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교사' 강정희, 故주성노 감독에게 바치는 대표팀 복귀 [스춘 여자야구]
맏언니 강정희, 5년 만에 대표팀 전격 복귀
[이천=스포츠춘추]
“감독님은 야구를 사랑하셨어요. 그리고 그 야구를 사랑하는 여자야구 선수들을 진심으로 아끼셨어요.”
초등학교 교사이자 40세의 여자야구 선수 강정희는 5년간의 공백을 깨고 다시 대표팀에 복귀했다. 오래도록 접어두었던 태극마크를 다시 달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지난 2월 8일 세상을 떠난 故 주성노 감독이었다. 마지막 병상에서조차 여자야구를 걱정했던 고인의 진심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다시 움직였다.
주 감독은 지난해 12월, 담도암 말기 진단을 받고 안양의 한 호스피스 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이어갔다. 올해 1월 중순까지만 해도 지인들과 농담을 나눌 정도로 의연했지만, 설 연휴를 전후해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고 결국 2월 8일 오후, 향년 73세로 생을 마감했다. 강정희는 수많은 병문안 인파 중 한 명으로 그를 찾았다. 그녀에게 주 감독은 단순한 야구 지도자가 아닌, ‘야구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강정희가 20대 중반 교편을 잡고 사회인 야구를 시작했을 무렵, 그녀의 기민한 운동신경과 열정을 눈여겨본 이가 바로 주 감독이었다. 그는 2012년 LG가 주최한 여자야구 대회에 강정희를 전격 발탁하며, 그녀에게 국가대표라는 새로운 꿈을 심어주었다.
주성노 감독은 한국 야구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지도자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박찬호, 서재응, 김병현, 김동주, 박재홍 등 이른바 ‘드림팀’을 이끌고 6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따냈으며, 이후 아시아선수권 우승과 시드니 올림픽 본선 진출, 부산 아시안게임 코치 등 한국 야구의 중심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그런 그가 말년에 가장 깊은 애정을 쏟은 곳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한국 여자야구’였다.
주 감독은 2010년 여자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6년 한국여자야구연맹 부회장을 지낸 뒤, 2022년부터는 경기력향상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여자야구 발전에 앞장섰다. 주말이면 전국 어디든 여자야구 경기가 열리는 곳이라면 빠짐없이 찾아가 직접 경기를 지켜봤고, 선수 한 명 한 명에게 따뜻한 말을 건넸다. 여자야구 관계자들은 “감독님은 선수들의 장단점을 하나하나 파악하고 계셨고, 70대의 나이에도 전국을 돌며 재능 있는 선수를 대표팀으로 이끌어 주셨다. 정말 대단한 안목의 소유자셨다”고 입을 모았다.
강정희는 그런 감독의 진심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느꼈던 사람이다. “감독님은 사회인 선수들을 모두 기억하고 계셨어요. 늘 사투리를 섞어가며 친근하게 조언해주셨고, 단순히 연맹 고위직이 아니라 진심으로 우리를 지켜봐주셨던 분이셨어요.”
그래서였을까. 병상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강정희는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삶의 끝을 앞둔 주 감독은 여전히 여자야구를 걱정했다. “당장 내일 어떻게 되실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저희를 보며 여자야구 걱정을 계속하셨어요. 그 말에서 감독님의 진심과 사랑을 다시 한 번 느꼈죠.”
그때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주 감독이 늘 하시던 말. “너희 밥 한번 사야 한다. 강정희가 사준 고기 한번 먹어야지.” 그 말에 그는 “네, 감독님. 그래야죠”라고 웃으며 답하곤 했다. 언제든 식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감독이 병상에 눕고서야 그 말의 무게가 달라졌다. “그때 당장 했어야 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왜 그걸 언제든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이 차려진 상을 앞에 두고, 강정희가 속한 사회인 야구팀 언니는 조용히 말했다. “얘들아, 감독님이 사주시는 밥이야. 맛있게 먹자.” 그 말에 강정희는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어느 날 밤, 그는 마음을 굳혔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해야 한다. 대표팀은 늘 나의 꿈이었으니, 이런저런 조건 따지지 말고 다시 도전하자.” 그렇게 결심한 그녀는 상비군 선발 공지가 뜨자마자 바로 신청했고, 마침내 5년 만에 다시 태극마크를 달게 됐다. 그 복귀는 단순한 복귀가 아니었다. 여자야구의 미래를 끝까지 걱정하던 한 사람의 바람에 대한, 조용하지만 강한 응답이었다.
이제 강정희는 대표팀의 맏언니로서 오는 10월 26일부터 11월 2일까지 중국 항저우에서 열리는 ‘여자야구 아시안컵’에 1루수로 출전한다. 그녀는 다짐하듯 말했다. “감독님, 하늘에서 저희 잘 지켜봐 주세요. 정말 잘하고 올게요.” 강정희가 항저우에서 쳐낼 첫 안타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야구를 사랑한 사람을 사랑한’ 한 명장의 헌신에 대한, 진심 어린 헌사이자 감사의 마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