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수 부상 팬데믹, 피치클락이 주범? 진짜 원인은 따로 있다 [춘추 집중분석]
최근 메이저리그에서 투수들의 부상이 급증하는 현상을 두고 MLB 사무국과 선수들 간에 논쟁이 한창이다.
[스포츠춘추]
“팬데믹이다.”
최근 메이저리그에서 투수들의 부상이 급증하는 현상을 두고 사이영 수상자 출신 투수 저스틴 벌랜더는 ‘팬데믹’이란 한마디로 요약했다.
근 한 달 사이에 부상자 명단에 올랐거나 아예 시즌아웃된 투수들의 명단을 보자. 마이애미 말린스의 유망주 유리 페레즈가 토미존 수술로 시즌 아웃됐고, 클리블랜드 가디언스의 투수 셰인비버도 같은 수술로 시즌을 마감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에이스 스펜서 스트라이더 역시 커리어 두 번째 토미존 수술대에오를 전망이다. 뉴욕 양키스 에이스 게릿 콜은 팔꿈치 염증으로 6월까지 결장할 예정이며, 같은 팀 엘리트 구원투수 조나단 로아이시가는 척골 측부 인대 파열로 시즌 종료 판정을 받았다.
이 명단에 지난해와 오프시즌 수술대에 오른 오타니 쇼헤이, 제이콥 디그롬, 샌디 알칸타라, 셰인 맥클라나한, 브랜든 우드러프까지 추가하면 부상자 명단은 사이영 후보 리스트나 올스타 명단과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미국 대중문화 매체 ‘더 링거’에 따르면 지난해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팔꿈치 인대 수술 건수는 263건으로 2011년 111건에서 큰 폭으로 증가했다.
이처럼 투수들의 줄부상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자, 일각에선 지난해 메이저리그가 도입한 ‘피치클락’을 부상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나섰다. 선수노조의 토니 클라크 사무총장은 선수들의 반대에도 2024년 유주자시 피치클락을 2초 더 단축한 사무국의 결정을 “야구 경기에 대한 전례 없는 위협”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사무국은 존스 홉킨스 대학교의 미공개 분석 결과를 인용해 피치클락 도입과 부상자 급증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자 다시 게릿 콜, 오타니 쇼헤이 등 영향력 있는 선수들이 사무국 발표를 반박하면서 논란이 계속되는 분위기다.
정말로 피치클락이 빌런이라면, 피치클락만 없애면 투수 부상은 사라지고 세상은 다시 평화로운 시절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의 문제 대부분이 그러하듯 투수 부상 역시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벌랜더는 “피치클락 탓을 하는 건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말했다. ‘디 애슬레틱’의 켄 로젠탈은 “투수들의 부상은 피치클락 도입 이전에도 있었다. 보호하려고 해도 투수는 다치게 마련”이라 지적했다. 이 매체가 선수, 코치, 감독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피치클락은 다양한 부상 원인과 우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미국의 야구 분석 매체 ‘베이스볼 프로스펙터스’는 통계 자료를 근거로 지난 시즌 투수들의 부상과 수술 대부분이 시즌 초반에 집중됐다는 점을 짚었다. 시즌 전체를 놓고 보면 투수 부상 숫자나 분포 면에서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단 지적이다. 피치클락이 원인 중 하나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진 않았지만, 단지 그것 하나 때문이라고 하기엔 샘플이 충분하지 않다는 설명이다.
‘디 애슬레틱’의 이노 사리스도 “작년 시즌 초반에는 부상자가 급증했지만, 시즌이 끝나고 나니 부상률에 큰 차이가 없었다”며 “메이저리그 수준에서 부상자는 큰 폭이 아닌 완만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고 썼다. 피치클락이 부상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할 가능성은 있지만, ‘이게 다 피치클락 때문이다’는 식의 접근은 합리적이지 않디.
피치클락이 부상의 주범? 진짜 원인은 따로 있다
부상 전염병의 원인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뉴욕 양키스 투수코치 맷 블레이크는 투수들의 부상 증가에 관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말했다. 벌랜더 역시 “실제로는 모든 요소가 조금씩 영향을 미친다. 야구가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고 투구 스타일도 변했다”며 “이제는 모든 투수가 공을 강하게 던지려 하고, 강한 회전을 가하려고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투수들에게 더 강하고 압도적인 퍼포먼스가 요구되고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제 감독과 코치, 구단들은 투수가 완급 조절로 9이닝을 혼자 책임질 거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보단 1회부터 모든 공을 전력투구할 것을 요구한다. 패스트볼을 더 빠르고 강하게 던지는 것은 기본이고, 변화구를 던질 때도 최대한의 구속과 회전, 무브먼트를 만들어낼 것이 기대된다. 텍사스 레인저스 구단의 주치의이자 토미존 수술 권위자인 키스 마이스터 박사는 “구단들이 당장의 성적을 장기적 건강보다 강조해 문제를 악화시킨다”며 이렇게 질문했다.
“만일 어떤 투수의 WHIP이 0.80이 아니라 1.10이지만 대신 162경기를 뛸 수 있다면 어떨까?”
