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내세우며 취임한 인판티노, 본색은 독재자? FIFA 태양왕의 민낯을 밝히다 [춘추 이슈분석]
트럼프 등 권위주의적 지도자들과 밀착…취임 이후 독재 행보로 거센 비판 받아
[스포츠춘추]
부패 척결을 내세우며 FIFA 회장에 오른 지아니 인판티노(55)가 취임 9년 만에 권력에 취해 독재자로 변모했다는 혹독한 평가를 받고 있다.
스포츠 매체 디 애슬레틱의 올리버 케이 축구전문 기자는 6월 13일(한국시간) "FIFA 회장이자 '축구의 왕' 지아니 인판티노, 그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2016년 FIFA 회장에 당선된 인판티노가 개혁을 약속했지만 오히려 전임자보다 더 권위주의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올해 3월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인판티노를 두고 "크리스마스 아침에 트리 아래 선물을 본 어린아이 같다"고 묘사했다. 트럼프는 또 인판티노를 "나의 위대한 친구"이자 "어떤 면에서는 축구의 왕"이라고 불렀다. 인판티노는 이런 찬사에 고개를 뒤로 젖히며 크게 웃었고, 기뻐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트럼프는 김정은, 푸틴 등 권위주의 독재자들을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FIFA 수장으로서 인판티노는 32개팀 클럽 월드컵, 48개팀 월드컵 등 파격적인 제안들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그는 카타르 전용기를 타고 전 세계를 누비며 스포츠 스타들과 국가 원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자신의 무용담을 300만 팔로워를 가진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다.
그의 권력 도취 상태는 상징적 행보에서도 드러난다. 스위스 언론들은 인판티노를 루이 14세를 연상시키는 '태양왕(Sonnenkonig)'이라고 부른다. 새로 제작된 클럽 월드컵 트로피에는 그의 이름이 두 번이나 새겨져 있고, 소규모 팀이 그의 모든 행보를 따라다니며 소셜미디어용 영상을 촬영한다.
이런 상황에 대해 알렉산데르 체페린 UEFA 회장은 한 기자회견에서 "자아의 크기가 어떻든 상관없이, 어떤 축구 행정가도 우리가 게임의 스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타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디 애슬레틱은 인판티노의 권력 장악 과정을 심층 분석했다. 스위스 출신인 그는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차별을 겪었다. 사촌 다니엘 넬렌은 "스위스 사람들로부터 인종차별을 느꼈다"며 "지아니는 빨간 머리에 주근깨가 있었는데, 이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이탈리아인이라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축구선수로서는 3군에서 뛰는 것이 한계였던 인판티노는 일찍부터 선수의 길을 포기하고 행정가의 길을 택했다. 인판티노의 사촌은 디 애슬레틱 인터뷰에서 그가 "내가 선수로서 충분하지 않다면 축구선수의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UEFA 법무팀에서 시작한 그의 경력은 미셸 플라티니 회장 시절 급속도로 성장했다. 당시 영국축구협회 사무총장이었던 알렉스 혼은 "그 시절 지아니는 정중하고 성실하며 열심히 일했지만 재미있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2016년 FIFA 회장 선거 당시 인판티노는 개혁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정작 당선되고 난 뒤에는 협회의 독립성을 약화시키는 행보를 보였다. 취임 한 달 만에 FIFA 의회는 새로운 집행부에 각종 독립위원회 간부들을 임명하거나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사실상 독립기구들을 무력화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도메니코 스칼라 컴플라이언스위원회 위원장은 이에 항의해 24시간 만에 사임했다. 이어 FIFA 윤리위원회 한스-요하임 에케르트 위원장과 조사담당 코르넬 보르벨리 스위스 검사도 연임되지 못했다. 인판티노 체제에서 독립적으로 부패를 감시하던 핵심 인물들이 모두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쫓겨난 것이다.
에케르트 전 위원장은 디 애슬레틱과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윤리위원회가 독립성을 유지한다면, 우리는 규정을 위반한 누구든지 두려움이나 호의 없이 조사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 것"고 밝혔다.
인판티노는 입으로는 개혁을 외쳤지만 뒤로는 고액 연봉을 챙기기에 급급했다. 2016년 유출된 녹음에서 인판티노는 200만 스위스프랑(약 30억원) 연봉 제안을 "모욕"이라고 표현했다. 현재 그의 연봉은 당시의 거의 두 배인 500만 달러(약 70억원)에 달한다.
