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춘추]
모자에 새겨진 세 개의 등번호. 그 숫자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가을야구의 무대에 함께하지 못한 동료들을 향한 마음이었다. 부상으로 시즌을 마감한 선수들의 번호를 새긴 채, 삼성 라이온즈의 젊은 불펜 투수들은 말없이 묵묵히 마운드를 지켰다. 그리고 이들의 호투는 이날 패배 속에서도 삼성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삼성은 6일 대구 삼성 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린 2025 KBO리그 포스트시즌 와일드카드 1차전에서 NC 다이노스에 1-4로 패했다. 선발 아리엘 후라도는 6.2이닝 4실점을 기록하며 패전투수가 됐다.
7회초 2사 1,2루 위기에서 마운드를 내려온 후라도 대신 최원태가 등판했지만, NC 맷 데이비슨에게 사구를 내주며 흔들렸고, 삼성은 곧바로 불펜진을 가동했다.
이때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됐다. 2사 만루 상황에서 등판한 이승민(25)은 권희동을 유격수 땅볼로 돌려세우며 실점 없이 이닝을 마무리했다. 8회초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마운드에 오른 이호성(21) 역시 안정적인 투구로 무실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9회, 1-4로 뒤진 가운데 등판한 신인 배찬승(19)은 삼진 두 개를 포함해 삼자범퇴로 NC 타선을 틀어막았다.

세 선수 모두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차분하고 단단한 투구를 선보였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모자에 ‘66·29·59’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는 바로 부상으로 가을야구에 나서지 못한 동료들, 외야수 박승규(66번), 투수 백정현(29번), 투수 이재희(59번)의 등번호였다.
박승규는 올 시즌 타율 0.287, 6홈런, OPS(출루율+장타율) 0.797을 기록하며 팀의 중심타자로 활약했지만, 지난 8월 30일 경기 도중 손가락 골절로 시즌아웃됐다. 베테랑 투수 백정현은 불펜으로 전환해 평균자책점 1.95라는 인상적인 성적을 남겼지만, 왼쪽 어깨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했다. 젊은 투수 이재희 역시 시즌 초 팔꿈치 부상으로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이 등번호들은 가을야구를 앞두고 급히 쓴 것이 아니다. 정규시즌 막바지부터 일부 선수들이 스스로 모자에 새기기 시작했고, 이날 등판한 세 명의 투수 모두 이 번호들을 달고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우연처럼, 아니 어쩌면 그 마음이 통한 듯, 세 선수 모두 무실점 투구를 펼치며 희망을 남겼다.

경기는 졌지만, 이 젊은 불펜진의 당찬 모습은 삼성 팬들에게 위안이자 기대였다. 박진만 삼성 감독 역시 경기 후 “배찬승이 첫 포스트시즌 경기였는데, 나이답지 않게 배포 있게 던졌다”며 “정규시즌 때보다도 안정감 있는 투구를 보여줬고, 앞으로 삼성 불펜의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극찬했다.
삼성의 가을야구는 아쉽게 출발했지만, 모자에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을 새기고 뛴 젊은 투수들이 전한 이 조용한 헌신과 팀워크는 오히려 깊은 울림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