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루수는 덩치 큰 거포의 전유물? 편견 깨는 키움 ‘날다람쥐’ 히어로 [춘추 인터뷰]

1루수는 덩치 큰 홈런 타자들만 보는 포지션이란 편견은 버려라. 체구는 작고 홈런과도 거리가 멀지만, 주어진 1루수 역할을 그럴듯하게 잘 소화하는 키움 김태진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2022-08-18     배지헌 기자
키움 히어로즈 1루수 자리를 꿰찬 김태진(사진=스포츠춘추 배지헌 기자)

[스포츠춘추=수원]

흔히 ‘1루수’하면 사람들은 덩치 큰 거포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떠올린다. 

코끼리처럼 어떤 송구도 척척 받아낸 실업야구 스타 김응용을 시작으로 1980년대 오리궁둥이 김성한부터 1990년대 홈런타자 장종훈-이승엽-마해영, 2000년대를 대표하는 이대호-김태균-박병호까지. 오랜 세월 한국야구를 거쳐간 1루수들의 모습이 한데 섞여 우리가 1루수하면 연상하는 대표적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키움 히어로즈 김태진은 1루수 포지션과 가장 반대편에 있는 선수처럼 여겨진다. 김태진은 프로필상 키 170cm에 몸무게 75cm로 작고 다부진 몸을 지녔다. 거인들이 즐비한 1루보다는 2루수나 유격수에 적합한 신체조건이다. 통산 8홈런에 도루 29개로 ‘거포형’과도 거리가 멀다. 

야구 영화나 드라마를 찍으면 1루수로 캐스팅할 일은 없을 것 같은 겉모습. 하지만 김태진은 현재 리그 3위팀 키움에서 주전 1루수로 활약하고 있다. 그것도 그냥 1루에 서 있는 정도가 아니라 기대 이상으로 1루수 역할을 잘하고 있다. 매 경기 수비 하이라이트 필름을 만들어내고, 안타 행진을 펼치면서 박병호 이후 주인 없는 키움의 1루 공백을 잘 메꾸는 중이다.

“1루수는 덩치 큰 선수만 본다? 나도 1루수 하는데…편견입니다”

키움 히어로즈 유틸리티 플레이어 김태진(사진=키움 히어로즈)

놀랍게도 김태진의 1루 수비는 야구를 시작한 이래 올해가 처음이라고. 16일 수원에서 만난 김태진은 “올해 전에는 1루 경험이 전혀 없었다”며 크게 웃었다. 프로는 물론 고교 시절에도 1루 경험이 없다. 신일고 1학년 때는 중견수로 나왔고, 2학년 이후로는 신일고 주전 유격수로 활약했다. NC 다이노스 입단 뒤에도 2루수로 출발해 3루수, 좌익수, 중견수를 오갔지만 1루수는 본 적이 없다.

김태진의 가방 안은 각종 글러브로 가득하다. 그는 “요새는 외야 글러브를 쓸 일은 거의 없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갖고 다닌다”고 했다. 안 그래도 무거웠던 장비 가방에 올해부터는 1루수 미트까지 추가됐다. 김태진은 “솔직히 내게 생소한 포지션이긴 하다. 그래도 그동안 다른 1루수들을 본 걸 토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 3개월된 초보치고는 1루 수비가 제법이다. 17일 기준 1루수 타구처리율이 95%로 팀 내 1위다. 키움 팀내는 물론 리그 전체에서도 김태진보다 타구처리율이 높은 1루수는 두산 강진성, 한화 박정현, 롯데 안치홍까지 3명 뿐이다(100이닝 이상). 거구의 1루수는 잡기 힘들 강습 타구, 1-2간 빠지는 타구를 마치 센터라인 내야수처럼 민첩한 동작으로 잡아낸다. 바운드 송구, 빠지는 송구는 두 다리와 두 팔을 쭉 뻗어 잡는다. 그 모습을 본 키움 팬들로부터 ‘날다람쥐’라는 별명도 얻었다. 

“내야수도 해봤고, 그러면서 악송구도 많이 던져봤잖아요. 1루수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제가 잡아줄 수 있는 타구는 어떻게든 다 잡아준다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김태진의 말이다. “야수들이 쉽게 잡았든 어렵게 잡았든 마지막에는 제가 처리를 해줘야 아웃이 되니까요. 책임감을 갖고 1루 수비에 나섭니다.”

