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적에서 영웅으로, 지옥에서 극락으로…가을야구 진수 보여준 1차전 [춘추 비하인드]
삼중살을 친 타자가 결승타를 친 영웅이 되고, 1회 지옥을 경험한 투수가 6회까지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했다.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KT와 LG가 가을야구의 진수를 보여줬다.
[스포츠춘추=잠실]
한 경기에서 삼중살과 결승타를 모두 기록한 타자가 포스트시즌 역사에 몇이나 될까? 아니, 야구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11월 7일 잠실에서 열린 2023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KT 타자 문상철이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9회초 마지막 타석 전까지만 해도 문상철은 이날 경기 ‘워스트’ 후보였다. 1대 2로 뒤진 2회초 공격 무사 1, 2루에선 번트 실패로 수비 기록상 ‘삼중살’을 당했다. 한국시리즈 역사상 2번째이자 포스트시즌 사상 네 번째 트리플 플레이가 나왔다. 7회초에도 주자 두 명을 놓고 삼진으로 물러났다. 이날 경기 삼진만 두 개.
9회초 2사 주자 1루에서 마운드에는 강력한 구위를 자랑하는 LG 마무리 고우석이 있었다. 고우석은 이날 나오자마자 전광판에 155, 156km/h를 찍어댔다. 고우석의 초구는 커브였다. 그대로 흘려보내 스트라이크. 이어 빠른볼에 스윙했지만 파울이 되면서 2낫싱으로 몰렸다. 시즌 때 0-2 이후 고우석의 피안타율은 0.135에 불과했다. 0-2 상황 38차례 가운데 25번이 삼진으로 끝났다. 그대로 삼진 당하면서 9회 공격이 끝나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문상철은 사투를 벌였다. 3구와 4구째를 골라낸 뒤 5구째 빠른 볼은 파울로 걷어내며 끈질긴 승부를 이어갔다. 그리고 6구째, 고우석의 커브가 다시 한번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호를 그렸다. 문상철의 배트도 큰 원을 그렸고, 타구는 더 큰 원을 그리며 좌측 담장을 향해 뻗어 갔다. 담장 상단에 맞고 떨어지는 2루타. 1루에 있던 배정대가 이번엔 무사히 홈까지 들어왔다. KT가 3대 2로 재역전에 성공한 순간이다.
“고우석 선수가 국내에서 패스트볼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항상 만날 때마다 공이 좋았어요. 패스트볼이 워낙 빠르다 보니 최대한 빠른 타이밍에 맞추려 한다는 생각으로, 타이밍을 빠르게 잡았던 게 좋은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경기 후 공식 인터뷰에서 문상철이 한 말이다.
“2스트라이크 이후여서 두 가지 중 하나를 노릴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빠른 볼을 준비하면서 칠 수 있는 존을 설정하고, 공이 오면 망설이지 않고 자신 있게 치려고 했습니다.”
문상철은 2회 삼중살에 대해 “사실은 사인이 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선취점을 내고 바로 역전을 당했기 때문에 빠르게 동점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번트를 댔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수월하게 갈 수 있었는데 나 때문에 분위기까지 넘어간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어요. 동료와 코치님들이 ‘하나만 치면 된다’ ‘찬스가 계속 걸린다’고 하셔서 (기분을) 전환하려 했습니다. 우리 팀은 오로지 승리만 바라보고, 실수해도 형들이 격려해 줍니다. 결승타를 친 것보다 팀이 이겨서 기분이 좋습니다.” 경기 내내 지옥을 경험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극락을 경험한 문상철이 옅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문상철이 고우석에게 3타수 3안타로 강했습니다.” 경기 내내 부진했던 문상철을 9회에 교체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이강철 감독의 설명이다. “배정대만 나가면,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염경엽 LG 감독은 실투 하나가 아쉬웠다고 돌아봤다. “몸 상태는 괜찮았는데, 실투 하나를 문상철 선수가 잘 쳤습니다. 패스트볼 구위가 나쁘지 않은데 실투 하나가 경기를 어렵게 만든 게 아쉬운 부분입니다.”
