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춘추]
최근 극장가에선 영화 ‘서울의 봄’이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사회에 잠시나마 민주화의 희망이 찾아왔던 ‘봄’을 끝장낸 사건, 12.12 군사반란을 스릴 넘치게 영상화한 걸작이란 평가다. 모두가 아는 비극적 결말을 향해 치닫는 과정을 보면서 답답함과 먹먹함, 무력감을 느꼈다는 관람평이 많다.
12월 6일 대한체육회가 발표한 ‘해병대 훈련 계획’을 접한 뒤, 많은 체육계 지도자와 행정가들이 비슷한 울분을 느꼈다고 한다. 대한체육회는 오는 18일부터 20일까지 2박 3일간 각 종목 국가대표 400여 명이 참여하는 해병대 훈련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앞서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10월 8일 항저우아시안게임 폐회 전날 기자 회견에서 “국가대표 선수들이 선수촌에 입촌하기 전에 해병대 극기 훈련을 하게 될 것이다. 저도 같이 (훈련하고) 입촌할 계획”이라고 말해 장내를 술렁이게 한 바 있다.
당시만 해도 체육계 관계자 중엔 ‘그냥 해 본 말일 것이다’ ‘여론이 가만있겠나. 비판 여론이 쏟아지면 없었던 얘기로 할 것’이라며 크게 개의치 않는 반응이 많았다. 하지만 이기흥과 체육회를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대상으로 본 게 오판이었다. “대화는 사람끼리 하는 거야.” (영화 ‘서울의 봄’에서 이태신의 말)
체육회는 보도자료에서 “정신력을 강화하고 2024 파리올림픽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서”라고 입소 취지를 설명했다. 각 종목 단체에 보낸 공문에는 국가대표 선수 및 회장·부회장·전무이사·사무처장 등 임직원 2명 이상의 참가를 요청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체육회의 선수 훈련 기획 부서 간부 등이 7일 경상북도 포항의 해병대 1사단에 현장 답사를 다녀왔다는 보도도 나왔다. 비판 여론을 예상했는지 “(국민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은) 최소화할 것이다” “가장 우려하는 건 선수 부상이다” “정신력 훈련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등의 변명도 구구절절하게 늘어놨다.

백해무익 해병대 훈련에 체육계는 비판 일색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러나 체육계 상식인들의 반응은 비판 일색이다. 한 체육단체 행정가는 “참담한 심정이다. 의견 수렴도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통보한 뒤 강제 동원령까지 내렸다”며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선수들을 동원해 군대식 훈련을 받게 한다는 건가. 국민들 시선이나 국제 스포츠계에서 어떻게 생각할지는 안중에도 없나”라고 비판했다.
한 트레이너는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해병대식 훈련은 백해무익한 시간 낭비”라고 지적했다. 이 트레이너는 “최상위 운동능력을 갖춘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해병대 훈련이 크게 힘들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면서도 “군대 훈련 프로그램은 대표 선수들의 체력이나 운동능력, 경기력 향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게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우스울 뿐이다. 고작 생각해낸다는 게 해병대캠프란 점이 체육회의 수준을 잘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해병대 캠프를 통한 ‘정신력 강화’도 1980년대에나 통할 발상이란 비판이 나온다. 한 프로스포츠단 코치는 “스포츠에서 정신력의 개념이 달라졌다. 이제 과거처럼 ‘빠다’ 맞고 악으로 깡으로 싸우는 투지를 정신력이라 부르는 시대는 지나갔다”면서 “이제는 목표를 향한 열정과 꾸준한 노력, 동기 부여, 자신감 등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해병대 캠프’는 이런 스포츠계 변화를 과거로 되돌리는 시대착오”라고 지적했다.
전문가와 체육계 관계자들은 SNS(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서도 비판을 쏟아냈다. 스포츠 인권 권위자로 통하는 한 교수는 “스포츠과학이 첨단을 달리는 오늘날, 국가대표씩이나 되는 선수들에게 무슨 정신력을 강화한답시고, 해병대 캠프를 가는지…”라면서 “그런 꼰대 발상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또 “선수들이 체력훈련 거부하는 건, 연구라고는 1도 안 하는 지도자들이 무분별하게 그것만 시켜대는 이유가 클 것”이라며 “예로부터 체육계 인권침해는 ‘정신력’ 갖다 붙이면서 행해진 것이 상당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이것도 다 그런 맥락일터. 정말 인권위 진정감”이라고 강도 높은 비판을 가했다.
다른 체육 관계자도 “도쿄올림픽 성적이 기대에 못 미치고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3위밖에 못했다고 이 추위 속에 ‘극기훈련’을 시키겠다고 한다”면서 “오래전 축구선수들에게 전술도 개인기도 제대로 안 가르치고 오로지 ‘정신력’과 ‘투지’만을 강조하던 그 옛날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자는 얘기”라고 비판했다.
