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도 감동한 간절함…염경엽, 우승 감독이 되다 [배지헌의 브러시백]

-누구도 풀지 못한 LG의 우승 恨, 29년 만에 해소한 염경엽 감독 -넥센 감독으로 2013년 시작, 6번 우승 도전했지만 뜻 이루지 못해 -SK에서 물러난 뒤 2년간 와신상담, LG에서 마지막 도전 -독하게 마음먹고 변신, 절실함으로 우승 꿈을 이루다

2023-11-14     배지헌 기자
팬들의 환호에 응답하는 염경엽 감독(사진=LG)

 

[스포츠춘추=잠실]

2004년 11월 1일. 그날 서울에는 엄청나게 많은 비가 쏟아졌다. 고개를 들면 마치 커다란 대나무숲 한가운데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굵은 빗줄기가 멈추지 않고 내렸다. 

현대 유니콘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한국시리즈 9차전이 열린 잠실야구장 그라운드는 엉망이 됐다. 운동장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겼고, 마운드 주위는 늪지대가 됐다.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우에 경기가 몇 번이고 중단됐다. 이 수중전에서 이긴 팀은 현대였다. 현대는 삼성과의 ‘진흙탕 싸움’ 끝에 8대 7로 이겨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선수들의 얼굴엔 땀과 빗물, 눈물이 마구 섞여 흘러내렸다.

선수들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동안, 현대 운영팀 과장 염경엽은 급하게 잠실 롯데호텔로 달려갔다. “택시가 안 잡혀서 거의 달려가다시피 했다.” 우승 축하행사 준비가 그에게 주어진 업무였다. 비를 맞으며 호텔 벽에 플래카드를 걸었다. 현수막 문구는 이랬다: ‘오늘의 주인공은 여러분입니다.’

염 과장은 행사장 음식을 세팅하고, 바닥에 비닐을 깔았다. 벽에는 한국시리즈 하이라이트 영상을 상영할 스크린을 설치했다. 빗속에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정장이 흠뻑 젖었고, 새로 산 명품 구두는 못 쓰게 됐다. 애써 준비한 우승 축하연이 시작되자 염 과장은 호텔 밖으로 나왔다. 면세점으로 통하는 쪽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분명 구단이 우승했으니 기쁜 게 당연한데, 알 수 없는 허무함이 가슴 한 켠에서부터 차오르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 게 맞나? 내가 이 길을 가는 게 맞나. 그런 생각과 함께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프런트로 머물기엔 너무 가슴이 뜨거웠던 야구인 염경엽은 이후 감독이 되어 우승에 도전했다. 가장 우승에 가까이 다가갔던 건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 시절인 2014년. 당시 넥센은 리그 최강 왕조 삼성을 상대로 멋진 승부를 펼쳤지만 준우승에 그쳤다. 염경엽은 그때도 눈물을 흘렸다. 아쉬움과 설움의 눈물이었다. “전력상으로 열세였을지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우승할 수 있다고 믿었고 또 우승이 너무 하고 싶었다. 그런 상황에서 맞이한 준우승에 너무 복받쳐서 정말 펑펑 울었다.”

19년전에는 프런트로, 9년 전에는 준우승 감독으로 눈물을 쏟았던 염경엽은 2023년 11월 13일, KBO리그 통합 우승 감독으로 다시 잠실야구장에 섰다. 그가 우승으로 이끈 팀은 1994년 이후 무려 29년 동안 우승하지 못한 팀 LG 트윈스다. 1990년대에 멈춰있던 LG 우승 자료화면은 이제 새 화면을 갈아입었다. 오랫동안 전설로만 떠돌던 롤렉스 시계와 아와모리 소주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승 한을 푼 LG 선수들과 팬들은 자정이 다 되도록 야구장을 떠나지 않았다. 야구장 인근 잠실새내에선 밤새도록 LG 응원가가 울려 퍼졌다. 

“눈물이 났다. 눈물이 살짝 나긴 했는데, 과거 준우승했을 때처럼 눈물이 나오진 않더라.” 우승 감독 염경엽이 경기 후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너무 절실하니까 감정선이 꼬였다. 경기 내내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되새기다 보니 눈물이 마른 듯싶다(웃음). 그래도 우승하고 선수들이 울 때는 눈물이 나오더라.”

