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타자 ‘지도자 경험 無’ 문제 안 되는 이유 [배지헌의 브러시백]
-현장 지도자 경험 없는 이승엽 감독, 경험 부족 문제없을까 -과거에는 감독 되려면 코치 경험 필수…이승엽 감독 향해 일각에서 우려도 -MLB에선 보편화한 ‘감독 직행’ 사례, 경험과 직감 대신 소통 능력 강조하는 흐름 -경험부족 채워줄 ‘ML식 벤치코치’ 김한수 수석 역할 중요해
[스포츠춘추]
현장 코치 경험은 야구 감독이 되기 위한 필수 관문일까.
두산 베어스 사령탑으로 취임한 ‘국민타자’ 이승엽을 보는 시선에는 기대와 우려가 공존한다. 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슈퍼스타가 감독으로 어떤 야구를 보여줄지 기대감도 크지만, 은퇴 이후 지도자 경험이 전무하다는 점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선수로서 이승엽은 비교할 대상이 없는 레전드였다. 1995년 삼성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해 2017년 은퇴까지 통산 1096경기에서 타율 0.302에 467홈런 1498타점의 경이로운 기록을 쌓았다.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 한을 푼 주인공도, 역대 한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을 세운 것도 이승엽이다. KBO 선정 ‘레전드 40’에서도 전체 4위에 오른 불세출의 스타다.
그러나 은퇴 이후 5년간은 야구 현장 일선을 떠나 있었다. 지도자 대신 SBS 방송 해설위원과 KBO 홍보대사, 총재특보, 야구장학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한 야구 예능프로그램에서 감독 비슷한 것을 맡긴 했지만 하루하루가 전쟁인 프로야구 감독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동안 KBO리그에서는 1군 감독이 되려면 코치 경험이 필수였다. 코치로 다년간 경험을 쌓은 야구인 가운데 능력과 자질이 검증된 인물에게 감독 기회가 돌아갔다. 지도자들은 감독 곁에서 투수기용, 선수교체, 작전과 선수단 관리를 보고 배우며 수업을 쌓았다. 이승엽 감독 부임 소식을 접한 한 야구인은 “다년간 코치 경험을 쌓은 뒤 감독을 맡아도 시행착오를 겪는데, 코치 경험 없이 바로 감독을 맡는 건 무모하다”고 비판적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현대 야구에서 더이상 코치 경험이 감독이 되는 필수 조건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한 구단 관계자는 “감독이 하는 역할과 코치의 영역은 다르다. 물론 코치 경험이 감독직을 수행하는 데 도움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코치에게 요구되는 덕목과 감독의 자질은 별개”라는 생각을 밝혔다. 과거 야구에서 감독이 선수 지도까지 책임졌다면, 최근에는 점점 ‘관리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코치 시절 ‘차기 감독감’이라고 좋은 평가를 받았던 사람 중에 막상 감독을 맡겨보니 실망스러웠던 사례가 적지 않았다. 시켜보기 전에는 모르는 게 감독”이라며 “오랫동안 코치 일을 했거나 코치로 잘했다고 다 좋은 감독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경험의 정의가 바뀌었다” 지도자 경험 없는 감독, MLB에선 더는 ‘파격’ 아니다
실제 최근 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선 현장 코치 경험 없이 감독직에 오르는 사례가 점점 증가하는 흐름이다. 데이비드 로스(시카고 컵스), 애런 분(뉴욕 양키스), 스캇 서비스(시애틀 매리너스), 크레이그 카운셀(밀워키 브루어스), A.J. 힌치(디트로이트 타이거즈) 등이 대표적. 알렉스 코라(보스턴 레드삭스) 감독도 은퇴 후 벤치코치 1년이 지도자 경험의 전부다.
이와 관련해 ‘USA 투데이’의 낸시 앨런은 ‘MLB 감독이 되는 데 경험이 필수일까?’라는 기사에서 “경험은 과대평가돼 있다”고 주장했다. “경험은 여전히 중요하다. 단지 그것의 정의가 바뀌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기사에서 앨런은 “A.J. 힌치의 선임을 계기로 야구계엔 모든 감독이 비슷한 이력서를 가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다”며 “분석 파트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권력은 프런트 오피스로 이동했다. ‘구식’ 감독 경험의 필요성은 줄어들었다. 라인업과 경기 내 움직임은 이제 ‘직감’만이 아니라 숫자에 의해 좌우된다”고 썼다.
