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의 승리’ 서울대 야구부는 또다른 기적을 꿈꾼다 [춘추 이슈]
서울대학교 야구부가 2004년 이후 20년 만에 승리를 거뒀다. 1977년 야구부 창단 이후 두 번째 승리를 맛본 서울대 야구부의 ‘2승’ 뒷이야기를 스포츠춘추가 전한다.
[스포츠춘추]
“아직도 꿈만 같습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실감이 나지 않아요.” 16년째 서울대 야구부를 지휘하고 있는 정석 감독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서울대학교 야구부가 이겼다. 20년 만의 승리이자 1977년 야구부 창단 이후 두 번째 승리를 거뒀다. 서울대는 4월 19일 강원 횡성베이스볼파크에서 열린 한국대학야구연맹(KUBF) U-리그 B조 경기에서 경민대에 9대 2, 7회 콜드게임으로 승전보를 울렸다.
2004년 9월 1일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추계리그에서 당시 막 창단한 팀 송원대를 2대 0으로 꺾은 뒤 7,170일 만에 추가한 승리다.
2회초 선취점을 내준 서울대는 2회말 공격에서 몸에 맞는 볼 2개로 잡은 찬스를 살려 4점을 뽑아 승부를 뒤집었다. 3회 4점, 6회 1점을 추가한 서울대는 경민대의 7회 추격을 1점으로 막아내며 경기를 7이닝 만에 끝냈다.
유격수와 투수를 오간 이서준이 승리투수가 됐다. 이서준은 3회부터 마운드에 올라와 3이닝을 무실점으로 잘 막아내 승리를 굳혔다. 2004년 당시 완봉승의 주인공 박진수에 이어 서울대 역사상 두 번째 승리투수로 이름을 아로새겼다.
“오늘은 이길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19일 스포츠춘추와 연락이 닿은 이서준의 말이다. “20년 전 첫 승리 때와 너무 똑같았거든요. 그때도 무승부 경기 바로 다음에 승리를 거뒀으니까, 이번에도 이길 것 같다는 얘기를 동료들과 서로 나눴어요.“
서울대는 18일 경기에서 한국골프대와 접전 끝에 3대 3 무승부를 기록했다. 2004년에도 서울대는 창단 199연패 뒤 1경기를 비긴 뒤 다음 경기에서 감격의 첫 승을 올린 바 있다. 정석 감독은 “이제 우리 야구부의 통산 성적은 2승 2무승부가 됐다”면서 “너무 신기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고 웃음을 터뜨렸다.
‘공부하는 학생선수’들의 서울대 입학, 야구부 승리로 이어졌다
20년전 서울대 야구부의 승리는 대학야구의 이변이자 기적으로 여겨졌다. 2011년부터 10년간 사령탑을 지낸 이광환 전 감독은 2020년 퇴임 인터뷰에서 “서울대 야구부의 1승이 한국시리즈 10번 우승보다 어려울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대부분 엘리트 출신에 훈련량도 많은 다른 대학 선수들과 ‘동아리’에 가까운 서울대 야구부가 실력으로 대등하게 겨루기는 어려웠다. 이 전 감독은 “우리 부원들은 학업이 우선이다. 학교 공부 따라가기만도 벅찬데 야구만 할 수가 없다”면서 다른 학교와 경기하는 건 “바둑 1급이 9단과 대국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번 서울대의 승리는 2004년과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서울대 야구부 OB는 “과거와 달리 현재는 초중고에서 야구부 활동을 경험해본 부원이 많아졌다”면서 “공부하는 야구선수를 길러 내는 학업병행 정책의 성과가 조금이나마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석 감독은 “현재 고교에서 3학년까지 선수였던 부원이 2명 있고, 유소년이나 리틀야구를 경험한 부원들도 많다”면서 “야구가 정말 하고 싶었는데 부모님의 반대로 못하고 공부에 매진한 친구들이 서울대에 와서 야구를 하고 있다. 어릴 적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기본기는 갖추고 있다. 입부한 뒤 체계적으로 연습도 하고, 신체적으로도 성장하면서 엘리트 선수들을 조금이나마 따라갈 정도가 되는 것”이라 밝혔다.
승리투수 이서준이 대표적인 예다. 이서준은 야구 명문 덕수고등학교에서 주전 3루수로 활약한 엘리트 출신이다. 3학년 시즌인 2021년엔 23경기에 출전해 73타수 29안타 2홈런 21타점 7도루 타율 0.397로 4할에 가까운 타율을 기록했다. 학생선수의 학업병행에 호의적인 정윤진 덕수고 감독의 격려 속에 서울대 진학의 꿈을 키웠고, 서울대 야구부의 ‘오타니’로 활약하는 중이다.
