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유격수’도 한때 1할 타자였다…“수비부터 안정돼야 타격도 자신감 생기죠” [배지헌의 브러시백]
-왕년의 ‘국민 유격수’ 박진만 감독대행 “신인 때 내 수비, 부족했다” -맹훈련과 경험 통해 얻은 수비 자신감, “‘공이 나한테 왔으면’ 하는 생각도” -수비가 안정되자 타격도 안정, 나중엔 장타 툴까지 장착 -“수비가 불안하면 타석도 불안, 수비가 안정돼야 타격 자신감도 생긴다”
[스포츠춘추]
“내야수는 수비부터 안정돼야 타격도 안정된다. 수비가 불안하면 타석에서도 분명 그 영향이 돌아온다.”
박진만 삼성 라이온즈 감독대행은 현역 시절 ‘국민 유격수’라는 영광의 별명으로 불린 명 유격수 출신이다. 특유의 부드럽고 여유가 넘치는 수비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고, 타격에서도 유격수 포지션 기준 정상급 기록을 꾸준히 올렸다. 어느정도 연차가 쌓인 뒤엔 홈런도 곧잘 때렸다.
역대 유격수 최다출전, 최다안타, 최다홈런, 최다타점 기록을 모두 보유한 박 대행은 유격수 골든글러브도 5번 수상해 ‘레전드 40’ 김재박 전 감독과 함께 역대 유격수 최다 수상자로 남아 있다.
하지만 국민 유격수도 날 때부터 공수를 겸비한 완성형 선수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처음 프로에 입단했을 때는 나름의 시련도 겪었고 성장통도 경험했다. 박 대행은 최근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신인 때 내 수비는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였다”고 했다. 각종 국제대회에서 미국, 일본 선수들도 놀랄 만큼 환상적인 수비를 선보였던 수비 교본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고백이다.
“수비에 여유 생기니 타격도 자신감…나중에는 장타도 노려”
박진만 대행은 “지금 와서 돌아보면 좌충우돌하며 부딪혔던 것 같다. 마음은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보니 여러모로 부족했다”고 신인 시절을 떠올렸다.
그런 박 대행에게 유격수 선배 김재박 당시 감독이 내린 처방은 끊임없는 훈련이었다. 펑고를 쳐주는 김재박 감독 손에서 피가 날 정도로 많은 훈련을 소화했다. 박 대행도 “시키는 걸 하느라 뭘 물어볼 겨를이 없었다. 쉴 새 없이 (연습을) 계속 시켰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맹훈련을 통해 박 대행은 특유의 한 박자 빠른 위치선정, 빠른 송구 전환, 어떤 자세에서도 정확하게 던지는 송구 능력을 얻었다. 그는 “몇 년 동안 많은 훈련을 하다 보니 나중엔 조금은 편안한 수비를 하게 됐다. 경험이 쌓이면서 안정감이 생겼고, 심리적으로 편안해지면서 수비 자신감이 생겼다”며 “그렇게 되기까지 거의 3, 4년은 걸렸다”고 돌아봤다.
박 대행은 “처음엔 나 스스로 불안했다. 공이 나한테 안 왔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몇 년 지난 뒤에는 반대가 됐다. ‘나한테 오지 마라’에서 ‘나한테 왔으면’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타구가 이렇게 오면 이런 식으로 처리해야지’ 예상도 했다”며 “그 자신감이 수비에 묻어나면서 그때부터 여유가 생겼다”고 했다.
자신감과 여유가 생기면 경기를 보는 시야가 넓어진다. 박 대행은 “타자를 분석할 여유가 생기니까, 그때부터는 어떤 선수가 나왔을 때 타구가 어느 쪽으로 갈지가 보이더라. 타자의 스윙 궤적과 우리 투수 공의 궤적, 그 맞는 포인트에 따라 타구가 향하는 방향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내야수들끼리도 누가 어디에 서 있을지, 작전이 나왔을 때 상대 움직임에 따라 서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등을 서로 눈치껏 주고받으며 손발을 맞췄다”는 박 대행의 회상이다.
수비가 안정되고 난 뒤에 컨택 툴이 더해졌다. 사실 프로 데뷔 시즌 박 대행의 타격 성적인 신인치고 나쁘지 않았다. 115경기 타율 0.283에 6홈런 OPS 0.734로 유격수치고 준수한 타격을 선보였다. 그러나 2년차 시즌 타율이 역대 규정타석 최하 2위에 해당하는 0.185로 떨어졌고, 3년차인 1998년에도 0.203에 그쳐 멘도사 라인에 머물렀다.
박 대행은 “타격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다”면서 “수비는 자신이 있었는데, 타격이 조금 부족하다는 평가가 있어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털어놨다.
극심한 타격 침체에도 박 대행은 계속 주전 유격수 자리를 지켰다. 아무리 방망이가 부진해도 수비가 워낙 좋아 라인업에서 뺄 수 없었다. 당시 현대 타선이 워낙 초호화 멤버다 보니, 9번타자 유격수 하나 정도는 부진해도 크게 표가 나지 않았다.
박 대행은 “그때 분위기는 타격보다 수비였다. 김재박 감독님이 유격수 출신이다 보니 무조건 수비가 우선이었다”면서 “수비에 여유가 생기니까 타격 훈련량이 늘어났고, 그러면서 자신감이 붙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타격도 좋아졌다”고 돌아봤다.
1999년 타율 0.263으로 ‘리그 평균’ 타격을 회복한 박 대행은 2000년 타율 0.288에 15홈런으로 생애 첫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 2001년엔 0.300에 22홈런으로 생애 첫 3할 타율과 20홈런을 동시 달성했다.
“타석에서도 경험을 쌓고 여유가 생기니까 내 타격 메커니즘에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면서 장타 능력도 발휘가 됐다. 유리한 카운트에서는 장타를 노리기도 하고, 불리한 카운트일 때는 컨택해서 바가지 안타라도 치려고 했다.” 박 대행의 회상이다.
‘국민 유격수’도 한때 1할 타자였다…젊은 유격수들 새겨야 할 수비 중요성
돌고 돌아 결론은 다시 ‘수비’다. 박진만 대행은 “내 생각에 내야수는 수비가 우선이다. 먼저 수비할 때 마음이 편하고 안정감이 있어야 타석에서도 안정감이 생기고 자신감이 든다”고 강조했다. 1할타자 시절에도 수비 덕분에 계속 경기에 나오고, 그러면서 타격에 눈을 뜬 경험에서 나온 조언이다.
“야구는 멘탈 게임”이라고 언급한 박 대행은 “수비에서 멘탈이 흔들리면 분명 타석에도 영향이 나타난다. 자기 볼이 와도 그냥 놓치는 상황이 생긴다. 불안하고 자신감이 떨어지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방망이가 안 나오는 것”이라 지적했다.
박 대행의 ‘수비 우선’ 원칙은 이재현, 김지찬, 김영웅 등 삼성의 내야 유망주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하나같이 고교 시절 타격 능력으로 큰 주목을 받았고 높은 순번 지명으로 입단했지만, 아직 프로 투수들 상대로는 고전하는 모습. 하지만 그럴수록 수비부터 탄탄하게 기초를 쌓아야 다음 기회가 생긴다.
타격만 되고 수비는 안되는 선수는 벤치를 지키지만, 수비가 되는 선수는 타격이 조금 부족해도 꾸준히 기회를 받는다. ‘국민 유격수’도 한때는 1할 타자였다. 수비부터 시작해서 컨택, 다음에는 파워까지 단계별로 성장해 최고의 유격수가 됐다. 젊은 유격수들이 롤 모델로 삼을 만한 성장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