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에 쐐기 박은 손아섭의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정말 더 빠를까? [스춘 초점]
국내와 해외에서 여러차례 실험 이뤄져
[스포츠춘추]
지난 10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LG 트윈스와 한화 이글스의 경기. 트레이드로 한화 유니폼을 입은 외야수 손아섭이 7회 재치 있는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매진된 관중석 2만 3750명의 함성을 폭발시켰다.
프로야구에서 1루를 향해 몸을 날리는 장면은 언제나 팬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극적인 순간, 승부를 가르는 슬라이딩은 그 자체로 박진감이 넘친다. 하지만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은 정말 더 빠를까?’
실험 결과는 의외였다. 2000년 미국 캔터키대 연구팀은 20명의 대학 야구 선수들을 대상으로 고속 영상 분석을 진행했다. 선수들은 헤드퍼스트와 전력질주(피트퍼스트) 슬라이딩을 각각 세 차례 시도했다. 평균 기록은 헤드퍼스트 3.65초, 전력질주 3.67초로 0.02초 차이였다.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가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국내 실험에서는 오히려 전력질주가 더 빨랐다. 한 방송사와 제주국제대 야구부의 실험에서 전력질주는 평균 4.147초, 헤드퍼스트는 평균 4.165초로 머리부터 들어가는 방식이 0.018초 더 느렸다. 다른 연구들도 비슷한 결론을 내놓았다. 속도 차이는 거의 없고, 오히려 헤드퍼스트는 피로도와 부상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실제로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은 손가락 골절, 어깨 탈구, 손목 염좌 등 부상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1루 슬라이딩 시에는 베이스를 손으로 치며 속도를 줄이지 못해 충격이 더 커진다. 2023년 11월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KIA 타이거즈 김도영은 1루 헤드퍼스트 슬라이딩 도중 왼엄지 인대 파열로 수술대에 오른 바 있다. 이 때문에 해외 고교·대학 리그 일부 팀은 선수들에게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금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선수들이 몸을 날리는 이유는 있다. 실험에 참여한 선수 68%는 “헤드퍼스트가 더 빠르다고 느낀다”고 답했다. 90%는 “전력질주가 더 안전하다”고 했지만, 체감 속도와 경기 전략은 또 다른 문제다. 슬라이딩은 투수·수비수의 리듬을 깨뜨리고, 수비 혼란을 유도하며, 충돌을 피하는 전략적 가치가 있다. 단순한 시간 싸움이 아닌 심리전의 도구인 셈이다.
손아섭의 선택도 본능과 전략이 맞물린 순간이었다. 그는 경기 후 “어떻게든 1점을 얻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홈까지 전력 질주하다 보니 공이 이미 포수 미트에 있었다. 순간적으로 몸이 반응했다”고 말했다.
그 한순간이 소중한 추가점을 만들었다. 2사 3루에서 문현빈의 1루수 땅볼 때 3루 주자였던 손아섭은 홈으로 파고들었다. 포수 박동원의 태그가 다가오자 몸을 비틀어 오른손으로 홈플레이트를 찍었다. 잠실은 그 순간 열광의 도가니가 됐다.
손아섭은 “예전에 삼성전에서도 포수 태그를 피해 득점한 적이 있다. 오늘도 왼손으로 홈을 터치하려다가 포수 미트가 보여서 오른손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만약 전력질주였다면 태그를 피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결국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다. 실험 데이터는 “더 빠르지 않다”고 하지만, 선수의 감각은 “그렇다”고 말한다. 과학과 감각 사이의 이 간극이야말로 야구의 매력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손아섭의 슬라이딩처럼, 투혼이 깃든 한 장면이 야구장을 열광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