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후 보자’ ML 5개 구단 고척돔 출동…자이언츠 단장은 기립박수 [춘추 집중분석]
* 10일 고척 홈 고별전 치른 이정후, 마지막 타석에서 12구까지 가는 명승부 * 이정후의 마지막 메시지 “키움에서 보낸 7년 세월, 잊지 못할 것” * 이정후 보러 고척 찾은 ML 5개 구단, 샌프란시스코는 단장이 직접 방문해 * ’적응’ 강조한 이정후 “김하성 형 준비과정 지켜봐…많이 물어보고 잘 준비하겠다”
[스포츠춘추=고척]
“어젯밤부터 계속 긴장 상태였습니다. 프로 데뷔 첫 경기 전보다도 더 긴장되는 것 같아요.”
KBO리그 MVP와 타격 5관왕, 5년 연속 골든글러브에 빛나는 슈퍼스타에게도 긴장되는 순간이 있다. 막 팬 사인회를 마치고 더그아웃에 나타난 키움 히어로즈 외야수 이정후는 상기된 마음을 다스리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이날(10일) 삼성 라이온즈전은 이정후가 KBO리그에서 치르는 마지막 홈 경기.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올 시즌 키움의 고척 홈 경기는 모두 끝난다. 시즌이 끝나면 이정후는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 도전한다.
키움 팬들은 이미 이런 식의 이별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과거 강정호, 박병호가 이렇게 떠나갔고 3년 전에는 김하성과도 작별을 고했다. 또 다른 예비 메이저리거의 마지막을 배웅하려는 듯 이날 고척엔 화요일 경기로는 이례적으로 많은 11,757명의 관중이 찾았다. 키움 팬은 거의 열에 세 명꼴로 ‘이정후’와 등번호 51번을 마킹한 유니폼을 착용했다. 경기 전 열린 팬 사인회는 스타 외야수를 두 눈에 간직하려는 팬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팬들이 ‘가지 말라’고 붙잡지 않았나’란 질문에 이정후는 “팬분들이 한마디씩 해주셨는데, 다들 그런 식의 말씀을 하시더라”면서 “기분이 묘했다”고 답했다.
이정후의 고별전 “키움에서 시작한 7년 세월, 잊지 못할 것”
이날 고척엔 키움 팬은 물론 또 다른 방문자들이 함께했다. 이정후 출전 소식을 입수한 메이저리그 구단 스카우트와 관계자들이 야구장을 찾은 것. 한 야구 관계자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등 5개 구단에서 왔다”고 전했다. 경기장에서 만난 한 ML 스카우트는 “2주 전에 미리 방문을 신청했다”며 “아마도 이날쯤에는 경기에 나오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다행히 이정후의 플레이를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 스카우트는 “부상에서 돌아온 이정후의 몸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오늘 경기까지 체크한 뒤 구단에 보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일단 경기 전 훈련하는 모습만 봐선,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스카우트의 말이다.
경기전 홍원기 키움 감독은 이정후의 경기 후반 대타 기용을 예고했다. 외야 수비도 1이닝 소화한다고 말했다. 지난 7월말 왼쪽 발목 신전지대 손상으로 수술을 받은 이정후는 재활 프로그램 마지막 단계를 소화하는 중이다. 그는 “뛰는 데는 문제가 없다. 뛸 때 통증이 전혀 없고 재활이 잘된 것 같다”고 했다. 한 지방구단 트레이너는 이정후가 한 수술에 관해 “심각한 부상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실제로는 간단한 수술이라 100% 완치된다고 보면 된다. 재활 마치고 나면 원래 수준으로 플레이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다만 재활 후 실전 투입에 필요한 일반적 과정을 생략했기에 선발 출전은 무리라는 설명이다. 이정후는 “아직 재활 단계가 다 끝나지 않았다. 이제 프리배팅을 치고 있는데 원래는 라이브 배팅을 하고, 2군 경기를 뛰어봐서 괜찮으면 1군 경기에 나가는 순서다. 그걸 다 생략하고 바로 경기에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100%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날 홈 최종전 출전은 어디까지나 팬들을 위한 ‘이벤트’에 가깝다. 이정후는 이날 이후 2차례 원정경기에는 출전하지 않을 예정이다. 앞의 ML 스카우트도 “인천과 광주 원정경기엔 가지 않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정후의 KBO리그 마지막 타석은 8회말 공격에서 돌아왔다. 3대 0으로 앞서 가다 8회초 동점을 내준 키움은 8회말에 나온 임지열의 2점 홈런으로 다시 리드를 잡았다. 그러자 홍원기 감독은 지체없이 ‘대타 이정후’를 호명했다. 내년 시즌 외야 ‘후계자’ 후보 중 하나인 박수종 타석에서 이정후가 대타로 등장했다. 1루쪽은 물론 3루쪽 관중석에서도 큰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정후는 타석에 들어서기 전 우익수 쪽 관중석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어 1루 쪽, 백스탑쪽, 원정 관중석을 향해 목례했다.
