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춘추=대전]
“열정을 좀 보이란 말이야!”
최근 공개된 두 편의 한화 이글스 다큐멘터리 티저 영상은 펄펄 끓다 못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파토스(pathos)로 가득하다.
지금은 한화를 떠난 타자 라이온 힐리는 뭔가에 잔뜩 화가 난 듯 카메라를 향해 “당장 그 망할 카메라 끄라”고 고함친다. 음소거 처리되긴 했지만 ‘F-워드’까지 써가며 말할 정도로 격앙된 상태다. 그리곤 들고 있던 배트를 벽에 휘둘러 산산조각낸다. 미디어에 비친 젠틀하고 나이스한 이미지와는 정반대다.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이 선수들을 향해 호통치는 장면도 나온다. 수베로 감독은 “열정을 보여줘!”라고 외치며 한껏 핏대를 세운다. 누군가를 향해 삿대질도 한다.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코치들끼리 서로 언성을 높이고 몸싸움하는 장면도 있다. “당신, 나 밀었어?” “너도 밀었잖아”라는 대사가 오가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카메라를 발견한 이성열은 찍지 말라며 렌즈를 막는다. 하주석이 방망이로 라커룸을 때려부수는 장면에선 살기가 느껴진다. 넷플릭스 다큐 ‘죽어도 선덜랜드’에도 이 정도로 격렬한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리빌딩은 패배 동의어 아냐…리빌딩 하면서도 이기는 야구 가능해”

티저 영상 속 한화 이글스의 모습은 그간 우리가 알았던 한화의 이미지를 산산이 깨부순다. 한화는 지난해 공개 리빌딩 시즌을 보냈다. ‘실패할 자유’를 외치며 부임한 수베로 감독은 선수들과 팀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시즌을 운영했다. 사람들은 리빌딩 팀인 한화가 지든 이기든 싱글벙글 하하호호 웃으며 야구할 거라고 생각했다. 조니 워싱턴 코치와 새콤달콤을 나눠 먹으며 매일 행복야구를 한다고 착각했다. 한화 선수들도 인터뷰 때마다 ‘즐겁게 야구하고 있다’ ‘야구가 재미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해였다. 외부인 눈에 보이지 않는 클럽하우스 안에서는 한화 선수들도 승리를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조금이라도 잘해보려고 몸부림치고, 잘 안 될 때는 분노했다. 카메라의 존재를 잠시 잊을 정도로 미치도록 이기고 싶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제목이 ‘클럽하우스’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간절하게 승리를 원하는 팀에게 ‘고의 패배’를 요구하는 DM(다이렉트 메시지) 세례는 모욕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수베로 감독이 책상을 탕탕 치며 ‘DM 좀 그만 보내라’고 쏘아붙인 것도 이해가 간다. 당시 수베로 감독은 “전력을 다했는데 10등이 된다면 문제가 없지만, 고의적으로 지려는 의도를 갖고 운영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시간낭비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5일 캠프에 합류한 수베로 감독에게 다큐 얘기를 꺼냈다. 여권 문제로 뒤늦게 입국한 수베로 감독은 이날 올해 들어 처음 대전야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큐 예고편에서 왜 그렇게 호통을 쳤느냐’는 물음에 수베로 감독은 “스포일러를 하면 안 된다. 직접 결제해서 시청하고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고 유쾌하게 답했다.
수베로 감독은 “분명한 건 내가 굉장히 화난 상태였다는 점이다. 경기 결과 때문이 아니라 과정과 선수들의 마음가짐에 대해 화가 났었다”면서 “더 얘기하다가는 또 그때처럼 감정이 격앙될 것 같아서 여기까지만 얘기하겠다”는 말로 다큐 본편에 대한 궁금증을 자극했다.
수베로 감독은 리빌딩이 패배의 동의어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리빌딩을 하면서도 이기는 것,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라며 “흔히 리빌딩하는 팀은 지는 야구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지난해 우리는 선수들에게 리빌딩을 하면서도 이기는 야구를 해야 한다고 계속 강조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걸 할 수 있는 팀이 됐다”라고 힘줘 말했다.

돌아온 수베로 감독은 이날 선수단과 미팅에서도 ‘이기는 야구’를 선언했다. 그는 “작년 우리가 많이 들은 말이 있는데 바로 리빌딩이다. 리빌딩 야구는 작년에 남겨두고, 올해는 이기는 야구라는 방향을 잡고 함께 나아가자”고 말했다.
이어 “이기는 야구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디테일이다. 올해 그것을 놓치지 말고 신경 쓰며 매 경기에 임하면 이기는 야구가 가능하다. 아직 캠프가 끝나지 않았지만 끝날 때까지 선의의 경쟁이 있을 것이다. 작년 주전이라고 자리가 보장되는 게 아니다. 각자 포지션을 지키기 위해 선의의 경쟁을 해주길 바란다”는 말로 캠프 분위기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이기는 야구를 위해 올 시즌에는 선수단 관리와 경기 운영 방향부터 달라질 전망이다. 수베로 감독은 “지난해는 선수들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무리한 플레이가 나와도 용납이 됐고 실수가 나와도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면서 “올해는 선수들 간에 선의의 경쟁이 펼쳐질 것이다. 정말 강한 선수, 경기에서 이기고 싶어하는 선수들이 출전 기회를 얻는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키워야 할 선수가 아니라 ‘잘하는’ 선수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생각이다.
수베로 감독은 거의 전 포지션에 걸쳐 치열한 경쟁을 예고했다. 포수(최재훈)-2루수(정은원)-3루수(노시환)-유격수(하주석)-중견수(마이크 터크먼)과 선발 3인(닉 킹험, 라이언 카펜터, 김민우)만이 예외다. 특히 1루수와 코너 외야, 5선발과 승리조 불펜 자리를 놓고 남은 캠프 기간 치열한 경쟁이 기대된다.
정우람의 자리였던 마무리 투수도 수베로 감독은 “오프시즌 우리가 함께 풀어나갈 과제”라는 말로 교체 가능성을 열어뒀다. 1루 경쟁에선 의도적으로 변우혁, 김인환 등 신진급 선수들을 치켜세웠다. 지는 걸 좋아하는 팀은 없다. 리빌딩하는 팀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 한화는 올 시즌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이려고 한다. 다큐로 만든다면, 시즌 1보다 더 뜨겁고 격정적인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