옛날 학다리 신경식처럼, 혹은 리듬체조 선수 손연재처럼 다리를 잘 찢는 비결이 있을까. 의외로 요가나 필라테스를 따로 해본 적은 없다고 한다. 김태진은 “내가 햄스트링이 튼튼한 편이다. 몸에서 제일 자신 있는 부위가 햄스트링”이라며 “덕분에 다리를 크게 찢어도 괜찮은 것 같다”며 웃어 보였다.

인터뷰 중 근처를 지나가는 송성문에게 1루수 김태진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송성문은 “정말 잘 잡아준다”면서 특유의 시원한 웃음을 터뜨린 뒤 김태진을 보며 “조금 낮게 던져야 한다는 생각도 하긴 한다”고 농담을 건넸다. 그러자 김태진은 “너무 높은 송구는 어차피 180cm 이상도 못 잡는다”며 항변 아닌 항변을 했다. 

수비코치 출신 홍원기 감독도 김태진의 1루수 수비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홍 감독은 “김태진은 어느 포지션도 다 소화하는 선수”라며 “좀 덩치가 작긴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은 바운드되는 송구도 안정적으로 잘 잡아주고 있다. 1루 수비가 괜찮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1루수는 덩치 큰 선수들의 포지션이라는 상식에 대해 김태진은 “그것도 어떻게 보면 편견”이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나도 지금 1루수로 나가고 있지 않나. 물론 키 크고 거포인 타자들이 주로 1루수를 보긴 했지만, 나도 똑같이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임한다. 수비수들을 최대한 도와주려고 노력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1루 수비는 김태진에게 큰 도전이자 좋은 기회다. 2014년 큰 기대를 받으며 프로에 입단했지만, 확실한 주 포지션이 없어 아직 주전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NC 시절엔 2루수 박민우, 3루수 박석민의 벽을 넘지 못했다. 경험이 많지 않은 외야에서 경쟁을 뚫기도 쉽지 않았다. 꾸준한 출전 기회만 주어지면 실력을 보여줄 자신이 있는데, 좀처럼 그 기회가 오지 않았다. 

김태진도 “내게는 정말 좋은 기회”라며 “부상으로 오랫동안 빠졌다가 돌아왔는데 감독님께서 믿고 써주셔서 감사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내야도 해보고 외야도 다 해봤지만, 어쨌든 내게 자리가 생긴 것”이라며 “포지션에 연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게 내게 주어진 몫”이라고 강조했다. 

키움 이적 후 맹타 “자율적 팀 분위기에 빠른 적응…가을야구 도움되는 선수 되고 싶다”

김태진이 키움 히어로즈에 없어선 안 될 선수로 자리잡고 있다(사진=키움 히어로즈)

1루수 역할에 적응하면서 타격도 점점 살아나고 있다. 발목 인대 부상으로 이탈하기 전, 5월 한 달간 김태진은 타율 0.308로 물오른 타격감을 뽐냈다. 재활을 마치고 후반기 1군에 합류해서도 특유의 정교한 방망이는 여전하다. 선발출전한 최근 5경기에선 21타수 7안타 볼넷 1개 타율 0.333으로 제 몫을 했다.

김태진은 “사실 타격감이 정말 좋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부상 전까지 너무 좋았기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아직 완벽하게 좋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며 “그래도 꾸준히 안타가 하나씩 나온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한다”고 말했다. 키움 이적후 김태진은 35경기 131타수 37안타 타율 0.282를 기록 중이다.

“키움은 자율적인 분위기가 특징이다. 감독님, 코치님부터 트레이닝 코치님들까지 모두가 편안하게 잘 대해주고 도와준다”며 만족감을 표한 김태진은 “선수들도 훈련부터 자율적으로 하는 분위기라 빠르게 팀 분위기에 스며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개인 목표보다는 팀에 더 많이 기여하는 선수, 가을야구에 가는데 도움되는 선수가 되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아마추어 유망주 시절부터 김태진은 ‘악바리’로 유명했다. 강렬한 눈빛과 몸을 사리지 않는 투지, 포기할 줄 모르는 근성은 키움 유니폼을 입은 지금도 여전하다. 김태진은 “방망이가 안 맞을 때는 수비로라도, 수비가 안 되는 날은 방망이를 잘 쳐서라도 팀에 보탬이 되고 싶다. 둘 다 안 될 때는 열심히 파이팅이라도 외치려고 한다. 팀에 좋은 영향력을 주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