통계를 보면, 투수의 구속과 구위가 강조되기 시작한 시기와 부상이 급증한 시기가 거의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벌랜더는 이 시기를 2016년 전후로 기억한다. 그해 공인구가 바뀌고 타구 비거리가 길어진 영향으로 더 많은 헛스윙과 삼진을 잡는 방식으로 투구 스타일을 바꿔야 했다는 설명이다. 2010년 241명에 불과했던 부상자 명단 등재 투수 숫자는 2021년 552건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각종 측정 기술과 데이터의 발달은 투수들에게 인간의 몸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과부하를 요구했다. 이에 관해 ‘디 애슬레틱’은 “데이터가 쏟아지면서 구단들은 투수를 더 잘 키울 수 있는 세분화된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데이터는 투수의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지는 못했다”고 꼬집었다. 켄 로젠탈은 “투수를 더 좋게 만들지만 더 건강하게 만들지는 않는 드라이브 라인의 신과 모든 기술과 데이터에 절하는 것을 잠시 멈춰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노 사리스에 따르면 투수 부상의 가장 큰 원인은 ‘스피드’다. 공을 강하게 던지는 게 팔꿈치에 직접적인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이며, 수년간 여러 연구에서도 강한 투구가 부상으로 이어진다고 나타났단 분석이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팔꿈치 인대에 더 많은 스트레스가 가해지며, 투수가 던질 수 있는 최대 구속에 가까워지면 스트레스도 절정에 달한다. 패스트볼의 구속이 프로 투수의 팔꿈치 수술 필요성을 가장 잘 예측하는 지표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사리스는 “나쁜 소식은 투수들의 스피드가 해를 거듭할수록 최대치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라며 우려를 전했다.
스위퍼, 파워 체인지업 등 신종 변화구가 부상을 가져온다는 주장도 있다. 마이스터 박사도 “회전수가 구속보다 나쁘다”면서 스위퍼가 팔꿈치 안쪽에 심한 스트레스를 가하고 파워 체인지업도 팔에 비정상적 부담을 준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투수들은 마치 날계란을 쥐듯 가볍게 공을 잡았는데, 이제는 비정상적으로 공을 세게 잡는
‘죽음의 그립’이 유행하고 있다. 이런 그립으로 공을 던지려면 팔의 모든 근육을 풀가동해야 하며, 이는 각종 근육 파열 부상으로 이어진다. 마이스터가 주치의인 텍사스는 이 두 구종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구단으로 알려졌다.
건강과 퍼포먼스 사이에서 균형 잡기가 필요해 보이는 상황. 하지만 그렇다고 투수들에게 ‘구속을 줄이라’거나 ‘변화구를 살살 던지라’고 요구할 순 없다는 게 딜레마다. 더 빠른 공은 좋은 성적과 비례하며 야구계는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에게 많은 연봉을 제공한다. 자주 아프고 다쳐도 스터프가 좋은 투수들은 대형 계약이란 보상을 받는다. 반면 이 경향에 따르지 않는 투수들은 손에 돈을 쥐어볼 기회도 없이 옷을 벗어야 한다. 남아있는 투수들은 살아남기 위해 일정 부분 부상 위험을 감수하는 쪽을 택한다.
저명 기자 “투수 부상 문제, 리그 차원의 개입 필요하다”
로젠탈은 문제 해결을 위해 “리그 차원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10대 아마추어 투수들조차도 구속 향상을 추구하고 그 과정에서 부상을 당하는 상황에서 간단한 해답은 없다”면서도 “지금은 본격적인 위기 상황”이라고 심각성을 지적했다. 이어 “야구계 전체가 일시 정지 버튼을 눌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고방식의 변화, 훈련 방법의 변화, 필요하다면 규칙에 의한인센티브 부여 등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게 로젠탈의 주장이다. 더 좋은 성적과 대우를 바라는 투수들이 건강을 위해 퍼포먼스를 양보할 가능성은 없다. 구단 역시 말로는 “부상을 원치 않는다”고 하지만 당장의 성적을 위해 “투수들을 마치 낡은 스파이크 한 켤레를 다 써서 버리듯” 소모하고 있다.
로젠탈은 “리그는 야구란 스포츠의 생명을 앗아가는 수비 시프트를 금지한 것처럼, (부상 문제도) 리그가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사무국은 로스터에 등록된 투수 수를 13명에서 12명으로 줄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롭 맨프레드 커미셔너는 “선발 투수의 중요성을 회복하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다. 로스터에 구원 투수가 줄어들면 선발투수를 좀 더 오래 마운드에 둬야 할 것이고, 구속과 구위의 차력쇼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거란 논리다.
그러나 이 방안으론 메이저리그에서 투수를 마음껏 사용한 뒤 마이너 투수로 갈아 끼우는 꼼수를 막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이에 로젠탈은 “구단이 투수들을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가게 하려고 할 수 있으므로 마이너 옵션 사용 횟수를 더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마이너리그에도 로스터 규모 관련 비슷한 제한을 적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제이슨 스타크는 선발투수가 내려간 팀은 지명타자를 못 쓰게 되는 ‘더블 후크’ 제도를 제안했다. 사리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 “한 경기에 기용 가능한 투수 수를 제한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매 경기 일정 수의 투수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면, 구단들이 투수의 업무량을 보다 정밀하게 관리할 수 있을 거란 예상이다.
MLB 사무국은 투수 부상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위해 지난해 10월 의료 관계자를 포함한 야구계 관계자 100명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가 완료되면 사무국은 태스크 포스를 구성해 투수의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권장 사항을 구단에 제공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