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게이트]
2000년 겨울, 서울 안국동 참여연대 사무실의 낡은 문이 열렸다. 스물여덟 살의 청년 간사가 무심코 고갤 들었다. 순간 청년 간사의 동공이 바이올린 현처럼 떨렸다.
방문객은 평범한 이들이 아니었다. 시대의 아이콘들이었다. 야구팬인 청년 간사 눈엔 시대의 아이콘 그 이상일지 몰랐다. 바로 프로야구 슈퍼스타 선수들이었다.
“송진우, 양준혁, 강병규 등 당시 최고 야구선수들이 서 계시더라고요. TV에서나 보던 분들을 실제로 뵈니까 어찌나 신기한지(웃음). 한편으론 ‘저분들이 참여연대에 왜 오셨을까’ 궁금해지더라고요.” 청년 간사의 회상이다.
1990년대 말까지 KBO(한국야구위원회)리그에서 선수들은 절대 ‘을’이었다. 보류 조항에 묶인 선수들은 구단의 일방적 결정에 순순히 따라야 했다. 연봉 협상은 말이 협상이지 ‘통보’에 지나지 않았다.
FA(자유계약선수) 제도는 메이저리그에서나 볼 법한 꿈같은 이야기였다. 선수들 입에서 ‘단결’이란 소리가 나오면 당장 ‘빨갱이’, ‘용공 분자’로 몰렸다.
물론 이 거대한 벽에 금을 내려 한 선구자가 없던 건 아니다. '철완' 최동원이 선구자였다. 1988년 최동원은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선수 결사체인 프로야구선수회를 조직했다. 6개 구단 선수가 대전에 모여 창립총회까지 열었다. 하지만, 좌초했다. KBO와 6개 구단이 잔인하고도 집요하게 선수회 파괴 공작을 벌였기 때문이다.
롯데 자이언츠의 심장이던 최동원이 삼성 라이온즈로 쫓겨나면서 선수회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12년이 흐른 2000년, 프로야구 선수들은 다시 한번 절박하게 뭉쳤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그들은 깨달았다. ‘우리 힘만으론 KBO, 구단과의 싸움에서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들에겐 다른 세계의 무기가, 다른 연대의 손길이 필요했다. 그때 선수들의 손을 잡아준 곳이 바로 ‘참여연대’였다.
프로야구선수협 결성의 숨은 조력자, 시민운동가 안진걸

2000년 겨울, 참여연대 문을 열고 들어온 스타 선수들을 가장 먼저 맞이한 스물여덟 살 청년. 참여연대 막내 간사이자 광부의 아들, 안진걸이었다.
전남 화순. 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했다. 탄광이 문을 닫자, 장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 경비 일을 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아버지는 매일 일터로 향했다. 이유는 하나. '가난'이라는 지긋지긋한 대물림을 아들 대에서 끊어내기 위해서였다.
안진걸은 대학 졸업 후 재야 운동가의 길을 가려 했다. 하지만 눈앞의 가난과 부모의 희생을 외면할 수 없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안진걸은 부모와 약속했다.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겠습니다. 취직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달에 20만 원씩 보내드리겠습니다.”
부모는 아들이 제시한 금액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재야’ 대신 '직장'을 택했다는 것만으로 안도했다.
1999년 1월 안진걸이 입사한 '번듯한 직장'은 대한민국 권력 감시의 최전선, 참여연대였다. 안진걸에겐 이보다 더 자랑스러운 직장이 없었다. 문제는 월급이었다.
안진걸은 부모에게 “월급이 100만 원”이라고 했다. 약속대로 매월 100만 원에서 20만 원을 고향에 부쳤다. 그러나 월급은 100만 원이 아니었다. 실제 월급은 25만 원이었다. 부모에게 보내는 20만 원을 제하고 남은 5만 원. 그것이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한 청년이 버텨야 할 한 달 치 삶의 무게였다.
월급 25만 원의 간사 앞에서, 억대 연봉의 슈퍼스타들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격정적 목소리로 구단의 '부당함'을 쏟아냈다.
안진걸은 5만 원으로 버티는 자신의 삶과 억대 연봉을 누리는 슈퍼스타들의 삶을 비교하지 않았다. 그러니 위화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안진걸은 '시민의 권리'를 다루는 간사였다. 안진걸이 유일하게 관심을 둔 건 ‘헌법에 보장된 결사의 자유가 어떻게 재벌 구단주들에 의해 무시되고 있는가’라는 본질뿐이었다.
사실 안진걸에게 ‘억울함’엔 경중이 없었다. ‘부당함’ 앞에선 우선순위도 없었다. 화순 탄광에서 쓰러져간 아버지 동료들의 눈물과 그라운드 위 슈퍼스타들의 짓밟힌 권리는 본질적으로 같은 ‘부당함’이었다.
안진걸은 말 대신 행동으로 움직였다. 참여연대 시민권리국 선임 간사였던 박원석(전 정의당 의원)의 지휘 아래, 안진걸은 선수들이 KBO와 구단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도록 도왔다.

