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A 마캠에 등장한 대형 시계, KBO는 지금 피치클락 예습중 [춘추 이슈분석]
최근 열린 오키나와 KIA 타이거즈 마무리캠프에 대형 전자시계가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내년 도입 예정인 피치클락 룰에 대비하는 차원이다.
[스포츠춘추]
최근 일본 오키나와 KIA 타이거즈 마무리캠프엔 예년엔 없었던 대형 전자시계가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주자가 없는 상황에선 15초, 주자가 있는 상황에선 20초에 불이 켜졌다. 실제 째깍째깍 소리가 들리진 않지만,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시한폭탄 카운트다운 같은 긴장감을 선사했다.
“내년부터 시행할 피치클락 룰에 대비하려고 아예 훈련 때부터 시계를 켜놓고 진행했다.” KIA 조재영 주루코치의 말이다. “구단에서 일본에 건너갈 때 미리 피치클락을 준비해서 가져갔다.”
야구의 ‘뉴 노멀’ 피치클락, 논쟁은 현재진행중
피치클락은 2023시즌 메이저리그 경기에서 시행 중인 야구계의 ‘뉴 노멀’이다. 이 룰에서 투수는 주자가 없을 때는 공을 받은 뒤 15초 안에, 주자가 있을 때는 20초 이내에 투구해야 한다. 타자 역시 타이머가 8초가 되기 전까지 타석에 들어와 투수와 눈을 맞춰야 한다. 이를 위반하면 투수에게는 볼 하나가, 타자에게는 스트라이크 하나가 선언된다. 또 주자가 있을 때 투수는 두 번만 마운드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여기에는 마운드에서 발을 빼는 동작과 주자 견제도 포함된다.
피치클락은 ‘경기시간 단축’이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일종의 극약처방이다. 경기시간을 줄이기 위해 수없이 제도를 바꾸고 페널티를 만들었지만 큰 효과가 없자 대형 타이머까지 동원하게 된 것이다. 피치클락 도입은 메이저리그 경기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지난해 3시간4분이었던 평균 경기 시간이 2023년에는 2시간40분으로 무려 24분이나 줄었다. 이는 1985년(2시간40분) 이후 최단 경기 시간이다. 반면 KBO리그는 2023시즌 경기당 평균시간이 3시간16분으로 메이저리그보다 36분이나 길었다. 경기내용이 깔끔하지 못한 팀의 대표격인 롯데 자이언츠 경기시간은 평균 3시간20분에 달했다.
몇해전부터 ‘스피드업’을 외치며 시간 단축을 시도했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한 KBO 입장에서 메이저리그의 피치클락 도입은 하나의 혁명이었다. KBO는 연초부터 피치클락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다. 올해 메이저리그의 경기 소요 시간 변화, 도루 등 경기 지표 변화, 관중의 만족도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것은 물론 리그 투수들의 평균 투구 인터벌을 전수 조사했다. 평균 견제 시도 횟수, 타자의 타격 준비 완료 시점 등 세부 지표도 함께 분석했다.
이런 분석 결과 KBO리그에 적합한 피치클락 규칙의 필요성을 확인했고, 각종 태스크포스와 실행위원회를 거쳐 몇 가지 안을 마련했다. 현재는 최종안을 두고 검토하는 단계가 진행 중이다. KBO 관계자는 “우리 야구 실정에 맞는 여러 안을 두고 신중하게 검토 중이다. 오프시즌 기간에 구체적인 안을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물론 혁신적이고 급진적 변화에는 논란과 반발이 따르게 마련. 피치클락은 한 시즌이 지난 현대도 여전히 논쟁적인 주제다. 뉴욕타임스는 “관대했던 부모가 갑자기 엄격해져서 너무 늦게까지 놀다 들어오는 아이들에게 통금 시간을 정한 것”이라고 비유한 바 있다. 맥스 슈어저 등 일부 MLB 베테랑 투수들은 피치클락 도입으로 투수들의 부상이 증가했다며 불만을 숨기지 않는다. ‘투수 부상과 피치클락 사이에 직접적 상관관계가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한편에선 충분한 데이터가 쌓여야 정확한 분석이 가능하다는 신중론도 만만찮다. 투구 간격 단축이 노장 투수들의 구위와 회복력에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피치클락이 현실로 다가온 국내에서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중이다. 서울 한 구단 관계자는 “안 그래도 국내야구는 미국에 비해 도루가 많은 편이다. 미국만큼 커맨드와 컨트롤 능력을 갖춘 투수 숫자가 많지 않다. 피치클락과 견제 제한으로 인해 도루 시도가 폭증하고, 볼넷이 증가하면 실제 경기시간 단축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란 부정적 예상을 내놨다.
지방 구단의 단장은 “국내야구에서 경기시간이 길어지는 원인은 투수 인터벌보다 벤치에서 나오는 사인”이라며 “벤치와 사인 주고받는 데만 20초가 훌쩍 지나간다. 이 부분을 해결하지 않으면 피치클락 도입은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본다”고 진단했다. 피치클락과 로봇심판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선수들의 의견을 전혀 듣지 않았다는 문제제기도 있다. 피치클락과 로봇심판이란 큰 변화를 테스트 기간 없이 한꺼번에 추진하는데 대한 거부감도 적지 않다. 한 야구인은 ”이제 내년에 두고보라. 경기가 엉망이 될 거다”라고 부정적인 의견을 내놨다.
KBO 관계자는 “일단 미국처럼 피치컴(투수와 포수가 사인을 주고받는 기기)을 허용할 예정이다. 일각에서 벤치 사인용 피치컴도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는데, 그 부분은 아직 논의 단계“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경기 시간 단축을 위해선 현장 선수들과 코칭스태프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벤치에서 사인을 내는 시간도 줄여야 한다. 사인을 좀 더 심플하게 바꾸거나, 벤치 개입을 줄이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도루가 많은 국내야구 특성상 견제 횟수 제한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이 부분은 보완책을 연구하고 있다. KBO 관계자는 “견제 횟수 제한을 미국과는 다르게 정하는 안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피치클락 시대 준비하는 선수, 심판진
일부 구단은 이미 정규시즌부터 피치클락 시대를 준비해 왔다. LG 트윈스는 퓨처스 구장인 이천 챔피언스파크에 피치클락을 설치해 2군 선수 훈련에 활용했다. 염경엽 감독은 시즌 중 취재진에게 “투구 템포가 느린 투수들은 무조건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빨리 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지금부터 조금씩 빠르게 해야지 내년에 갑자기 빠르게 가져가면 지장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무리캠프에서 피치클락을 ‘예습’한 KIA도 효과를 톡톡히 봤다. 조재영 주루코치는 “훈련과 시뮬레이션 때 피치클락을 켜놓고 진행했다. 투수, 타자, 주자 모두 피치클락에 적응하는 연습을 했다. 처음엔 조금 급해지는 감도 있었지만 점점 적응해나갔다“면서 ”스프링캠프 때도 피치클락 적응훈련을 계속해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새 규칙에 대비하는 건 KBO 심판진도 마찬가지. 심판진 전원은 11월 21일부터 강원도 횡성에서 합숙 훈련과 세미나를 진행했다. 허운 심판위원장은 ”피치클락, 로봇심판 관련 상호 토론과 가상 훈련 등을 소화하는 일정”이라고 소개했다. 규칙 변경에 따라 달라질 심판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실전에서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변수에 미리 대비하는 시간이다. 허 위원장은 “이제는 변화를 거스르기 어렵다. 그렇다면 예상되는 부작용과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