오늘날의 야구에선 잠자리 눈깔을 한 전지전능한 야구의 신 혼자서 모든 것을 혼자 판단하고 결정하지 않는다. 분석 파트부터 각 분야 전문 코치, 트레이닝 파트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정보와 의견을 토대로 선택이 이뤄진다. 현역 시절 가장 ‘촉’이 좋은 선수란 평가를 받았던 폴 몰리터는 감독 시절 “더 많은 정보를 접할수록 내 직감도 더 좋아졌다”며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경험과 직감 대신 ‘소통’ 능력이 중요해졌다. 토리 러벨로(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선수들과 관계를 쌓는 게 감독 역할의 큰 부분이다. 유머 감각은 물론 경청할 줄도 알아야 한다. 선수들은 감독의 결정이 어떻게 내려졌는지 알기 원한다”고 했다.
코치 경험 없는 감독의 대표 성공 사례인 A.J. 힌치는 “내 역할은 선수들을 다그칠 때는 다그치고, 보듬어줄 때는 보듬고, 선수들을 믿으면서 스스로 믿음을 갖고 승리를 추구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야구는 선수가 한다. 내 임무는 선수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앤디 그린(샌디에이고 파드레스) 전 감독도 “감독의 역할은 소통이다. 선수들을 끈끈하게 묶어주는 역할”이라며 “시대는 달라졌지만 감독의 성공 여부는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최선의 환경을 만들어주는 데 달려있다. 그 방법을 아는 사람이 감독으로서 성공한다”고 말한 바 있다.
‘USA 투데이’ 낸시 앨런은 “카운셀, 분, 코라 같은 감독이 어디 길거리나 ‘맥주리그’에서 데려온 감독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질문했다. 그는 “모두 오랜 선수 경력을 가졌고, 다양한 감독과 함께하며 그들이 어떻게 감독직을 수행하는지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고 썼다.
이승엽 감독 역시 코치 경험은 없지만 야구에 관한 지식과 권위에 대해선 누구도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인물이다. 대선수 출신으로 누구보다 야구에 정통하고,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꾸준히 최신 야구 이론을 배웠다. 자신만의 야구관도 확고하다.
취임식에서 한 발언들을 통해 이 감독의 야구관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팀의 모든 부분을 다 강하게 만들고 싶다. 평균자책과 타율도 아쉬웠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실책이었다”며 수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기본기와 디테일을 강조하고 싶다. 그 기본기와 디테일은 땀방울 위에서 만들어진다. 현역 시절 만난 두산은 탄탄한 기본기와 디테일에서 앞서가면서 상대를 압박하는 팀이었다. ‘허슬두’ 색깔 구축을 최우선 목표로 하겠다”라고 강조했다.
“선수들에게 기회는 동등하게 줄 거다. 20살, 35살, 40살 다 똑같다. 진중하게 진심을 다해서 플레이하고, 조금 더 야구에 몰입하는 선수에게 마음이 가지 않을까. 그 과정 뒤에 결과를 보여주는 선수가 경기에 나설 것”이라며 선수 기용 원칙도 내비쳤다. ‘베어스 TV’가 공개한 김재환과의 대화 장면에서는 부드러우면서도 분명하게 선수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소통 능력을 볼 수 있었다.
‘ML식 벤치코치’ 김한수 수석, 이승엽 경험부족 채울 조력자
부족한 현장 경험은 코칭스태프가 보좌해서 채울 수 있다. 이를 위해 이승엽 감독은 삼성 감독 출신 김한수 수석코치를 직접 추천해 영입했다. 김 수석은 메이저리그에 보편화된 ‘감독 출신 벤치코치’로서 이 감독이 1군 사령탑으로 안착하게 도울 예정이다. 한 경기와 시즌을 치르면서 생기는 각종 돌발 상황에 빠르게 대처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승엽 감독 이전에도 지도자 경험 없이 감독이 된 사례는 있었다. 장정석 KIA 단장이 키움 시절 프런트에서 감독으로 직행해 한국시리즈 준우승 성과를 거뒀고, 허삼영 전 삼성 감독도 코치 경험 없이 감독에 올라 2021 정규시즌 공동 1위 성적을 거둔 바 있다. 멀리는 백인천 MBC 청룡 감독도 일본프로야구 선수에서 한국야구로 건너와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한 사례다.
중요한 건 감독에게 필요한 자질을 갖췄는지 여부이지, 코치 경험이 아니다. 두산은 이승엽 감독이 충분한 자질을 갖췄다고 판단했다. 이승엽 본인과 한국야구를 위해서라도 그 판단이 틀리지 않았길 바란다. 실제 시즌을 준비하고 치르다 보면 분명 시행착오와 시련이 따르겠지만, 누구보다도 큰 부담감 속에 야구 인생을 살아온 이승엽이라면 잘 이겨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