상대투수는 올해 초 트레이드 전까지 동료였던 김태훈. 초구 변화구는 볼, 2구째 빠른 볼은 스트라이크가 선언됐다. 3구와 4구는 존에서 크게 벗어나는 볼, 5구째 헛스윙으로 꽉 찬 풀카운트가 됐다. 이후 이정후는 6구부터 11구까지 6연속 파울 타구를 만들면서 끈질긴 승부를 펼쳤다. 김태훈도 2구부터 모든 공을 패스트볼로 구사하며 정면승부를 피하지 않았다. 마침내 12구에서 승부가 갈렸다. 이정후가 밀어친 땅볼 타구가 수비 시프트로 유격수 위치에 있던 3루수의 글러브로 향했다. 이정후는 나름의 전력을 다해 1루로 달렸지만, 결과는 간발의 차로 아웃. 관중석에 여기저기서 아쉬움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 장면을 지켜본 ML 스카우트는 경기 후 “내가 초시계를 잘못 쟀나 싶었다”고 말했다. “분명히 느리게 뛰었다고 봤는데, 초시계에는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뛴 걸로 나왔다.”
12구까지 가는 명승부를 지켜본 한 키움 팬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이정후는 역시 대단한 선수다. 마지막 타석에서 12구 승부를 한 덕분에 응원가를 4번이나 불렀다’고 적었다.
고별 타석을 마친 이정후는 9회초 글러브를 끼고 중견수 수비에 나섰다. 2사 후 안주형의 타구가 외야로 향했고, 공은 이정후가 아닌 좌익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다. 3아웃. 그렇게 이정후의 한국 무대 마지막 경기가 끝났다. 선수단과 하이파이브를 나눈 이정후는 그라운드에 늘어서 팬들을 향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전광판에는 이정후의 그간 활약상을 담은 영상과, 새로운 도전을 응원하는 메시지가 표시됐다.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고마웠어, 너의 앞날을 응원해!’
“뭉클했습니다.” 경기 후 이정후가 들려준 소감이다. “7년이라는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는 게 느껴졌습니다. 앞으로 7년보다 더 긴 야구 인생이 남아 있겠지만, 제가 처음 시작했던 이 7년은 가슴 속에서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ML 5개 구단 고척돔 방문 “이정후 부상 우려 씻었다”
이정후가 선수단 대표로 마이크를 잡고 발언하는 동안, 이를 관중석에서 팬들과 함께 지켜본 메이저리그 구단 고위 인사가 있었다. 바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피트 푸틸로 단장이다.
지난 7일에도 고척을 찾았던 푸틸로는 이날도 혼자 관중석에 앉아서 경기를 끝까지 관전했다. 그는 경기가 끝난 뒤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키움 구단이 준비한 팬서비스 행사를 함께 즐겼다. 팬들이 일어나면 함께 일어나고, 모두가 박수를 치면 따라서 박수를 쳤다. 그 모습은 메이저리그 관계자라기보다 마치 새로 유입된 외국인 KBO 팬처럼 보였다.
