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춘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포괄적 여행금지령이 미국에서 열리는 각종 국제 스포츠 대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2026년 월드컵과 2028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앞두고 19개국 국민의 입국이 제한되면서 선수단은 물론 수십만 명의 해외 관중 유입에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이런 와중에 월드컵을 주관하는 FIFA의 지아니 인판티노 회장은 트럼프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이번 조치를 묵인하는 듯한 행보를 보여 비판이 가중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6월 5일(현지시간) 밤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차드, 콩고공화국, 적도기니, 에리트레아, 아이티, 이란, 리비아, 소말리아, 수단, 예멘 등 12개국 국민의 미국 입국을 전면 금지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부룬디, 쿠바, 라오스, 시에라리온, 토고, 투르크메니스탄, 베네수엘라 등 7개국에는 부분적 제한을 가했다. 9일부터 발효되는 이 조치로 총 19개국이 영향을 받게 됐다.
행정명령에는 "월드컵, 올림픽 또는 국무장관이 결정하는 기타 주요 스포츠 행사를 위해 여행하는 선수나 운동팀 구성원, 코치, 필요한 지원 역할을 수행하는 인원, 직계 가족"에 대한 예외 조항이 포함됐다. 하지만 '주요 스포츠 행사'의 기준이 모호해 각종 대회의 정상 개최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가장 직접적 타격을 받는 것은 이미 2026년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한 이란이다. 행정명령은 이란을 "테러 지원국가"로 규정하며 "미국 정부와 보안 위험 식별 협력을 거부한다"고 지적했다. 아이티는 현재 콘카카프(CONCACAF) 예선에서 5개 팀 조 2위를 기록 중이며, 리비아도 아프리카 예선 플레이오프 진출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
문제는 응원단이다. 선수단 예외 조항에도 불구하고 일반 팬들에 대한 광범위한 예외는 인정되지 않았다. 이는 해당국 팀들이 원정 경기에서 실질적으로 무관중 상황에 처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경기장에서 경쟁력 측면에서도 불공정한 환경이 조성될 우려가 제기된다.

더 복잡한 문제는 현재 진행 중인 대회들이다. 6월 15일 시작되는 콘카카프 골드컵에는 아이티가 참가 예정이지만, 이 대회가 '주요 스포츠 행사'에 포함되는지 여부가 불분명하다. 아이티는 19일 텍사스 오스틴에서 미국과 조별리그를 치를 예정이다.
6월 14일부터 7월 13일까지 미국에서 열리는 FIFA 클럽 월드컵도 마찬가지다. 32개 참가팀 중에는 여행금지 대상국 출신 선수 10명이 포함돼 있다. 아부다비 알아인의 수단 선수 모하메드 아와드 알라, 인터 밀란의 이란 공격수 메흐디 타레미 등이 대표적이다. K리그 울산현대 소속 마티아스 라카바를 비롯해 베네수엘라 출신 선수 3명도 예외 승인이 필요한 상황이다.
미국 국내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현재 메이저리그 사커(MLS)에서는 베네수엘라 출신 선수 9명이 활약 중인데, 이 중 인터 마이애미의 텔라스코 세고비아와 로스앤젤레스 FC의 다비드 마르티네스는 최근 MLS에 합류해 아직 영주권을 취득하지 못했다. 베네수엘라는 10일 우루과이와 월드컵 예선을 치를 예정인데, 이 날은 여행금지령 발효 하루 뒤다.
미국 국무부의 토미 피고트 수석 부대변인은 6일 브리핑에서 "전 세계에서 오는 사람들과 이런 행사에 참석하는 미국인들 모두가 이런 조치를 원할 것"이라며 "이런 규모의 행사를 주최할 때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요 스포츠 행사'의 구체적 기준에 대해서는 답변을 회피했다.
이런 가운데 FIFA 인판티노 회장의 행보가 도마에 올랐다. 인판티노는 1월 트럼프 취임식에 참석해 일론 머스크, 마크 저커버그, 제프 베이조스 등 거대 기술기업 최고경영자들과 나란히 앉아 박수를 치며 웃는 모습을 보였다. 취임식 주간 동안 인판티노는 "도널드 트럼프와 나는 훌륭한 우정을 나눈다"는 인스타그램 게시글을 포함해 일주일도 안 되는 기간 트럼프 관련 게시물을 9차례나 올렸다.
인판티노는 이후 트럼프의 사우디아라비아 국빈 방문에 동행하기도 했으며, 파라과이에서 열린 FIFA 총회 시작을 지연시키면서까지 트럼프와 개인 회동을 가져 UEFA 등 대륙별 축구연맹들의 비난을 샀다.
이는 2017년 인판티노의 발언과는 대조적이다. 당시 그는 "FIFA 대회에 있어서는 월드컵에 진출하는 모든 팀과 그 팀의 서포터, 임원들이 해당 국가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렇지 않으면 월드컵이 없는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트럼프의 1기 행정부 시절에도 유사한 일들이 벌어졌다. 2017년 티베트 여자축구팀이 텍사스 댈러스컵 참가를 위한 미국 비자를 거부당했고, 2019년에는 과테말라 U-15 대표팀 선수 9명이 콘카카프 선수권 참가가 불허됐다. 쿠바 대표팀 주장 요르단 산타 크루스도 2019년 골드컵 비자를 거부당했다.
최근에도 문제가 이어졌다. 올해 4월 듀크대학교 농구 스타 카만 말루아치는 트럼프 행정부가 남수단 여권 소지자들의 모든 비자를 취소하면서 추방 위기에 처했다. 잠비아 여자축구팀은 중국에서 열리는 대회를 앞두고 미국 거주 선수 4명을 제외시켜야 했다.
2028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여행금지령이 대회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한다"고 밝혔다. 케이시 워서먼 조직위원장은 "행정명령에서 올림픽이 특별한 고려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 매우 명확했다"며 "연방정부가 이를 수용할 환경을 제공할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니콜 회베르츠 부위원장도 "206개국이 대회 참가를 준비하고 있다"며 "연방정부가 이들 참가자들이 입국할 수 있도록 보장해줬다"고 밝혔다.
하지만 국제 스포츠계는 여전히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미국 올림픽·패럴림픽 위원회는 6일 밤 전국 스포츠 단체들에게 "급변하는 정책 상황"에 대한 이메일을 발송했다. 일부 종목에서는 지원 스태프나 코치들이 여행금지령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결국 트럼프의 여행금지령은 미국이 자랑하는 '스포츠 초강대국'의 위상에 금이 가게 만들고 있다. 수십만 명의 해외 관중과 수조원의 경제 효과를 기대했던 대회들이 예상치 못한 변수에 직면한 상황이다. 무엇보다 스포츠를 통한 국제 화합이라는 올림픽과 월드컵의 근본 정신이 훼손될 우려가 커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