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다시 만나자”...백혈병과 용맹하게 싸우는 10세 소년, 기아 챔피언스필드에서 꿈을 던지다 [스춘 현장]

KIA와 ‘메이크어위시 코리아’가 함께 꿈 이뤄줘 KIA, 사회공헌활동 주간 ‘TIGERS CSR 위크’ 맞아 11일 광주 전남 지역 간호사, 소방관, 경찰관 등 100명 초청

2025-09-12     황혜정 기자
김예한 군이 조상우의 폼을 따라하며 시구에 임하고 있다. (사진=KIA 타이거즈)

[광주=스포츠춘추]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시인 최승자의 시 '20년 후에, 지에게'의 한 구절처럼, 살아 있다는 건 정말이지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다. 12일 광주-기아 챔피언스필드에서 그 아슬아슬한 삶을 살아가는 10세 소년이 마운드에 우뚝 섰다. 그렇게 바라던 순간이었다. 작은 몸에 긴장과 설렘을 가득 안고 야구장 한가운데 우뚝 선 김예한 군은 관중석의 커다란 함성 속에 힘차게 “파이팅!”을 외쳤고, 그의 손을 떠난 공은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이날 경기를 열어 젖혔다.

예한 군의 공을 받아준 사람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KIA의 주전 유격수 박찬호였다. 공을 받은 박찬호는 예한이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예한아, 우리 캐스터와 선수로 이 그라운드에서 다시 만나자.” 그저 의례적인 위로가 아니었다. 박찬호는 정성스레 사인을 건네고 시구를 직접 지도하며 마치 오랜 시간 함께한 팬에게 보내는 깊은 존경처럼 예한 군의 눈을 마주 봤다.

예한 군의 롤모델 박찬호가 예한 군의 시구 연습을 직접 지도하고 있다. (사진=KIA 타이거즈)
김예한 군이 시구에 앞서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사진=KIA 타이거즈)

예한 군은 시구에 앞서, 자신이 얼마나 KIA를 사랑하는지를 몸짓으로도 표현했다. KIA 불펜투수 조상우가 허리를 깊이 숙여 팔을 흔드는 특유의 준비 동작을 그대로 따라 했고, '에이스' 제임스 네일이 투구 전 발을 동동 구르는 동작까지 흉내 냈다. 그 모습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어린 팬의 진심 어린 존경과 관찰의 결과였다. 이를 지켜본 이범호 KIA 감독은 한동안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박수를 보냈다. 그 마운드 위에는, 아프지만 누구보다 단단하게 오늘을 살아내는 한 아이의 꿈이 빛나고 있었다.

예한 군은 현재 급성골수성백혈병 투병 중이다. 병은 지난해 6월, 예고 없이 찾아왔다. 물 한 모금조차 넘기기도 어려운 날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10세 소년은 “야구는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 같아요”라고 말하며 KIA 타이거즈와 함께 생을 살아왔다. 그가 사랑하는 KIA도, 작년 우승을 거머쥐었다가 올해는 8위까지 떨어졌다. 좋아하는 박찬호도 10번의 타석에서 3번의 안타밖에 치지 못했다. 마치 자신의 삶과 꼭 닮아 있다고 했다. 그 속에서 그는 ‘야구도, 인생도’ 그런 거라며 위로받았다.

예한 군은 2021년부터 KIA의 144경기를 단 한 경기도 빼놓지 않고 챙겨봤다. 팀이 이기든 지든, 그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특히 지난해 KIA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 축포를 터트린 그 순간 병상에서 펄쩍 뛰어오르며 기쁨을 만끽했다고 회상했다.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이었어요.” 삶의 가장 힘든 시기, 가장 기쁜 순간이 함께 찾아왔기에 그 우승은 더욱 특별했다. 예한 군은 직접 제작한 KIA 응원 포스터와 함께 응원가를 부르며 병실 복도를 오갈 정도로 타이거즈를 너무나 사랑한다.

김예한 군이 직접 만든 KIA 응원 포스터. (사진= 메이크어위시 코리아 제공)

그의 곁에는 언제나 가족이 있었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아버지, 어머니와 누나들이 있다. 특히 큰 누나 김예인 양은 당시 중학교 1학년의 나이로 동생에게 조혈모세포이식을 결심했다. 그 어린 나이에 용기를 내어 동생의 생명을 지탱해준 누나는, 예한 군의 몸속에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예한 군은 그런 누나에게 항상 고맙기만 하다.

야구를 좋아하게 된 것도 누나 덕분이었다. 누나를 따라 함께 중계를 보던 어느 날, KIA의 강렬한 빨강 유니폼에 매료됐고, 그때부터 ‘호랑이 군단’은 그의 삶 그 자체가 됐다. 박찬호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묻자 “몰입할 수 있는 플레이 때문이에요”라고 말했다. 화려하고 몸을 사리지 않는, 팀을 위한 희생의 모습에 반했다고 했다.

예한 군은 단순한 팬을 넘어, 자신의 꿈을 조금씩 그려가는 중이다. 그는 미래에 스포츠 캐스터가 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지금부터 자신만의 블로그에 KIA 경기 분석글을 작성하고 있다. 짧은 문장 하나에도 예리한 관찰력과 팀에 대한 깊은 애정이 배어 있다. 언젠가 진짜 중계석에서 "9회 2사 만루, 타석에 박찬호가 들어섭니다"라고 소개할 수 있기를, 그는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도운 건 '메이크어위시 코리아'였다. 이 비영리 단체는 전 세계 50여 개국, 40개 지부에서 50만 명이 넘는 난치병 아동들의 소원을 이뤄주는 일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지금까지 약 5600명의 아이들이 이 단체를 통해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예한 군도 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시구를 마친 뒤,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팬인 제게 이런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신 메이크어위시 코리아와 KIA 구단에 정말 감사드려요. 전 이제 '종신' KIA 팬이에요.”

그 말에는 진심이 있었다. 그날의 마운드는 단지 시구를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아이가 버텨낸 날들의 증표였고, 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언이었으며, 언젠가 다시 이곳에 서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예한 군은 지난해 10월 누나로부터 조혈모세포를 이식 받은 뒤, 회복에 힘쓰고 있다. 아직 면역력이 약해 학교는 가지 못하지만 KIA 타이거즈로 대동단결한 가족과 친구들의 응원 속에 오늘도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어쩌면 정말로 20년 뒤, 예한 군은 건장한 청년 캐스터로서 다시 그라운드에서 박찬호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날 그 장면은 오늘과 이어진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 어떤 시구는, 한 경기의 시작이 아니라 한 생의 희망이라는 것을.

한편, 이날 박찬호는 3-4로 끌려가던 9회말 2사 1,2루에서 중전 적시타로 기적의 4-4 동점을 일궈냈다. 그리고 예한 군이 두 번째로 좋아하는 선수 김선빈이 끝내기 결승타를 치며 예한 군의 입이 귀에 걸리게 만들었다. 예한 군은 이 모든 순간을 관중석에서 지켜봤다. 역시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니다.

예한 군과 가족, 그리고 박찬호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메이크어위시 코리아 제공)
박찬호와 다정하게 포즈를 취한 예한 군. (사진=KIA 타이거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