정석 감독은 “이서준은 누구보다 성실하고 멋진 선수다. 야구부에서 플레잉 코치 역할까지 겸할 정도로 동료들의 신뢰를 받는 친구”라고 칭찬했다.
이서준 외에 3학년 투수 박건우도 서울 이수중과 신일고 등 야구 명문을 거친 선수 출신이다. 고교 1학년까지 선수로 뛴 김유안도 있다. 이서준은 “내야수 이진산 선수는 리틀야구 출신인데 올해 14타수 8안타로 타율이 5할대(0.571)다. 야구를 정말 잘한다”고 자랑했다.
“어릴 적 야구를 했다가 공부에 전념하려고 그만뒀던 친구들이 여기 와서 잘하는 걸 보면 신기합니다. 계속 야구선수로 뛰었으면 대단한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서준의 말이다.
고교 시절 내야수였던 이서준은 서울대에서 투수 겸업을 시작했다. 타자와 투수, 학업을 병행하는 ‘3웨이 플레이어’, 삼도류다. 그는 “중고교에서 한 번도 투수를 해본 적이 없다. 팀 여건상 던지고 있는데, 3년째가 되면서 전보다는 실력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투수만 계속한 친구들과 비교하면 부족하지만, 재미도 있고 적성에도 맞는 것 같습니다. 오늘 경기에선 최고구속이 135km/h까지 나왔어요.”
물론 엘리트 출신이 여럿 입부했다고 해도 한계는 뚜렷하다. 정석 감독은 “여전히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고,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며 분명한 선을 그었다. “결코 우리가 다른 학교를 야구 실력으로 따라갈 순 없습니다. 오늘도 정말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다만 우리 선수들이 그 운을 가져올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해 연습했기에, 자격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대 야구부의 훈련은 주 4회, 한번에 네 시간이다. 2회는 단체훈련으로 하고 나머지 2회는 개인 훈련에 가까운 형태로 진행한다. 다른 엘리트 야구부에 비해 훈련량과 시간이 부족해, 주어진 시간에 최대한의 효율을 내야 한다. 1998년 LA 다저스와 입단 계약을 맺고 미국야구에 도전했던 정석 감독은 “선수들에게 말보다는 영상을 통해 피드백한다. 가령 타격에 관한 내용이면 먼저 프로 선수의 영상을 보여주고, 엘리트 출신인 이서준과 박건우가 같은 동작을 하는 걸 찍어서 보여주는 식이다. 말로 설명하면 잘 못 알아듣는 친구들도 영상으로 보여주면 쉽게 이해한다. 16년간 부원들을 가르치며 얻은 노하우”라고 웃으며 말했다.
정 감독은 “효율적인 훈련을 위해 미리 일 년 치 스케쥴을 짜둔다. 가을 훈련부터 다음 시즌까지 로드맵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훈련이 이뤄지게 한다. 개인별 맞춤형 프로그램도 주고 있다”면서 “무엇보다 다들 야구를 사랑하는 친구들이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각자 많은 노력을 한다”고 자랑했다.
야구를 통한 ‘배움’…서울대 야구부의 목표는 승리가 아니다
팀의 우승과 선수들의 프로 진출이 목표인 대부분의 야구부와 달리 서울대 야구부는 야구가 지닌 교육적 효과에 초점을 맞춘다. 이광환 전 감독은 이를 “야구라는 단체운동을 통해 멤버십을 배우고, 그 경험이 사회에서 각자의 길로 가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정리했다.
한 서울대 야구부 OB는 “서울대 학생이면 사회적으로 엘리트 코스로 여겨진다. 흔히 말하는 ‘3루에서 태어난’ 학생도 많고 성공만 경험하며 자란 친구들도 있다. 항상 공부 잘하고 칭찬만 받으며 자란 친구들이 많다”면서 “그런 학생들에게 야구장에서 계속 깨지고 치욕적으로 지는 경험은 생전 처음일 거다. 그러면서 세상에 맘대로 안 되는 것도 있다, 살다 보면 실패하고 질 때도 있다는 걸 배우게 된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이광환 전 감독도 퇴임 인터뷰에서 “야구부 생활을 통해 협동도 배우고, 희생과 인내도 배울 수 있다. 다들 사회에서 리더가 될 친구들인데 리더십은 물론 ‘멤버십’까지 배우는 기회”라고 말한 바 있다.