모든 기운이 LG 향했는데...넘어가지 않게 붙든 고영표 호투
확실히 9회에 벌어진 일들은 이날 경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바라던 상황은 아니었다. 이날 한국시리즈 첫 경기는 오후 1시 30분 일찌감치 23,750석이 매진됐다. 29년 만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염원하는 LG 팬들로 경기장 주변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종합운동장 주변은 물론 신천에서도, 잠실서도, 역삼과 삼성에서도, 메가서울 곳곳 어디에서나 유광점퍼를 입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경기장 안에서도 1루 쪽은 물론 외야석, 3루 쪽, 백스탑까지 야구장 전체가 노란 타월과 유광점퍼로 가득했다. LG 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를 때마다 경기장 바닥이 흔들렸다. ‘1994 우승 배터리’ 김용수-김동수가 시구자로 등장했을 때, 1회말 LG가 역전에 성공했을 때, 2회초 삼중살이 나왔을 때, 홍창기와 문보경과 신민재와 문성주의 거짓말 같은 수비가 나왔을 때. 승리를 확신한 LG 팬들의 함성이 크게 울렸다. 모든 기운이 LG 쪽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였다. 경기 후 만난 골수 LG팬은 “이런 플레이가 하나도 아닌 여러 개가 나온 경기를 지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도저히 질 수 없는 경기라고 확신했다”고 했다. 이강철 감독조차 “삼중살 때 분위기가 넘어갔다고 봤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선발 고영표의 호투 덕분에 KT는 경기 분위기를 LG 쪽에 넘겨주지 않고 팽팽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끌려갈 수 있는 경기였는데 고영표가 매우 좋은 투구를 해줬습니다. 고영표가 잘 막아줘서 승기를 넘겨주지 않았기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강철 감독이 경기 후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사실 이날 고영표의 구위가 ‘베스트’는 아니었다. 1회 시작하자마자 무더기 안타를 내줬고 거의 매 이닝 위기를 맞았다. 4회가 끝난 뒤 KT측 전력분석원은 “오늘 고영표의 볼 끝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고 했다. 이 감독도 “사실 1회 고영표 공을 보고 1점 싸움은 아니라고 봤다”고 말했다. 고영표 스스로도 “컨디션은 플레이오프 3차전 때가 더 좋았다. 오늘 경기 초반에는 투구 밸런스가 베스트는 아니었다”라고 털어놨다.
하지만 고영표는 1회 대량실점 위기를 최소 실점으로 막은 뒤, 2회부터 6회까지 한 점도 주지 않고 버텼다. 1회 대형 실책이 나왔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포스트시즌에선 특히 더욱더 팀과 승리 두 가지만 생각하고 던집니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동료의 실책이 나왔을 땐 제가 도와줘야죠.” 고영표가 힘줘 말했다. “양 팀 다 오늘 어수선한 플레이가 나왔는데 이런 부분은 제가 컨트롤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분위기를 넘겨주지 않으려면 막는 게 중요했고 최대한 여기에만 집중했습니다. 추가 실점을 내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고영표는 정규시즌 LG 상대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 LG전 4경기에서 승리 없이 2패만 기록했고 평균자책은 7.36에 그쳤다. LG가 1차전을 앞두고 기대한 것도 이런 부분이었다. 1회말 많은 안타가 나올 때만 해도 기대대로 되는 것처럼 보였다. 4회말 1사 1, 3루와 2사 2, 3루 찬스가 왔을 때, 박해민이 3-0로 유리한 카운트를 만들었을 때 기대감은 한껏 부풀어 터지기 직전이 됐다. 그러나 고영표는 절묘한 제구로 풀카운트를 만든 뒤, 8구 승부 끝에 박해민을 체인지업으로 헛스윙 삼진 처리했다. 9회를 제외하고 이날 경기에서 LG 관중석이 잠잠해진 건 이 순간이 유일했다.
“시즌 때 LG에게 많은 패배를 당했고, 그 패배를 잊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승리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고영표가 경기 후 인터뷰에서 말했다.
“4회말엔 제가 위기를 자초한 것도 있는데 자책할 시간이 없었어요. 박해민 선배 타석에선 3볼로 카운트가 몰려서 1루를 채워야 하나 고민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집중력이 좋아졌고, 꼭 삼진이 필요할 때 삼진을 잡았죠. 제 커리어에서 가장 짜릿한 삼진이었던 것 같습니다.”
무안타 홍창기, 패전 고우석...아직 만회할 기회 있다
문상철과 고영표는 KT 위즈의 창단 멤버 출신이다. 창단 당시 미래 투타 핵심으로 큰 기대를 모았던 두 선수가 입단 9년 만인 올해 한국시리즈에서 나란히 승리를 합작했다. KT의 1차전 승리엔 또 다른 자체 생산 선수들의 활약도 큰 몫을 했다. 7, 8회 두 이닝을 완벽하게 막은 손동현, 그리고 9회 마무리로 올라온 박영현이다. 플레이오프에서 많은 공을 던지고 올라왔는데도 공의 힘이 조금도 떨어지지 않은 모습. 두 영건은 경기 후반 마지막 드라마를 기대한 LG에게 조금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비록 1차전을 내주긴 했지만 LG 역시 정규시즌 우승팀답게 좋은 야구를 펼쳤다. 1회 선취점을 주고도 바로 역전하는 장면에선 이제 가을야구가 익숙해진 LG의 저력을 볼 수 있었다. 경기중 나온 여러 호수비에선 LG 선수들의 재능과 간절함이 보였다. 과거 가을야구에서 무기력했던 모습과 달리 경기 내내 크게 포효하고, 세리머니로 분위기를 끌어올리며 경기를 즐기는 모습도 좋았다. 사실 8회까지만 해도 나무랄 데 없는 경기였고 1994년 한국시리즈 1차전이 떠오르는 명승부였다. 만회할 기회는 아직 충분하다.
2차전 LG 선발투수는 최원태다. 정규시즌 KT 상대로 약했지만, 고영표가 보여준 것처럼 단기전과 시즌은 다른 무대다. 5타수 무안타에 그친 홍창기와 패전 마무리 고우석도 2차전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삼중살과 결승타를 한 경기에서 기록한 문상철이 그랬듯이 야구에선 한순간에 역적이 영웅이 되고, 지옥 같은 상황이 단숨에 천국으로 바뀌는 일이 벌어진다. 가을야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