편법적인 임기 연장도 문제다. FIFA는 2016년 회장 임기를 최대 3선까지로 제한했지만, 인판티노는 2022년 첫 번째 임기가 블라터로부터 승계받은 것이어서 3년만 재임했기 때문에 3선 제한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그는 2031년까지 재임할 수 있게 됐다.
지난 5월 15일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열린 제75회 FIFA 총회는 인판티노의 권위주의적 면모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210개 회원국 대표들이 오전 9시 30분 개회를 기다리는 가운데, 인판티노는 카타르 전용기를 타고 도하에서 오는 중이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 사우디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 카타르 국왕 셰이크 타밈 빈 하마드 알타니와 함께 회의와 국빈만찬에 참석하고 있었다.
결국 총회는 3시간이나 늦어졌고, 알렉산데르 체페린 UEFA 회장을 포함한 유럽 집행위원 8명이 항의 표시로 퇴장했다. UEFA는 성명에서 "순전히 사적인 정치적 이익을 위해" 마지막 순간에 일정이 변경된 것에 대해 실망감을 표했다고 밝혔다.
인판티노는 트럼프뿐만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권위주의 정권과의 밀착 관계로도 비판받고 있다. 지난달 트럼프가 멕시코만을 '아메리카만'으로 개명하자고 제안했을 때 인판티노가 웃으며 동조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FIFA 개혁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던 마크 피트는 "인판티노는 사우디에서 트럼프를 만나는 것을 선호한다. 솔직히 말해서 동료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며 "동료들을 3시간이나 기다리게 해서 총회를 시작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지금 너무 거만해졌다"고 비판했다.
런던 소재 인권단체 페어스퀘어가 조율한 35개 단체 공동성명은 지난달 FIFA가 "10년 전보다 더욱 열악하게 운영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성명서는 고위직의 다양성 부족, 인판티노의 권위주의 정치지도자들과의 밀접한 관계, 월드컵 개최와 직접 연결된 광범위한 인권 침해, 사우디아라비아의 2034년 남자 월드컵 개최권 획득 과정에서의 논란 등 8가지 사례를 제시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FIFA가 사우디의 인권 기록을 '중간' 위험 수준으로만 분류한 것에 대해 "월드컵 경기장과 인프라 건설에 투입될 수백만 명의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책임을 완전히 방기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물론 인판티노 취임 후 FIFA rk 상업적 측면에서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런던 소재 피치 마케팅 그룹은 이번 주 발표한 보고서에서 2026년 월드컵까지 4년간 FIFA 수익이 100억 달러를 넘어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이전 4년 대비 두 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다고 밝혔다.
뉴질랜드축구협회 앤드루 프래그넬 회장은 "한 사이클에서 다음 사이클로 수익을 두 배로 늘린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성과"라며 "모든 축구에 걸친 부의 재분배 측면에서 지아니가 그것을 정말 잘 대표해왔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인판티노의 권위주의적 행보에 대해서는 복잡한 입장을 드러냈다. 프래그넘 회장은 "서구 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관대하고, 다른 부분에서는 문제를 회피한다고 비판할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그는 사실상 210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과 같은 조직을 관리하고 있다"며 인판티노가 처한 현실적 제약을 인정했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개막 전날 57분간 진행된 인판티노의 기자회견은 그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스위스에서 이탈리아 이민자 아들로 차별받은 자신의 경험을 들어 억압받는 집단들과 공감한다며 "오늘 나는 카타르인으로 느낀다. 오늘 나는 아랍인으로 느낀다. 오늘 나는 아프리카인으로 느낀다. 오늘 나는 동성애자로 느낀다. 오늘 나는 장애인으로 느낀다. 오늘 나는 이주 노동자로 느낀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카타르의 인권 문제를 희석시키고 비판을 이슬람 혐오로 몰아가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져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후 인판티노는 언론과의 접촉을 거의 차단했다. 댓글 기능을 비활성화한 인스타그램을 통해서만 외부와 소통하고 있으며, 관례였던 총회 후 기자회견도 폐지했다. 최근에는 미국 스트리머 '스피드'와의 인터뷰에서 8분간 자신이 웸블리에서 열린 자선 경기에 출연하는 영상을 함께 시청하며 시간을 보내는 어색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케이 기자는 기사 말미에서 "인판티노는 비판적 시각이 차단된 채 자신의 모든 발언이 그대로 수용되고, '어떤 면에서는 축구의 왕'으로 추앙받으며, 트럼프의 표현처럼 그 유치한 열정마저 환영받는 안락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냉소적으로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