기뻐하는 박동원과 염경엽 감독(사진=LG)

 

‘우승 못하는 감독’에서 ‘우승 감독’으로…커리어 건 마지막 도전이 대성공

감독 염경엽의 역사는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 좌절의 시간이었다. 감독 데뷔는 화려했다. 2013년 만년 하위권 팀 넥센의 사령탑을 맡아 단번에 팀을 가을야구로 이끌었다. 웨이트 트레이닝과 휴식의 가치를 강조하는 야구 철학에 뛰는 야구를 결합해 프로야구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강정호, 박병호, 김하성 등 숱한 스타 선수를 배출했고 메이저리그에 보냈다. 어떤 질문에도 해답을 내놓을 줄 알고, 자신만의 야구관을 막힘없이 설명하는 염 감독은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감독상에 부합했다.

그러나 우승과는 좀처럼 인연이 없었다. 선수와 프런트로는 여러 차례 우승했지만 감독이 돼서는 우승까지 가지 못했다. 가을야구 데뷔전인 2013년 준플레이오프에선 두산 베어스에 2승 3패로 탈락했다. 2014년엔 플레이오프에서 LG를 3승 1패로 꺾고 기세를 올렸다. 7차전 시리즈를 선발 3명으로 운영하는 승부수를 띄웠지만, 결과는 2승 4패 준우승. 2015년과 2016년엔 구단과의 불화 속에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다. 호평 일색이던 염 감독에 대해 조금씩 부정적인 여론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정규시즌 운영은 잘하지만 단기전에는 약하다’ ‘염경엽으로는 절대 우승 못한다’ ‘염경엽 야구의 한계’와 같은 혹평이 쏟아졌다. 약체였던 넥센을 가을야구까지 이끌었고, 변변한 외부 영입 없이도 매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강팀을 만들었지만, 단지 우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온갖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2016년을 끝으로 넥센과 헤어진 염경엽은 SK 와이번스 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감독일 때는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던 우승은 단장이 돼서 이뤘다. 2018년 플레이오프에서 출발한 SK는 한국시리즈에서 정규시즌 1위 팀 두산을 4승 2패로 꺾고 보기 드문 ‘업셋’ 우승을 달성했다. 시즌 뒤 트레이 힐만 감독이 미국으로 돌아가고 단장 염경엽이 감독 자릴 이어받았다. 우승 멤버를 그대로 물려받은 감독 염경엽은 그 어느 때보다 우승에 가까이 다가간 것처럼 보였다. 8월 중순까지 2위 팀에 7.5경기 차로 크게 앞선 압도적 1위를 달렸다. 그러나 8월 말부터 거짓말 같은 추락이 시작됐고, SK는 정규시즌 마지막 날 2위가 됐다. 이 충격은 포스트시즌까지 그대로 이어져, SK는 키움과의 플레이오프에서 3연패로 탈락했다. 그리고 다음 시즌까지 이어진 여파는 SK가 리그 최하위권으로 몰락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팀이 잘 나갈 때도 스트레스와 수면 부족에 시달리던 염 감독이다. SK가 추락을 거듭하던 6월 말 염 감독은 경기중 더그아웃에서 쓰러졌다. 9월 1일 팀에 복귀했지만 얼마 안 가 다시 건강 문제가 생겼고 결국 10월 말 자리에서 내려왔다. ‘감독’ 염경엽의 커리어는 그대로 거기서 끝난 것처럼 보였다. 야구계에선 ‘우승 못하는 감독’이라는 꼬리표에 건강 문제까지 드러난 염 감독이 다시 프로야구 감독자리를 맡기는 어려울 거라는 예상이 나왔다. 프런트로, 코치로 승승장구하던 염경엽은 그에게는 굴욕적인 ‘실패한 감독’ 꼬리표를 단 채로 그렇게 야인이 됐다. 

