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춘추]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대역전'에서 데이비드 오티즈는 인상적인 일화를 들려준다. "일찍 나와 타격 연습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티토(테리 프랑코나 감독)가 절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물었죠. '감독님이시잖아요. 제 타격에 관해 할 말씀 있으시면 하세요.' 그러자 감독은 '누구, 나? 난 1할 7푼 쳤어. 최고는 너인데 내가 무슨 토를 달겠어? 네가 알아서 해.'라고 답했습니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방망이에 불이 붙었죠."
보스턴 레드삭스는 그해(2004년)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86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야구는 선수가 한다. 경기장에서 공을 던지고, 치고, 달리는 것은 선수들의 몫이다. 그리고 그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자신감을 주며,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감독의 중요한 역할이다. 메이저리그의 전설적 명장 스파키 앤더슨은 "야구는 단순한 게임이다. 좋은 선수가 있고 이들이 올바른 마음가짐을 유지하게 하면 감독은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
MZ세대 감독 이범호의 약속 “선수가 감독 눈치 보지 않는 야구 하겠다”

오티즈와 프랑코나의 일화는 2024년 KIA 타이거즈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이범호 감독을 떠올리게 한다. 1981년생인 이범호 감독은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1980년대 이후 출생한 감독이자, MZ 세대 최초의 프로야구 감독이다. 그는 부임 직후부터 "선수들이 감독 눈치 보지 않고 야구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선수들이 하고 싶은 플레이를 했으면 좋겠다", "내 눈치를 볼 필요 없다", "감독이 뭐라 하거나 인상 쓰거나 혼내면 선수는 다음 타석까지도 영향을 받는다. 그런 부분을 최소화하고 싶다.” 이 감독이 각종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선수들의 자유로운 자기 표현을 장려하는 그의 철학이다. "우리 팀에는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못 지르는 선수가 많다. 소리를 지르게 놔두면 어떤 선수가 될지 보고 싶다. 하고 싶은 대로 소리 지르면서 해보라고 했을 때 선수들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다"라는 그의 말에서 야구장의 주인공은 선수라는 철학이 잘 드러난다.
이 감독 부임 전까지 KIA 타이거즈는 선수단 전력은 나쁘지 않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가진 전력만큼의 성적을 내지 못하는 팀에 속했다. 6위에 그친 지난 시즌에도 득점-실점으로 산출한 KIA의 피타고리안 기대승률은 0.550으로 우승팀 LG(0.606) 다음으로 높은 2위였다. 하지만 경직되고 억눌린 더그아웃 분위기 탓에 선수단이 가진 능력의 합이 온전히 발휘되지 못했다. 젊은 유망주들의 성장도 더뎠다. 감독 눈치를 보느라 불필요한 훈련으로 시간을 허비했고, 코치진도 소신 있게 선수를 지도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전임 감독이 불미스러운 일로 경질되고 이범호 감독이 부임하면서 상황이 극적으로 달라졌다. 당시만 해도 스프링캠프 직전에 감독이 사라지는 사태는 한 시즌 전체 농사를 망칠 초대형 악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KIA 구단이 발 빠르게 움직여 후임 감독을 물색하고, 이범호 감독의 내부 승격을 결정하면서 악재는 호재가 됐다. 리더십 교체와 함께 선수단의 분위기가 몰라보게 달라졌고, 족쇄에서 풀려난 KIA 선수들은 잠재력을 마음껏 발산하기 시작했다.
소통과 신뢰로 만든 변화의 바람

MZ세대 감독다운 친근함과 소통 능력은 이 감독의 강점이다. 현역 시절 '꽃범호'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밝고 유쾌한 성격으로 팬들에게 많은 사랑받았던 이 감독은 감독이 된 후에도 이 장점을 살려 선수들과 격의 없이 지냈다. 이 감독과 현역 시절을 함께한 한 코치는 "선수 때부터 리더십이 뛰어났고 윗사람부터 어린 후배까지 다양한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고 소통하는 능력도 좋았다"고 했다.