정석 감독은 “우리 야구부는 처음 입부한 학생에겐 유니폼을 주지 않는다. 먼저 운동장 정리부터 하게 한다. 운동장 돌멩이를 줍고 선배들 뒤치다꺼리하며 일종의 연수 기간을 가진다”며 “그 기간엔 실력은 보지 않고 인성만 지켜본다. 그 과정을 통과한 학생만 야구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야구부에 잠깐 몸담았다고 다 야구부원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정 감독은 “세 시즌 동안 선수로 등록한 학생만 정식 야구부로 인정받고 명예 졸업장과 OB 경기 출전 자격을 준다”고 했다. 학업을 병행하며 3년 동안 야구부 활동을 계속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야구부에서 3년을 버틴 친구라면 성실하고 인성이 훌륭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계속할 수가 없으니까요.”
이광환 전 감독은 “야구부 출신들이 졸업하고 사회에서 제 몫을 하는 것을 보면 뿌듯하다”면서 “제자 중에 판검사도 있고 행정고시, 외무고시를 패스한 친구들도 나왔다”고 말했다. 정석 감독도 “야구부 매니저 여학생 중에 네 명이 졸업한 뒤 검사로 일하고 있다. 제주지검에 있는 한 제자는 서귀포 전지훈련 때 한 번씩 와서 후배들을 격려하고 밥도 사준다”고 자랑했다.
야구부 경험을 살려 야구계에 진출한 사례도 적지 않다. 롯데 박현우 전 부단장이 서울대 야구부 출신으로 구단 고위직을 지냈고, 삼성과 KT에도 현직 프런트 직원이 일하고 있다. 야구계에서 일하지 않더라도 평생 야구팬으로 남아 야구의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한다.
이서준 이전에 ‘공부하는 야구선수’로 화제가 됐던 이정호(13학번)는 현재 대학원에 다니며 야구부 코치 역할을 겸한다. 이서준은 “취업 준비로 바쁜 가운데서도 코치로 등록해서 많은 도움을 주신다. 이번에 이긴 경기에서 전력분석에도 큰 도움을 주셨다”고 했다.
서울대 야구부 출신 프로 선수가 탄생하는 날이 올까요
20년 만에 승리를 맛본 서울대 야구부의 다음 꿈은 프로야구 선수를 배출하는 것이다. 정석 감독은 “우리 야구부 출신 중에 프로 지명을 받는 선수가 나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야구부 역사상 둘뿐인 승리투수, 이서준이 가장 근접한 후보다.
정 감독은 “가능성 있는 선수라고 본다. 열심히 하고, 대학리그 타율도 우수하다. 투수로도 잘 던지고 있다”면서 “물론 프로의 벽이 높겠지만, 도전하는 자체만으로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야구부가 이긴 것처럼, 기적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지 않나”라고 말했다.
이서준도 “올 시즌 전 목표를 세웠다. 야구부가 승리를 거두면, 그 기세를 몰아서 드래프트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면서 “졸업할 때까지 계속 드래프트에 도전할 생각이다. 군복무를 마친 뒤에도 도전하고 싶다”고 의욕을 보였다. 이서준은 19일까지 타자로 4경기 13타수 5안타 타율 0.382를, 투수로는 3경기 7이닝 1승 무패 평균자책 9.00을 기록 중이다.
서울대 야구부가 승리한 날 밤, 서울 모처에선 부원들과 OB들이 모여 ‘번개’ 모임을 했다. 한 OB는 “경기가 끝나기 전부터 단톡방에 하도 많은 글이 올라와서 불이 날 정도였다. 야구부를 축하해주자고 뜻을 모아서 조촐한 회식 자리를 가졌다”고 했다.
이서준은 “학교 선배님들은 물론 친구들, 가족들로부터 많은 축하를 받았다. 회식 자리에도 OB 선배님들이 정말 많이 오셨다. 거의 2, 30학번 위의 선배들이 오셔서 축하해 주시고, 2004년 첫 승 멤버였던 선배님도 와서 당시 얘기를 들려주셨다”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정석 감독은 “5월 중순 열리는 OB-YB전 때 정식으로 축하연을 개최할 예정이다. 그때는 기념 티셔츠도 제작하고, 오늘 못 만난 OB들도 모여서 다 함께 축하하는 자리를 가질 예정”이라고 했다.
“입학한 뒤 동료들과 1승만 하자는 얘기를 자주 나눴는데, 그때는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서준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그런데 막상 이기고 나니,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요. 정말로 값진 승리인 것 같습니다. 평생 기억에 남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