으로 내다본다(사진=스포츠춘추)

[스포츠춘추]

동일한 ‘토지 매매계약서’를 활용해 다수의 매매계약을 체결했을 경우 약관규제법상 약관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6월 9일 서울중앙지법 제16부 민사부(재판장 문성관)는 부동산개발회사인 ‘우송’이 인천 서구 대곡동 토지주들에게 제기한 ‘소유권이전등기 청구의 소’에서 “원고(우송)와 피고(대곡동 토지주)가 맺은 토지 매매계약은 약관규제법을 위반해 무효다. 원고의 피고들에 대한 모든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고 판결했다. 

이번 원고 패소 판결에 대해 법조계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 법조인은 “그간 법원이 부동산개발 시행사업의 특수성을 이유로 불공정한 토지 매매계약에 대해 매도자보다 매수인에게 유리한 판결을 해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판결처럼 토지 매매계약서를 약관으로 볼 경우 앞으로 사정이 확 달라질 것”이라며 “이번 판결로 부동산개발 시행사들의 토지 확보와 관련해 폭풍이 몰아칠 것”으로 내다봤다.

8억 4천만 원에 땅 팔기로 계약했지만, 정작 수중에 들어온 돈은 약정금 570만 원. 계약해지 요청하자 민사소송 당해

판결문엔 서울중앙지법 제16부 민사부가 토지 매매계약서를 약관으로 판단한 이유가 기술돼 있다(사진=스포츠춘추)
판결문엔 서울중앙지법 제16부 민사부가 토지 매매계약서를 약관으로 판단한 이유가 기술돼 있다(사진=스포츠춘추)

인천 서구 대곡동 주민 A 씨는 2020년 부동산개발사 김 아무개(58) 대표로부터 “땅값을 후하게 쳐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고령의 A 씨는 김 대표와 토지 매매계약을 맺었다.

계약서에 명시된 토지 매매액은 8억 4천만 원. 일반적인 계약이라면 A 씨는 김 대표로부터 매매액의 10%에 해당하는 8천400만 원을 계약금으로 받아야 했다. 하지만, A 씨가 받은 건 매매액의 10%는 고사하고, 계약금의 10%에도 못 미치는 약정금 570만 원에 불과했다. 

A 씨처럼 김 대표로부터 약정금만 받고서 부동산 매매계약을 체결한 주민은 계속 늘어났다.

1·2구역으로 나눠 추진되는 대곡3구역 도시개발은 환지 방식에 의한 민간주도 개발이다. 대부분의 민간주도 도시개발이 그렇듯 실질 자금은 시공사가 댄다. 그에 앞서 토지 매매, 보상, 각종 인허가, 조합 설립 등의 사업 초기 역할은 시행사가 담당한다.

복수의 건설업계 관계자는 “누가 토지를 많이 확보하느냐에 따라 사업 성격과 시공사가 달라진다. 토지주들과 맺은 계약서를 대형 건설사에 수수료를 받고 파는 ‘전문 토지용역 회사’가 활개 치는 것도 도시개발에서 토지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 대표의 토지 확보에 제동이 걸린 건 또 다른 시행사인 G사가 뛰어들면서다. 주민 C 씨는 “G사와 계약한 몇몇 주민의 매매계약서 내용이 알려지면서 앞서 김 대표와 계약했던 주민들이 큰 혼란에 빠졌다”고 귀띔했다.

“G사는 주민들에게 토지 대금의 10%를 계약금으로 지급했다. 반면 김 대표는 계약금이 아닌 토지 대금의 1%가량을 약정금으로 줬다. 10억대의 같은 토지라도, 누구는 계약금으로 1억 원을 받고, 누구는 1천만 원을 받으면서 주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김 대표가 전체 토지 매매액의 1%도 되지 않는 돈을 약정금으로 걸어놓고, 막대한 규모의 토지를 확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김 대표를 가리켜 ‘현대판 봉이 김선달’이라고 부르는 주민이 생겨났다.” C 씨의 얘기다.