부임 후에도 이 감독은 선수들과 격의 없는 관계를 유지했다. 어린 선수들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라고 말할 만큼 허물없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시즌 초반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던 소크라테스 브리토를 비롯해 박찬호, 나성범 등 주전 선수들이 힘든 시간을 보낼 때면 배트를 들고 기도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선수에게 용기를 주고 웃음꽃을 피웠다. 자칫 부정적으로 흘러갈 수 있는 상황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는 감독의 탁월한 친화력이 돋보였다.
성장이 정체됐던 KIA 젊은 유망주들도 이 감독의 부임과 함께 성장에 가속이 붙었다. 데뷔 첫 2년간 잦은 부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김도영이 올 시즌 30홈런-30도루를 달성하며 리그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감독은 "감독이 선수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영향력을 주느냐에 따라 젊은 선수들의 성장 시간이 단축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도영 외에도 한준수, 박찬호, 최원준, 곽도규, 정해영, 황동하, 김도현 등 젊은 선수들이 올시즌 일제히 잠재력을 발산했다. 선수가 마음껏 자기 플레이를 할 수 있게 판을 깔아준 이범호 감독의 역할이 컸다.
이 감독은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감독 때문에 눈치를 보고 야구를 못하는 모습은 없애려고 했다. 자기 실력을 못 펼치는 선수가 많은데, 하나하나 잘 모아서 좋은 선수를 잘 만들고, 젊은 선수들이 성장하는 것에 보탬이 되고 싶다"라고 밝혔다. 또한 "선수들이 경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는 것이 감독의 첫 번째 임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원칙과 포용의 균형 잡기: 양현종 교체 사례

그렇다고 이범호 감독의 리더십이 무조건적 포용으로만 일관된 것은 아니었다. 냉철한 판단과 따뜻한 소통의 조화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가 5월 17일 삼성전이었다. 9대 5로 앞선 5회말 2아웃, 그는 승리투수 요건을 채우기 직전이던 에이스 양현종을 교체했다. 최근 몇 년간 이런 상황에서 교체된 적 없는 베테랑이었지만, 이 감독은 팀 승리를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교체 이후의 모습이었다. 이 감독은 더그아웃에서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양현종을 뒤에서 껴안았다. '백허그'로 위로한 것이다. 이후 양현종은 언론 인터뷰에서 "감독님이 백허그를 했을 당시 씩씩대고 있었다. 승리투수 요건에 대한 아쉬움이 당연히 마음속에 있었고, 전 타석에서 안타를 내준 그 타자 타석에서 교체된다는 것이 자존심 상했다. 나를 못 믿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양현종은 "솔직히 화가 났지만, 계속 생각해보니 팀이 이기고 있는데 내가 뭐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팀 승리를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며 야구를 했는데 후배들에게 팀 승리가 중요하다 말해놓고 뭐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결국 감독님과 서로 미안하다는 말을 주고받았다"고 웃으며 말했다. 또한 "처음 겪은 상황이라 당황했지만, 이를 통해 많이 배웠다"고 덧붙였다. 팀이라는 조직이 우승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자연스럽게 융화되고 핵심 가치를 공유한 사례다.
또한 이범호 감독은 간판타자로 떠오른 김도영이 본헤드플레이를 했을 때나, 외국인 선수 소크라테스 브리토와 홈런타자 나성범이 실수를 저질렀을 때도 주저 없이 교체했다. 실수에 대해서는 주전 여부와 관계없이 책임을 물었지만, 뒤로는 선수들을 달래며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범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저는 선수들이 마음을 다치지 않으면서 선수 생활하는 야구를 해보자는 생각을 갖고 감독을 시작했다. 감독이 그렇게 해주면 선수들이 더 힘을 낸다. 제가 먼저 솔선수범하면 코치진도 선수들도 움직여준다"고 말했다.