다른 구단 스카우트는 푸틸로 단장의 이런 모습에서 이정후 영입을 향한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고 한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의지가 상당히 강한 것 같다”면서 “처음엔 일본의 야마모토 요시노부를 보러 온 김에 들렀는가 싶었다. 그런데 알아보니 야마모토는 18일 전까지 등판 일정이 없더라. 게다가 이정후는 경기에 나올지 안 나올지도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구단 아시아 스카우트와 함께 온 것도 아니고 단장 혼자 야구장을 찾았다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다른 빅리그 구단 관계자도 비슷한 의견을 내놨다. 그는 “자이언츠 단장이 마치 이정후의 팬처럼 관중과 함께 기립하고 박수도 치더라”면서 “저런 모습이 선수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크게 작용할 거라고 본다. 물론 금액 차이가 크면 모르겠지만, 비슷한 조건이라면 단장이 저렇게 정성을 보이는 팀에 마음이 가지 않겠나. 단장이 직접 방문했고 인사까지 했는데, 마음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정후 본인의 생각은 어떨까. 경기 전 미디어 인터뷰에서 ‘선호하는 ML 구단이 있나’란 질문이 나오자 이정후는 “제가 (메이저리그)팀을 잘 모른다”며 즉답을 피했다. 그는 “정말 많은 분이 아는 그런 팀밖에 모른다”며 “(포스팅을) 시작해봐야 알 것 같다. 그때 되면 정해질 거다. 저는 그런 데 신경 쓰는 스타일이 아니라, (에이전트에서) 알아서 잘 해주실 거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절친한 선배 김하성의 소속팀 샌디에이고에서 함께 뛸 생각은 없나’란 질문도 나왔다. 미국 스포츠 매체 ‘디 애슬레틱’은 앞서 김하성 특집 기사에서 “절친한 동료이자 2022년 KBO 최우수선수(MVP)인 이정후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다음 타자가 될 수 있으며, 이정후는 (김하성과) 재결합에 대한 관심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며 “공교롭게도 샌디에이고는 이 외야수와 계약할 강력한 후보로 꼽히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정후는 이 질문도 재치 있게 빠져나갔다. 그는 “하성이 형이 1년 뒤 FA(프리에이전트)라서, 봐야 하지 않을까?”라며 “미국은 트레이드도 활발하게 하는데, 하성이 형이 가치가 올라가면 트레이드할 수도 있지 않나. 두고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의 보라스’ 리코 스포츠 소속인 이정후는 미국 현지 에이전트로 진짜 ‘보라스’와 계약했다. 이날 고척엔 보라스 코퍼레이션 관계자 2명이 방문해, 푸틸로 단장을 비롯한 스카우트들에게 자세한 정보와 안내를 제공했다. 한 관계자는 “샌프란시스코 외에 다른 구단에서도 고위 인사가 한국을 찾을 예정”이라며 “아직 구체적 타임테이블이 정해진 건 아니지만, 이정후가 미국으로 건너간 뒤 훈련을 비롯한 각종 계획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고척에서 만난 한 메이저리그 구단 관계자는 “이정후의 미국 진출은 기정사실이다. 관건은 계약기간과 금액 등 조건”이라고 말했다. 이미 지난해까지 보여준 활약으로 쇼케이스는 끝났다. 최근 메이저리그에서 공수를 겸비한 중견수가 ‘귀하신 몸’ 대접을 받는 것도 이정후에게 유리한 조건이다. 부상과 수술로 생긴 물음표도 이날 경기를 통해 깨끗이 지웠다. 한 스카우트는 “뛰는 데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겨울까지 재활하고 휴식을 취하면 정상으로 돌아올 것 같다”면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운동신경과 젊은 나이 덕분인지 굉장한 회복력을 자랑한다”고 했다.
먼저 건너간 김하성이 메이저리그에서 거둔 성공도 이정후에겐 큰 도움이 될 전망. 김하성의 MVP급 활약으로 미국 구단이 한국인 타자를 보는 인식이 달라졌다. 이정후는 “하성이 형이 내일(11일) 한국에 올 예정인데, 만나게 되면 많은 걸 물어볼 생각이다. 형도 많이 도와주겠다고 얘기했다. 조언을 구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하성이 형이 어떻게 준비하는지 옆에서 지켜봤다. 그래서 올해 잘할 줄 알았다”며 “막판에 체력적인 문제로 인해 페이스가 조금 떨어졌지만, 그래도 엄청나게 잘한 성적 아닌가”라며 김하성의 준비 과정을 참고하겠다고 밝혔다.
김하성 특집 기사에서 ‘디 애슬레틱’은 “이정후가 어느 팀에 합류하든 2021년 이후 김하성이 쌓아온 지혜를 활용할 수 있다”면서 “빅리그 투수들의 속구를 치거나 제2외국어를 연습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김하성은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낯선 문화에 뛰어들고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고 했다.
이정후도 ‘적응’의 중요성을 모르지 않는다. 그는 “나도 아직 안 해봐서 잘 모르지만, 미국에 진출한 선배들에게 여쭤보니 적응이 중요한 거 같다”며 “아무리 한국에서 잘했다고 해도 거기 가서 잘할 거란 보장도 없고, 제가 빨리 적응해서 그 리그에 잘 녹아드는 게 먼저다. 얼마나 빨리 적응하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영어 공부도 조금씩 하고 있습니다. (선배들의) 공통적인 말씀이 영어를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하루 지나면 까먹긴 하지만, 매일 열심히 공부해야죠.” 이정후가 말했다.
이정후는 자신의 도전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하성이 형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자신 때문에 앞으로 다른 선수들이 미국 진출을 못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웠다고 한다”면서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나 이후에도 많은 선수가 미국에 진출하려면, 내가 잘해서 한국 선수에 대한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열심히 하는 건 당연하고, 정말 잘해야죠. 그러려면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하성이 형에게도 많이 물어보면서, 잘 준비하겠습니다.” 새로운 무대에서 큰 도전을 앞둔 이정후의 각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