결국 약정금 계약에 불만을 품은 몇몇 주민이 우송에 계약 해지를 요구하며 갈등이 표면화됐다. 이들은 우송에 ‘부동산 매매약정 계약은 정상적인 계약금을 수령한 것이 아니므로 매매약정 계약해지를 통보한다’는 내용의 내용증명을 보냈다. 우송이 내용증명을 보낸 주민들을 상대로 민사소송에 들어가며 양측의 갈등은 법정 싸움으로 번졌다.

법조계 “내가 잘못하면 위약금만 날리면 되고, 상대가 잘못하면 계약금의 두 배를 내놓으라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불공정 계약”

대곡동 토지주와 우송이 맺은 토지 계약서 내용 중 [계약 해지]와 관련한 조항. 법원을 이를 불공정하다고 봤다(사진=스포츠춘추)
대곡동 토지주와 우송이 맺은 토지 계약서 내용 중 [계약 해지]와 관련한 조항. 법원을 이를 불공정하다고 봤다(사진=스포츠춘추)

우송과 토지계약(약정)을 맺은 인천시 서구 대곡동 토지주 가운데 상당수가 문제라고 지적한 건 바로 ‘불공정한 계약해지’였다. 토지계약서 제8조 [계약의 해지]에 따르면 우송에 땅을 판 토지주가 계약을 위반할 경우 우송에 계약금의 배액(두 배)을 배상해야 한다. 

우송에 8억 4천만 원을 받는 조건으로 토지를 팔기로 계약한 A 씨를 예로 들면, A 씨는  매매액의 10%에 해당하는 계약금 8천400만 원을 나중에 받기로 했다. 정작 A 씨가 우송에 받은 건 약정금 570만 원뿐이었다. 

하지만, A 씨가 계약을 위반하면 A 씨는 우송으로부터 받지도 않은 계약금 8천400만 원의 두 배에 해당하는 1억 6천800만 원을 물어내야만 했다.

실제로 우송은 A 씨가 계약해지를 요구하자 “A 씨가 계약을 위반했다”며 소송비용 부담과 함께 계약금 8천400만 원의 배액인 1억 6천800만 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주목할 건 우송이 계약을 위반할 경우엔 A 씨에게 지급한 약정금 570만 원만 포기하면 그만이라는 점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내가 잘못하면 위약금만 날리면 되고, 상대가 잘못하면 계약금의 두 배를 내놓으라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불공정 계약”이라며 “주민들이 이 조항을 꼼꼼하게 읽어보고, 충실하게 설명을 들었어도 이처럼 불공정한 계약서에 선뜻 도장을 찍을 수 있었을까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법원의 판단은 어땠을까. 6월 9일 서울중앙지법 재판부는 인천시 서구 대곡동 토지주를 상대로 “계약서에 명시된 토지 매매액을 지급받음과 동시에 소유권 이전 등기 절차를 이행하라”는 우송의 청구에 대해 기각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원고(우송)는 피고(토지주)들에게 계약금을 선(先) 이행할 의무가 있음에도 피고들에게 계약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원고는 피고들에게 소유권 이전 등기 절차의 이행을 요구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우송과 토지주들이 맺은 토지계약서에 따르면 계약금은 도시개발조합 설립인가 후 6개월 이내, 잔금은 환지예정지 지정 후 6개월 이내에 지급하도록 돼 있다. 문제는 조합 설립인가와 환지예정지 지정이 ‘언제가 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라는데 있다.

법조 관계자는 “계약서대로라면 토지주들은 ‘불확실한 미래’가 올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만 한다. 그렇다고 계약해지를 요구하면 받지도 않은 계약금의 두 배를 물어야 한다. 재판부가 이런 불공정성에 주목한 건 당연하다”며 “매매대금의 1%도 되지 않는 약정금으로 토지주들의 발목을 묶어오던 일부 시행업자들의 행태를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법원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가 아니겠느냐”고 평했다.

