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어리그 '샐러리 캡' 도입 실패..."법적 대응 불사" 선수노조 압박+12개 구단 반대까지 [더게이트 해축]
-현행 PSR 폐지, 내년부터 SCR 시행 -꼴찌 팀 기준 지출 상한제는 무산 -선수노조·에이전시 법적 대응 경고
[더게이트]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가 10년 가까이 유지해온 재정 규정을 전면 개편한다. 다만 가장 파격적인 안건은 끝내 문턱을 넘지 못했다.
프리미어리그는 21일(한국시간) 영국 런던에서 20개 구단 대표자 회의를 열고 새로운 재정 규정 도입을 논의했다. 이날 세 가지 안건이 표결에 부쳐졌다. 투표 결과는 엇갈렸다. '앵커링'으로 불리는 지출 상한제는 찬성 7표, 반대 12표, 기권 1표로 부결됐다. 반면 'SCR'로 약칭되는 수입 대비 지출 제한안은 14대 6으로 통과됐고, 'SSR'이라는 재정 안정성 점검 제도는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프리미어리그 규정 변경에는 20개 구단 중 14곳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이번 결정으로 프리미어리그는 2026-27시즌부터 현행 PSR(수익성·지속가능성 규정) 체제를 폐기하고 SCR 체제로 전환한다. PSR은 구단이 3년간 최대 1억500만 파운드(1470억원)까지 적자를 낼 수 있도록 허용하는 규정이다. 2015-16시즌 도입 이후 프리미어리그 재정 규율의 근간이었지만, 최근 몇 년간 구단들이 회계 편법을 동원해 규정을 우회하면서 한계를 드러냈다.
SCR은 간단하다. 구단이 선수단과 감독 연봉, 이적료 분할 상환금, 에이전트 수수료 등에 쓸 수 있는 돈을 팀 전체 수입의 85%로 묶는다. 수입이 1000억원이면 선수단에 850억원까지만 쓸 수 있는 식이다. 일종의 샐러리 캡이다.
유럽축구연맹(UEFA)이 먼저 도입한 제도로, UEFA는 70% 상한선을 적용하고 있다. 첼시와 아스톤 빌라가 지난여름 UEFA SCR 규정 위반으로 합계 약 206억원의 벌금을 물었다.
프리미어리그의 SCR은 UEFA보다 15%포인트 느슨하다. 평가 기간도 다르다. UEFA가 매년 1~12월 단위로 평가하는 반면, 프리미어리그는 시즌 단위로 움직인다. 매년 3월 1일 1차 평가를 하고, 10월에 추가 점검을 실시한다. 3월 평가에서 85% 기준을 초과한 구단은 6월과 10월에 재평가를 받는다.
프리미어리그는 성명을 통해 "새 SCR 규정은 모든 구단에 더 큰 성공을 향한 기회를 제공하고, 이미 70% 기준으로 운영 중인 UEFA SCR 규정과의 정합성도 높인다"고 밝혔다.
꼴찌 팀 기준 '연봉 총액 제한'은 무산
가장 논란이 됐던 앵커링은 결국 도입되지 못했다. 앵커링은 모든 구단의 선수단 지출 상한액을 꼴찌 구단이 받는 중계권료와 상금의 5배로 묶는 제도다.
지난 시즌 꼴찌 사우샘프턴이 받은 돈은 1092억원이었다. 앵커링이 도입됐다면 모든 구단의 지출 상한선은 5460억원으로 고정됐을 것이다. 올 시즌엔 새 중계권 계약이 시작되면서 상한액이 6000억원 안팎으로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앵커링의 핵심은 '부자 구단도 가난한 구단도 똑같은 금액까지만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맨체스터 시티나 아스널처럼 수입이 많은 구단도, 승격팀처럼 수입이 적은 구단도 지출 한도는 동일하다. 사실상 연봉 총액 제한이나 다름없다. 빅클럽들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선수노조인 PFA(프로축구선수협회)도 강력히 반발했다. 마헤타 몰랑고 PFA 대표는 지난주 BBC 인터뷰에서 "누군가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을 인위적으로 막는 건 법정에서 절대 인정받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CAA 베이스, CAA 스텔라, 와서먼 등 영국 3대 에이전시도 앵커링이 통과되면 프리미어리그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경고한 바 있다.
프리미어리그 측은 "PFA에 의견을 개진할 기회를 여러 차례 제공했다"며 "리그의 가치를 유지하고 경쟁 균형을 보장하며 구단들이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운영되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반박했다.
중소 구단엔 희소식, 빅클럽엔 족쇄
SCR 도입으로 프리미어리그 판도에 변화가 예상된다. 번리, 브렌트퍼드처럼 선수를 사서 키운 뒤 비싸게 파는 구단들은 타격을 입을 수 있다. SCR은 선수 판매 수익을 3년에 걸쳐 나눠 계산하기 때문이다. 올해 1000억원에 선수를 팔아도 당장 수입으로 인정받는 건 3분의 1인 330억원뿐이다.
반면 리버풀, 애버턴, 아스톤 빌라처럼 앵커링 도입을 지지했던 구단들은 SCR 통과를 환영하는 분위기다. 빅클럽의 무분별한 지출을 막아 경쟁 균형을 맞출 수 있다는 판단이다.
선수들 입장에선 연봉 상승 속도가 둔화할 가능성이 크다. 구단들이 쓸 수 있는 돈에 한계가 생기면서 몸값 협상에서 구단이 유리해진다. 일각에선 일부 선수들이 제한이 덜한 다른 유럽 리그로 눈을 돌릴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한편 SSR은 구단이 당장 쓸 돈이 있는지, 앞으로도 문제없이 운영할 수 있는지를 점검하는 제도다. 1년 단위로 구단의 운영 자금을 체크하고, 장기적으로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도 살핀다. 프리미어리그는 "세 가지 테스트를 통해 구단의 단기·중기·장기 재정 건강도를 평가한다"고 설명했다.
SSR은 사실상 올해 도입된 영국 독립축구감독기구(IFR)의 라이선스 제도와 유사하다. 논란이 적었던 만큼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이번 투표로 프리미어리그는 2년 넘게 준비해온 재정 개혁의 방향을 확정했다. 앵커링 부결로 빅클럽과 법적 분쟁은 피했지만, SCR 도입만으로도 구단 재정 운영 방식은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이 움직이는 리그의 변화가 축구계 전체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