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한국과 동급” 타이완 야구의 급성장에서 배워야 할 것 [춘추 집중분석]
* 타이완에 설욕, 아시안게임 금메달 4연패 이룬 한국야구 * 금메달 하나로 한국야구 문제 사라지지 않아…냉정하고 차분하게 돌아봐야 * 타이완 야구의 급성장, 이제는 한국야구와 동급 * “타이완에선 돈 없어도 야구 가능해…기업가들이 지역팀 후원”
[스포츠춘추]
한국야구가 벼랑 끝에서 마지막 순간 기사회생했다. 아시안게임 금메달 4연패를 향한 한국의 도전이 결승전 승리로 ‘해피엔딩’을 맞았다. 25세 이하 젊은 선수들 위주로 구성한 대표팀이 거둔 우승이라 더 의미가 있다. 앞으로 국가대표를 이끌어갈 든든한 코어 멤버를 찾았고, 문동주라는 특급 에이스와 박영현이란 차세대 마무리도 발견했다. 기분 좋은 뉴스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끝이 좋았다고 모든 게 다 좋은 건 아니다. 금메달 하나로 한국야구 앞에 놓인 모든 문제가 일거에 해소될 리 없다. 잇따른 국제대회 참패에 한국야구 위기론이 제기됐던 게 불과 몇 달 전이다. 조별 예선 타이완전에서 패한 직후엔 거의 한국야구 ‘종말론’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한 경기 끝날 때마다 ‘참사’와 ‘쾌거’를 오가는 일희일비에서 벗어나, 이번 대회에서 나타난 문제점과 보완할 부분을 냉정하게 진단하고 차분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다. 당장 다음 달부터 일본에서 열리는 2023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APBC) 대회가 있다.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세계야구와 좁혀진 격차…타이완 야구의 맹추격
금메달로 끝난 이번 대회는 역설적이게도 한국야구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실력 차가 그 어느 때보다 좁혀졌음을 보여줬다. 과거 5회 콜드게임이 당연한 상대였던 홍콩전은 막판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접전으로 펼쳐졌다. 중국전도 큰 점수 차로 이기긴 했지만 전처럼 상대를 압도하는 경기 내용은 아니었다. 나오는 투수마다 150km/h대 광속구를 뿌리는 일본 사회인야구의 저력은 놀라움을 안겼다.
무엇보다 눈에 띈 건 타이완(대만) 야구의 눈부신 발전이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야구인들 사이에선 타이완을 한국보다 ‘한 수 아래’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한국과 일본을 ‘아시아 2강’으로 묶고, 타이완은 그보다 아래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대회에서 확인한 타이완 야구는 어느새 한국과 대등한 수준까지 올라와 있었다. 일부 전문가 사이에선 -대표팀 한정으로- ‘한국보다 근소하게 앞선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25세 이하 국내 선수가 주축인 한국과 비교해 타이완은 ‘최정예 멤버’를 총동원했다고 깎아내릴 일이 아니다. 타이완은 야구 유망주들의 자국 리그 선호도가 낮아, 대부분의 특급 유망주가 미국과 일본으로 직행한다. 반면 한국에선 절대 다수의 유망주가 KBO리그행을 선호한다. KBO리거 중심인 한국이나 마이너리거가 주축인 타이완이나 양국이 내세울 수 있는 최고의 젊은 선수들로 대표팀을 꾸렸다는 점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 맞대결에서 한국과 타이완은 1승 1패를 주고받았다. 한 구단 관계자는 “두 차례 타이완 전을 보면서 ‘다음에 또 만나면 이기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아시아 지역을 담당하는 메이저리그 A 구단 스카우트는 “최근 몇 년 새 타이완 지역에서 어느 때보다 좋은 유망주가 많이 나오고 있다. 미국 구단들도 한국보다 타이완 쪽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살펴보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타이완과 한국야구를 오가며 가교 구실을 하는 남기상 씨는 “현재 미국, 일본 스카우트들이 타이완에 장기체류하며 고교 선수들을 관찰하고 있다”고 밝혔다.
타이완의 인구는 약 2,330만(2023년 기준)으로 한국의 절반도 되지 않는 수준이다. 하지만 아마추어 야구의 저변만큼은 한국에 뒤지지 않는다. 남기상 씨는 “현재 타이완에는 약 100여 개 고교야구팀이 있다. 실제 대회에 참가하는 팀은 40~45개 팀으로 팀당 30명에서 60명 정도의 선수가 활동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남 씨는 “특히 신체조건과 운동능력이 우수한 타이완 원주민 출신 중에서 좋은 선수가 많이 나온다. 원주민 출신 선수들을 어릴 때부터 전략적으로 육성해서 야구선수로 키워내고 있다”고 귀띔했다.
메이저리그 B 구단 스카우트는 “한국은 학생 선수가 야구를 하려면 금전적 부담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안다. 반면 타이완은 엘리트 선수가 야구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많이 들지 않아서, 보다 많은 학생이 야구를 할 수 있다”고 전했다. 남기상 씨는 “타이완에선 지역마다 기업가들이 아마추어 야구부와 선수들에게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문화가 활성화돼 있다”고 했다.
한 아마야구 관계자는 “최근 한국 학생야구 선수들을 보면 거의 절대다수가 형편이 여유로운 집안 자녀들”이라며 “옛날엔 넉넉지 않은 집안 환경에서도 좋은 선수가 나오곤 했는데 최근엔 돈이 없으면 재능이 있어도 야구를 계속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150km/h를 던질 재능있는 선수가 특정 계층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지 않나. 재능있는 모든 학생에게 야구할 기회가 주어지는 타이완 야구가 점점 발전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앞의 구단 관계자는 “과거 타이완 야구를 보면 힘은 좋은데 다소 세기가 떨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플레이가 거칠고 세밀함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면서 “이번 대회에서 타이완 선수들의 탄탄한 기본기와 짜임새 있는 팀플레이를 보고 놀랐다”고 했다. 남기상 씨는 “어릴 적부터 많은 실전 경기를 치르면서 쌓은 경험 덕분”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타이완에선 해마다 22개의 크고 작은 대회가 열린다. 예선전 대결에서 타이완이 보여준 경기력은 경기 경험의 차이라고 본다”는 의견을 전했다.
“유망주 집중 육성-후원하는 타이완 야구, 앞으로 더 좋아질 것”
이처럼 나이 어린 유망주들을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육성한 결과 최근 타이완 야구에선 150km/h대 광속구 투수가 쏟아져 나오는 중이다. 이번 대회에선 150km/h를 넘어 160km/h를 던지는 투수가 올라와 한국 타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어릴 적부터 이런 투수들과 자주 상대한 타자들의 타격 기술도 자연히 향상되게 마련. 타이완 야구를 아는 전문가들이 “지금도 좋지만 앞으로는 더 좋아질 것”이라 자신하는 이유다.
한국야구의 성장이 둔화한 사이, 타이완을 비롯한 전 세계 야구는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이미 지난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확인했고 이번 아시안게임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된 사실이다. 얼마 전까지 야구의 변방으로 여겼던 나라에서 잠재력 있는 선수가 속속 등장하는 광경은 흐뭇하면서도 한편으로 두려움을 준다. 금메달에 도취해 있을 여유가 없다. 한국야구는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