SK에서 떠난 뒤 2년은 와신상담의 시간이었다.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 하루하루 살아남느라 놓쳤던 것들을 돌아봤고, 처절한 자기반성과 자아비판을 수행했다.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뒤 쌓아온 매뉴얼을 정리하는 시간도 가졌다. KBO 아카데미 디렉터와 국가대표팀 기술위원장, 방송 해설 일을 하면서 현장 밖의 시선으로 야구를 바라봤다. 염 감독은 “그 시련들을 겪은 뒤 휴식기 동안 그전까지의 감독 생활뿐만 아니라 모든 일들을 한 번 되돌아보고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말했다. “미국 연수 때는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보냈는데, 그 안에서 내가 어떤 것이 부족했고, 또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를 많이 돌아봤다. 또 그때를 내가 정리했던 (야구 관련) 노트들을 재정리하는 기회로 삼았다.” 

인내하며 기다린 염경엽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2022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한 뒤 류지현 감독과 결별한 LG 트윈스가 염경엽 감독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편과 아버지를 걱정한 가족들이 반대했지만, 야구인생 마지막일지도 모를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해설위원으로 어렵게 다시 쌓은 평판과 명성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도 있는 도전이지만 기꺼이 감수했다. 야구인으로서 모든 것을 걸고 도전한 염 감독의 간절함이 야구의 신마저 감동시킨 것일까. 간절함으로 하나가 된 염경엽 감독과 LG는 2023시즌 마침내 오랜 우승 ‘한’을 풀었다. 축하 행사에서 마이크를 잡은 염경엽 감독은 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승 감독 염경엽입니다.”

한국시리즈 5차전 종료 후 취재진과 만난 염경엽 LG 감독(사진=스포츠춘추 김종원 기자)

 

‘와신상담’ 염갈량의 변화…개인과 팀의 우승 한 풀었다

염경엽 감독은 LG에 오면서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독하게 마음 먹었다. LG 합류 직후 미디어 인터뷰에서 그는 “과거의 나는 오만했다. 그래서 하늘이 내게 벌을 내렸다”며 변화를 다짐했다. 염 감독의 변화 의지는 코칭스태프 구성에서 잘 나타났다. 말 잘 듣는 예스맨이나 친구를 수석코치로 앉히는 대신, 개인적으로 별 친분이 없는 김정준 코치를 데려왔다. “감독이 얘기하면 무조건 따르는 게 아니라 다른 의견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을 옆자리에 세웠다. ‘염경엽 사단’ 코치 영입은 최소화하고 기존 LG 코치진을 대부분 유임했다. SK 시절 실패 원인 중 하나인 ‘염경엽 키즈’ 모으기도 최소화했다.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 서건창을 제외한 데서 염 감독의 변화와 굳은 의지를 볼 수 있다.

한 LG 선수는 시즌 중 “염 감독님이 확실히 넥센, SK 시절과 달라지셨다는 느낌을 받는다. 걱정했던 장시간 미팅은 거의 하지 않았고, 하더라도 꼭 필요한 말씀만 하시고 짧게 끝났다. 얘기로 듣던 것과는 달랐다”고 전했다. 직접 배트를 들고 나섰던 선수 기술 지도도 LG에선 대부분 해당 파트 코치에게 맡겼다. 감정 표현도 달라진 점. 전에는 감정을 혼자 속으로 삭이다가 몸과 마음을 해쳤다면, LG에선 의식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화나면 화나는 대로 거친 말도 내뱉는다. 즐거운 순간엔 활짝 웃으며 선수들과 기쁨을 나눈다. 한국시리즈 기간엔 홈런이 터질 때마다 선수들에게 끌려가 격렬한 세리머니를 함께했다. 

시즌 초반 LG 야구를 둘러싼 논란도 슬기롭게 극복했다. 5월까지 LG는 많은 도루 실패와 주루사로 비판의 중심에 섰다. 이와 관련해 염 감독은 “시즌 내내 바깥 목소리에 흔들리지 말자고 선수들에게 거듭 강조했다”면서 “밖과 상관없이 내가 우리 선수들에게만 신뢰를 잃지 않는다면 된다고 믿었다”고 밝혔다. 

