껌 씹는 것만 봐도 무슨 구종인지 다 안다? 첨단 기술이 가져온 MLB 투수들의 악몽, 투구습관 노출 공포증 확산 [스춘 MLB]
투구습관 노출 편집증 확산... "마운드 오르기 전 이미 파악당해"
[스포츠춘추]
5일(한국시간) 열린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LA 다저스의 디비전시리즈 1차전 7회말. 2루에 선 앤디 파헤스가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필라델피아 투수 맷 스트람이 셋 포지션 자세에 들어가자 파헤스가 다시 팔을 올렸다. 곧이어 테오스카 에르난데스가 3점 홈런을 터뜨렸다. 다저스의 5대 3 승리를 확정짓는 한 방이었다.
경기가 끝난 뒤 인터넷이 들끓었다. "2루에서 투수 글러브가 다 보였다"는 주장이 나왔다. 파헤스가 에르난데스에게 구종을 알려준 게 아니냐는 것이다. 당사자들은 즉각 부인했다. 파헤스는 스트람의 글러브 안이 보였다는 건 인정하면서도 신호를 보낸 사실은 부인했다. 스트람은 소셜미디어에 "거의 10년간 같은 동작을 해왔다"고 맞받았다.
진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장면은 지금 메이저리그를 휩쓸고 있는 현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투수들의 투구습관 노출, 이른바 '쿠세'를 둘러싼 편집증이다. 스포츠 매체 디 애슬레틱은 6일(한국시간) 이 현상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특집 기사를 내보냈다.
뉴욕 양키스 투수코치 맷 블레이크의 말은 단도직입적이다. "10월 포스트시즌엔 더 많은 눈들이 당신을 주시한다." 정규시즌 막판 갑자기 무너진 양키스 구원투수 루크 위버는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내가 뭔가를 미리 보여주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고 고백했다.
선수들과 코치들이 입을 모아 지적하는 원인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먼저 2022년 피치컴 도입으로 포수의 손가락 대신 투수의 동작으로 관심이 옮겨갔다. 피치클락이 생기면서 투수들이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도 사라졌다. 하지만 결정타는 따로 있다. 수십 대의 카메라 시스템이 야구장에 설치되면서 투수의 모든 동작을 속속들이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애틀 로건 길버트의 표현이 섬뜩하다. "경기 중에만이 아니다. 마운드에 오르기도 전에 이미 찾아낸다." 토론토 케빈 가우스만은 "타자가 볼 수 없는 각도인데도 누군가는 본다. '어떻게 저걸 봤지?' 싶은 것들까지 다 잡아낸다"고 한탄했다. 샌디에이고 딜런 시즈도 "글러브 위치, 머리 움직임, 호흡. 말 그대로 뭐든지 될 수 있다. 마운드에선 거의 로봇이 돼야 한다"도 말했다. 다저스 1루 코치 크리스 우드워드는 "한 시리즈에 최소한 한 명은 명백한 힌트를 보이는 투수가 있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한번은 다저스 구단이 구원투수 알렉스 베시아를 불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영상을 나란히 보여줬다. 베시아는 차이를 찾지 못했다. 구단의 대답은 의외였다. "입을 보라." 슬라이더를 던질 땐 껌을 씹었고, 패스트볼 땐 턱이 가만히 있었다. 베시아는 그날 이후 껌을 끊었다. 샌디에이고 제이슨 아담은 구종 노출을 막으려고 큰 글러브를 사용한다. 스플리터를 던지는 투수들은 그립 잡을 때 달라지는 팔뚝 형태를 숨기려고 긴팔을 입는다.
엘리트 투수들도 예외가 아니다. 헤수스 루사르도는 아예 투구 폼을 수정했다. 보스턴의 루카스 지올리토는 체인지업 헛스윙 비율이 떨어지자 "타자들이 그 공이 온다는 걸 미리 아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다저스 마무리 태너 스콧은 9월 부진 이후 "내가 힌트를 주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혼란스러워했다.
이런 '쿠세' 훔치기는 2010년대 후반 휴스턴의 사인 훔치기 스캔들과는 성격이 다르다. 투구습관 파악 자체는 합법이다.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달하지만 않으면 된다. 팀들은 키나트랙스 같은 모션 캡처 시스템으로 투수를 해부한다. 디트로이트 케이시 마이즈는 "다른 투수들의 쿠세를 파악해 선수들에게 제시하는 게 일인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분석가들이 영상을 뜯어보고, 코치들이 경기 전 미팅에서 브리핑하고, 경기 중엔 아이패드로 실시간 확인한다. 완벽한 정보 시스템이 구축됐다. 보스턴, LA 다저스, 뉴욕 양키스, 필라델피아 같은 자금력 있는 구단들이 이 분야 선두주자다. 클리블랜드, 휴스턴, 밀워키도 강점이 있다. "지금 시대엔 득점력이 곧 정보력"이란 말까지 나온다.
타자들은 의도적으로 투수의 불안감을 자극한다. 샌프란시스코 포수 패트릭 베일리는 4월 말 2루에서 사인을 전달하는 것처럼 행동해 샌디에이고 투수를 자극했다. 몇 달 후 그는 허세였다고 인정했다. "편집증을 만드는 거다. 투수의 주의를 끌 기회가 있다면 확실히 유리하다." 실제 정보가 없어도 심리전은 효과가 있다.
투수들도 역공에 나선다. 길버트는 2루 주자가 있을 때 커브볼 그립을 잡는 척하다 패스트볼로 바꾼다. 가우스만은 "3구 연속 똑같은 동작을 하다가 네 번째에 글러브를 한 번만 더 튕기면 타자들은 변화구가 온다고 착각한다"고 웃는다. 속이는 자와 속는 자의 게임이다.
다만 째깍째깍 돌아가는 피치클락이 이런 심리전을 벌일 여유를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심리전을 신경쓰다가 정작 중요한 공을 던지는 데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위버는 "그 상황 자체만으로도 힘든데 머릿속에 더 많은 걸 쌓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머리를 맑게 유지하는 게 너무 어렵다"라고 하소연했다.
이에 일부 투수들은 차라리 신경 쓰지 않는 게 답이라고 말한다. 스트람은 "2017년 (사인 훔치기 스캔들의) 휴스턴도 아웃당했다. 그냥 좋은 공을 던지면 된다"고 했다. 2025년 메이저리그 전체 타율은 0.245로 2015년보다 9리가 낮아졌다. 타격은 여전히 스포츠에서 가장 어려운 기술이다.
5일 필리스-다저스 경기에서 파헤스가 신호를 보냈을 수도, 스트람이 힌트를 줬을 수도 있다. 아니면 단지 에르난데스가 허리 높이로 날아온 시속 146킬로미터 패스트볼을 제대로 때려냈을 뿐일 수도 있다. 스트람 자신도 "공이 목표 지점에서 한참 벗어났다"고 인정했다. 조금이라도 이점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지만, 결국 승부를 결정짓는 건 투수가 던진 공과 타자가 휘두른 방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