2000년 1월 25일. 참여연대의 이름으로 한국 스포츠 역사에 획을 긋는 성명서가 발표됐다.
“참여연대는 구단주들의 대변기구로 전락한 KBO의 부당한 압력을 성토하며 헌법이 보장한 '결사의 자유'에 따라 선수협의 출범을 적극 지지한다.”
이 성명 하나가 많은 걸 바꿨다. 이전까지 선수들의 투쟁은 ‘밥그릇 싸움’으로 폄훼되곤 했다. 일부 언론도 그렇게 몰아갔다. 하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시민단체가 이를 '헌법적 권리'의 문제로 규정하자, KBO와 구단 그리고 일부 언론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더는 선수들을 향해 “야구에나 집중하라”며 찍어누를 수 없게 된 것이다.
안진걸과 참여연대가 선수들에게 제공한 건 돈, 법률 자문 이상이었다. 그것은 '정당성의 방패'이자 '여론의 창'이었다. 안진걸과 참여연대는 선수협의 투쟁이 고립되지 않도록 ‘시민사회’라는 거대한 연대를 끌어왔다. 그리고 정치권의 관심까지 이끌어냈다.
KBO가 선수들을 압박할 때마다, 참여연대는 다시 성명을 내고 기자회견을 열어 KBO의 부당함을 공론화했다.
그 노력이 통한 것일까. 2001년 1월, KBO는 결국 선수협을 정식 승인한다. 선수들의 승리였다.
선수협 정식 승인은 용기 있게 싸운 선수들이 거둔 성과였다. 선수들의 가장 큰 벗이자 지지자였던 팬들이 도와준 덕분이었다. 그리고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사회, 정치권의 노력과 중재가 돋보인 결과였다.
그리고 여기,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또 하나의 조각이 있다. 5만 원으로 한 달을 버티면서도 부모에게 20만 원을 부치던 한 젊은 간사의 순수한 열정과 헌신이다.
“당시 제가 만난 건 슈퍼스타 선수들이 아닙니다. 그저 억울한 시민들을 만났던 것뿐이에요.” 안진걸의 겸손이다.
"도움이 필요한 분들의 사연엔 경중이 없고, 그분들의 안타까운 사연 앞에선 우선순위가 없다"

참여연대 막내 간사에서 민생경제연구소장이 됐지만, 안진걸은 여전히 억울하고 힘든 시민의 편에 서 있다. 생계 위기에 놓인 이들에게 10만 원을 무상 지원하는 '홍길동 은행', 학자금이 필요한 청년들을 위한 '꿈수저 청년 장학기금' 모두 안진걸이 설립하고, 운영을 지원하는 곳이다.
2024년 3월부터 1년 반 동안 '홍길동은행'은 3천452명의 서민에게 약 3억 4천만 원을 지원했다. '꿈수저 청년 장학생'은 114명에 이른다. 이처럼 많은 서민 지원과 장학생을 배출하기 위해 안진걸은 밤낮없이 뛰고 또 뛴다. 안진걸은 말한다.
"참여연대 간사 시절부터 제 삶의 철학은 한결 같아요. '억울함엔 경중이 없고, 부당함 앞에선 우선순위가 없다'는 겁니다. 지금도 같아요. 도움이 필요한 분들의 사연엔 경중이 없고, 그분들의 안타까운 사연 앞에선 우선순위가 없다고 생각해요. 더 많은 분에게 더 많은 연대의 손길이 함께 할 수 있도록 계속 뛰는 것. 그게 제 운명이자 제 인생 최고 행복입니다(웃음)."
25년을 관통하는 세월 동안 안진걸은 변한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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