“결과는 결국 감독이 책임진다. ‘뛰는 야구’로 한창 말이 많았을 때도 사실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건 뛰는 것 자체가 아니라 망설임 없이, 초조함 없이 야구를 해나가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정 부분 발야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부분을 선수들과 계속 공유하고 끝까지 노력했던 게 지금의 좋은 결과물을 만들었다.”

한국시리즈 MVP 오지환은 시즌 초반 적극적으로 뛰는 야구를 시도한 경험이 LG의 팀컬러였던 ‘부담’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그는 “올 시즌 들어 우리 팀의 적극적인 모습이 더 늘었다. 염경엽 감독님이 오시면서 적극적인 플레이를 많이 시도했는데, 물론 그 과정에서 아웃이 많이 늘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선수들이 도전적인 마음가짐을 얻게 됐다”고 힘줘 말했다.

오지환은 “(문)성주, (신)민재, (문)보경이, (유)영찬이 등은 어린 선수들인데도 주눅이 들지 않고 자신 있게 경기에 임하더라”면서 “보통 한국시리즈와 같이 큰 무대에서는 선배들이 ‘주축이 돼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곤 하는데, 이번 시리즈는 달랐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다 잘했다. 특히 (앞서 언급한) 어린 선수들이 잘해줘서 베테랑들이 부담을 덜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팀의 ‘신구조화’도 무척 좋았다”고 돌아봤다.

5월까지 야구 규칙의 한계를 시험하듯 뛰었던 LG는 6월부터 조금씩 도루와 작전 시도를 줄여나갔다. 한국시리즈에선 화려한 작전야구를 펼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절제된’ 플레이로 신중하게 경기에 임했다. 염 감독은 라인업을 고정하고 많은 부분을 선수들에게 맡겼다. 극적인 역전 드라마를 펼친 2차전, 역대 최고의 명승부가 펼쳐진 3차전, 11점 차 대승을 거둔 4차전에서 LG 타선은 총 8개의 홈런을 터뜨렸다. 마지막 5차전에선 다시 특유의 뛰는 야구와 작전으로 승리를 거뒀다. ‘감독의 야구’를 뛰어넘어 ‘LG 야구’가 한국시리즈를 통해 완성에 도달한 것이다. 

염 감독이 생각하는 LG의 우승 비결은 절실함과 자신감이다. 시리즈 내내 “간절하다”고 주문을 외듯 말했던 그는 5차전이 끝난 뒤 “팬들이 변함없이, 또 한결같이 응원해 주셨기 때문에 선수들이 매 경기 절실하게 임할 수 있었다”고 감사를 전했다. 또 “정규시즌 동안 분명히 어려움이 있었지만, 선수들은 그걸 자신감을 만드는 과정으로 승화시켰다. 그 자신감 덕분에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간절함과 넘치는 열정은 자칫 조급함으로 변하기 쉽다. 염 감독도 “올해 한국시리즈를 시작할 때, 우리 선수들이 가진 열정은 그 어느 팀이 와도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게 잘못 풀리면 ‘조급함’으로 변한다”면서 “그래서 선수들에게 거듭 더 차분하고 침착한 마인드셋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코치진이 그랬고, 또 고참 선수들이 그랬기에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오늘 경기 전에도 선수들이 제법 흥분한 듯싶었는데, 그걸 조절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염 감독의 말이다.

남들은 ‘독이 든 성배’라는 LG 감독직이 자신에겐 “엄청난 행운”이었다고 돌아본 염 감독은 “LG는 내가 그동안 맡은 팀들 가운데 가장 전력이 강하다. 그만큼 중압감이 심했지만, 나를 믿어준 선수들과 프런트 덕분에 잘 이겨낼 수 있었다”고 다시 한번 LG 구성원들을 향해 감사를 전했다. 2004년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축하연을 준비하며 남몰래 울었던 염경엽 과장은 숱한 부침과 사연을 거쳐 이제 ‘우승 감독’으로 우뚝 섰다. 밝은 스포트라이트와 큰 함성, 박수갈채가 그를 향한다. 자정이 넘도록 이어진 LG 축하연의 중심에선 염경엽 감독이 활짝 웃고 있었다. 감독 염경엽의 전성시대가 다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