“뱉은 말은 끝까지 지킨다” 이범호의 초지일관 리더십

무엇보다 이범호 리더십의 가장 큰 장점은 초심을 끝까지 지키는 일관성이다. 많은 감독이 부임 당시에는 선수들이 눈치 안 보게 하겠다, 선수들과 소통하겠다, 코치들의 조언을 듣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즌을 치르면서 위기가 찾아오고 연패에 빠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사람이 된다. 주위의 조언에 귀를 막고 독재자로 변하고, 선수들에게 눈치를 주면서 팀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든다. 초심을 잘 지켜서 우승하고 성과를 낸 감독이 점점 교만해져서 나중에는 ‘야구의 신’이 되는 경우도 많다.
말로는 눈치 보지 말라고 하지만 막상 선수가 실책하거나 경기가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때, 선수의 플레이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자신도 모르게 표정으로, 눈빛으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로 감정을 표현하는 감독도 많다. 선수는 눈치 보며 뛰지 말라는 감독의 말이 아니라 플레이의 결과에 따라 달라지는 감독의 말과 표정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되면 감독의 말과 약속에 대한 코치진, 선수단의 신뢰가 크게 떨어진다. 많은 감독들이 빠지는 함정이고, 수많은 감독의 명을 단축한 악순환이다.
그러나 이 감독은 달랐다. 이 감독은 시즌 시작부터 마지막 정해영이 아웃카운트를 잡는 순간까지 자신이 약속한 대로 행동했다. 시즌 중 큰 위기가 찾아오고 선수들이 실망스러운 경기를 했을 때도 원칙을 지켰다. 한 KIA 코치는 "시즌 중에 연패에 빠졌을 때 감독님이 초심을 지키는 걸 보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니까 부정적인 감정이 말이나 표정으로 나올 만도 한데, 끝까지 티를 내지 않더라”면서 “감독이 불안해하거나 쫓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선수들도 불안하지 않았다. 우리 팀이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회복해서 다시 반등에 성공한 비결"이라고 전했다.
이런 감독의 일관성은 자연스럽게 선수들의 신뢰와 끈끈한 팀 분위기로 이어졌다. KIA는 올 시즌 외국인 투수, 이의리 등 주축 선수들의 부상 악재가 끊이지 않았다. 시즌 개막 때 선발투수였던 5명 중 4명이 부상으로 이탈했고, 시즌 중반에는 역대 한 경기 최다실점인 30점을 내주는 등 온갖 위기도 겪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놀라운 '회복탄력성'을 보이며 제자리를 찾았다. 특히 순위 싸움을 펼치는 2위팀과의 맞대결에서 19승 3패(승률 0.863)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며 추격을 따돌리고 1위를 지켰다. 선발 공백은 황동하, 김도현 등 젊은 투수들이 나타나 빈 자리를 메웠고, 김도영, 곽도규 등 어린 선수들은 노장 최형우가 고군분투하던 타선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김태군과 한준수는 포수 신구 조화를 이뤘다. 이 감독이 초지일관 자신의 약속과 신념을 지킨 결과다.
KIA의 한 코치는 "그간 여러 팀에서 일해봤지만 올해 KIA처럼 모든 구성원이 '우승'이라는 목표로 똘똘 뭉친 팀은 처음 봤다"며 "스프링캠프 때부터 선수들이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올해는 우승 한번 해보자'며 같은 목표를 공유했다"고 전했다. 감독 한 사람이 바뀌었을 뿐인데 KIA는 지난해와는 전혀 다른 팀으로 거듭났다.
흔히 성공한 감독의 역량을 이야기할 때 허를 찌르는 전술이나 절묘한 투수 교체, 강력한 카리스마를 꼽는다. 하지만 이범호 감독과 KIA의 성공은 그와는 다른 길을 보여줬다. 야구장의 주인공인 선수들이 마음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리더의 역할임을 증명한 것이다. 이제 야구계에도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감독과 선수가 수직적 관계를 벗어나 함께 땀 흘리며 신뢰를 쌓아가는 동반자가 되는 시대. 이범호 감독이 보여준 새로운 리더십은 야구를 넘어 한국 사회 전체에 의미 있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