동일한 양식의 매매계약서를 약관으로 판단한 법원. 법조계 “전국의 토지계약과 관련해 폭풍이 몰아칠 것”

우송은 동일한 형식의 문서를 토대로 100여 건에 이르는 토지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법원은 "매매계약서 내용이 부동문자로 기재돼 있고, 목적물, 매매대금, 계약체결 날짜만 개별적으로 기재하도록 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것이 법원이 우송의 매매계약서를 약관으로 본 결정적 이유다. 사진은 우송이 대곡동 토지주들과 작성한 매매계약서. 매매대금, 계약금, 약정금, 계약금, 잔금, 거래은행, 계좌번호, 예금주란을 제외하면 내용이 같다(사진=스포츠춘추)
우송은 동일한 형식의 문서를 토대로 100여 건에 이르는 토지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법원은 "매매계약서 내용이 부동문자로 기재돼 있고, 목적물, 매매대금, 계약체결 날짜만 개별적으로 기재하도록 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것이 법원이 우송의 매매계약서를 약관으로 본 결정적 이유다. 사진은 우송이 대곡동 토지주들과 작성한 매매계약서. 매매대금, 계약금, 약정금, 계약금, 잔금, 거래은행, 계좌번호, 예금주란을 제외하면 내용이 같다(사진=스포츠춘추)

정작 법조계가 이번 판결에서 주목한 건 그다음이다. 법원은 원고의 계약서를 약관규제법상 약관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약관이란 그 명칭이나 형태 또는 범위와 상관없이 계약의 한쪽 당사자가 여러 명의 상대방과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일정한 형식으로 미리 마련한 계약 내용을 뜻한다”고 전제한 뒤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원고가 동일한 양식의 매매계약서를 활용하여 토지 소유자들과 100여 건에 이르는 매매계약을 체결하였다. 이 사건 각 매매계약서는 원고가 불특정 다수의 사람과 매매계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동일한 형식으로 미리 준비한 문서로, 약관규제법상 약관에 해당한다고 판단한다.”

우송의 매매계약서를 약관으로 판단한 법원은 “사업자는 약관에 정한 중요한 내용을 고객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여야 한다”라는 약관규제법을 근거로 원고가 피고들에게 설명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특히나 재판부는 “원고가 변론종결 당시까지도 피고들에게 위약금 조항의 의미를 설명하였다고 인정할 아무런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다”며 “원고가 고령의 피고들에게 이 사건 위약금 조항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였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재판부는 “설령 원고가 피고들에게 위약금 조항의 의미에 관하여 설명하였다고 해도 위약금 조항은 형평의 원칙상 무효”라며 “원고는 계약금 전액이 아니라 피고들에게 지급한 약정금만을 포기하면 매매계약을 해제할 수 있는 반면, 피고들은 원고로부터 지급받은 금원을 훨씬 상회하는 금액을 원고에게 지급하여야 비로소 매매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결론적으로 “원고의 피고들에 대한 모든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며 “소송 비용은 원고가 부담한다”고 판결했다.

대곡동 주민 “이번 판결을 통해 법이 강자도 약자도 아닌 상식의 편이라는 걸 알게 됐다”

법조계는 이번 판결로 전국의 토지 매매건과 관련해 일대 폭풍이 휘몰아칠 것으로 예상한다(사진=스포츠춘추)
법조계는 이번 판결로 전국의 토지 매매건과 관련해 일대 폭풍이 휘몰아칠 것으로 예상한다(사진=스포츠춘추)

한 법조인은 “매매계약 시 계약금으로 받은 돈과 관련해 매수인이 약속을 어기면 그냥 계약 무효로 끝나는 데 반해 매도인이 약속을 어기면 그 배액을 상환하는 게 무슨 관례처럼 통용돼 왔다”며 “하지만, 이번 판결로 앞으로 ‘양자간 균형이 맞지 않는 매매계약은 무효’로 판단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강조했다.

덧붙여 앞의 법조인은 “사업자가 고객과 약관으로 계약 시 고객에게 불리한 조항이 있을 경우 대개의 계약은 무효 처리된다”며 “토지 매매계약서를 약관으로 판단한 이번 판결로 매도자가 매수자보다 불리했던 관행이 크게 개선될 것”으로 기대했다.

대곡동 주민 사이에선 ‘이번 판결로 약정금을 받고서 계약했던 토지주들이 앞다퉈 계약해지에 나설 것’이란 얘기가 돌고 있다.

한 주민은 “불공정한 계약에 뒤늦게 이의를 제기했다가 소장을 받고서 극단적 선택까지 고려했던 주민이 있다”며 “이번 판결을 통해 법이 강자도 약자도 아닌 상식의 편이라는 걸 알게 된만큼 더는 주민들이 상처받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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