이어 “추운 겨울에는 선수들 부상 위험이 커져서 그러잖아도 조심조심하며 훈련하라는 게 의사들 조언인데, 굳이 해병캠프에서 극기훈련이라니. 그것도 충분한 사전논의도 없이 일방통행식으로 결정하고 강압적으로 공문을 내려보냈다고 하니 기가 막힌다”면서 “지금이 어느 시대 어떤 세상인가. 체육회 공문에 슬로건으로 ‘가치 있는 스포츠, 같이 하는 인권존중’이란 문구가 적혀 있다는 데 (내가) 졌다”고 힐난했다.
한 언론인은 “올림픽을 해병대 훈련으로 준비한다고? 지금 1960년대냐”란 제목의 글에서 “이기흥 회장님! 올림픽이 무슨 국가 안보입니까? 무슨 정신력 타령입니까. 그렇게 메달 따서 뭐 할 건데요?”라고 질문한 뒤 “인권 없이 선수들 때리고 학대하고 성폭행해도 금메달만 따면 된다는 건가? 전체주의 군사 훈련으로 팀워크, 정신력 키우겠다는 구시대 발상 좀 버려라. 청소년기에 운동만 하다가 국가대표나 프로선수 안 되면 낙오자 되는 현실은 안 보이나? 이런 진짜 문제를 해결하라”고 성토했다.
한 스포츠 멘탈 전문가는 해병대 훈련반대 서명운동을 공유하면서 “국가대표 선수의 해병대 훈련을 반대한다”고 적었다. 여기엔 ‘이기흥 퇴진’ ‘선수들이 거부하라’ ‘엘리트 체육해체’ ‘금메달에 환호하지 않겠다’ 등의 해시태그를 걸었다.

한국 체육의 ‘봄’ 짓밟는 ‘해병대 캠프’ 발상, 이기흥은 한국 스포츠 발전의 걸림돌
‘군대 훈련’이나 ‘정신력 강화’는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위기를 해결할 방법이 될 수 없다. 최근 일간지 ‘한국일보’의 특집 ‘K 스포츠의 추락, J 스포츠의 비상’은 체계적인 정책과 과학적인 훈련으로 빠르게 앞서나가는 일본 스포츠의 변화를 소개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 스포츠계에서 한국을 ‘넘지 못할 벽’으로 여길 때도 있었지만, 선진 흐름을 빠르게 파악하고 디테일한 계획에 따라 움직인 결과 지금의 ‘대도약’을 이뤘다는 요지다. 과학에 기반을 둔 지원, 장기적인 정책 추진, 체육 저변 확대도 일본 스포츠가 한국과의 격차를 벌린 비결이다.
일본이 정책과 과학의 힘으로 멀리 달아나는 와중에, 한국은 체육회가 앞장서서 해병대 훈련을 강요하고 있다. 하부 체육단체나 팀 차원에서 군사훈련을 하면 말려야 할 체육계 수장이 오히려 한국체육의 역주행을 조장하고 있다. 체육회는 아시안게임을 한 달 앞둔 9월엔 자정부터 새벽 5시까지 선수촌 내 와이파이를 끊는 추태를 저지르기도 했다. 몸은 2023년을 살고 있는데 정신과 마음은 쌍팔년도인 사람들이 한국 체육의 방향을 결정하는 비극이다.
도쿄올림픽과 항저우아시안게임은 한국 체육에 ‘봄’이 올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줬다. 결과와 관계없이 최선을 다하고, 상대 선수와 우정을 나누며, 경기를 진심으로 즐기는 젊은 선수들의 모습은 신선한 감동을 줬다. 국민들은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에게도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 격려와 응원을 보냈다.
한국일보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제대회에 출전한 우리 선수들에게 가장 중요한 모습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60.4%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라고 답했고 “경쟁하면서도 즐기는 모습”이 21.3%로 뒤를 이었다. 반면 “메달, 월드컵 16강 등 좋은 성적 달성”은 18.3%에 그쳤다. 한겨울 얼음물 입수처럼 꽁꽁 얼어있던 한국 체육에 서서히 봄이 올 조짐이 보인다.
이 훈훈한 봄기운에 이기흥 회장과 체육회의 ‘해병대 캠프’ 계획은 찬물을 끼얹고, 군홧발로 짓밟는 추태다. 한국 체육 발전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반란군’이 있다면, 해병대 캠프를 밀어붙인 이기흥과 체육회 간부들일 것이다. 의식 있는 지도자, 행정가, 선수들이 힘을 합쳐 나서야 한다. 한국 체육계의 ‘이태신’들이 길목에 서서 한목소리로 외쳐야 한다. ‘니들이 체육계 걱정을 해서 해병대 훈련을 시키고 있느냐?’ ‘거기서 꼼짝 말고 그대로 있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