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춘추=잠실]
“잔디 색깔부터 잠실 야구장의 냄새, 상대가 두산이면 이승엽 감독님과 염경엽 감독님까지 다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올시즌 LG 트윈스 임찬규는 데뷔 이후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야구계에서 가장 열심히 야구 이론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선수로 알려진 임찬규지만 그간 노력에 비해 좀처럼 만족스러운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던 게 사실. 그를 아끼는 주변 동료와 코치 중에는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안 될까’ 아쉬워하는 이가 많았다.
하지만 임찬규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한계에 도전했다. 피치터널, 피치디자인, 피지컬 트레이닝은 물론 이미지 트레이닝까지 한 사람의 야구선수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계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데뷔 첫 FA(자유계약선수)를 앞둔 올 시즌, 리그를 대표하는 국내 선발이자 정규시즌 우승팀의 믿음직한 투수로 우뚝 섰다.
임찬규는 15일 잠실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 상대 정규시즌 최종전 선발로 나섰다. 결과는 5.2이닝 1실점 호투로 승리투수. 이날 승리로 리그 국내투수 가운데 가장 많은 14승을 달성했고, 역대 LG 국내선발 단일시즌 최다승 랭킹에서도 10위에 이름을 올렸다. 2000년대 이후로 범위를 좁히면 2001년 신윤호(15승) 이후 최다승이다. 여기에 144.2이닝으로 시즌을 마감해 2020년 이후 3년 만에 규정이닝을 채우는 기쁨도 누렸다. 개인 세 번째 규정이닝 달성과 함께 올겨울 ‘FA 선발 최대어’ 자리를 굳힌 임찬규다.
이날 경기 후 LG는 정규시즌 우승 트로피 수여식을 진행했다. 임찬규는 투수 조장 자격으로 트로피를 함께 들어 올리는 영광을 누렸다. LG 팬으로 자라 팀의 암흑기를 지켜봤고, 2002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때는 눈물을 흘렸던 그 꼬마 팬이 성장해 이제는 LG의 정규시즌 우승을 이끌었고, 한국시리즈 우승 도전에 앞장선다. 다음은 큰 도전을 앞둔 임찬규가 경기 후 취재진과 만나 나눈 일문일답이다.

한시즌을 마감한 소감은?
일단 겸손이 아니라, 에이스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단지 올해 성적이 잘 맞아떨어진 것 같고, 팀원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성적이 난 거지 스스로 에이스 역할을 했다고 하기는 그렇다. 몇 경기, 몇 년 안 됐고 올해 좀 잘한 거기 때문에 에이스란 생각은 절대 안 한다. 앞으로 2, 3년 더 이런 성적을 그 이상으로 거둬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크다. 작년에 팀을 위해서 더 희생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갖고 팀을 위해 시즌을 준비했더니 더 좋은 결과가 있었던 것 같다. 앞으로도 시즌 준비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오늘 규정이닝과 14승이 걸린 경기였는데.
사실 생각이라는 게…사람의 생각에는 성격이 있고 생각에 속도가 있고 과정이 있고 이런 것들이 정말 많다. 그래서 새로운 환경에 자꾸 새로운 생각을 입히는데, 마운드에서 긍정적인 요소든 솔직히 부정적인 요소든 생각이 많아진다는 거는 무조건 안 좋은 것 같더라. 최소한으로 단순화를 하고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계속 생각이 나더라. 일종의 외부 요인이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가지고 자꾸 목표를 자꾸 잡다 보면 쫓기게 된다. 그래서 공 하나에 내가 원하는 대로 던지기 위해서 준비를 많이 했다. 계속 경기 나가기 전까지 한 며칠을, 열흘 정도 시간을 가지면서 매일 연습을 했던 것 같다.
생각을 다스린 비결이 있나.
마운드에서 그런 생각이 들 때 집중할 수 있는 법을 이미지 트레이닝 했다. 그런 부분이 좋은 결과가 있었던 것 같다. 나 같은 경우 이미지 트레이닝을 세밀하게 하는 편이다. 잔디 색깔부터 잠실 야구장의 냄새, 두산전이면 이승엽 감독님 염경엽 감독님을 다 그려본다. 최악의 상황, 만루에서 3볼 되는 상황까지 다 그려가면서 계속 그린다. 이미지 트레이닝한다고 팔이 아픈 건 아니니까, 1시간을 해도 되는데 5분 10분 정도면 된다. 생각날 때마다 계속 준비를 했다. ‘마운드에서 분명 이런 생각이 들 텐데’ 미리 그려보고 안 좋은 생각을 해보고 거기서 지우는 연습을 하고 계속 연구를 했다. 그래서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
시즌 초반 선발이 아닌 불펜 보직으로 출발했다. 올해 좋은 성적을 내는 데 도움이 됐나.
정말 크게 도움이 됐다. 결과가 이렇기 때문에 도움이 됐다고 하는 걸 수도 있지만 더 뒤로 가서 작년에 실패했던 것도 올 시즌을 성공적으로 잘 끝내는 기반이 됐다고 생각한다. 오늘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규정이닝 못 채운다고 내 인생의 생사가 결정되는 것도 아닌데, 보통 너무 간절하고 경쟁심 많은 선수가 욕심이 많아진다. 그러면 더 노력하게 되고 더 과도한 힘을 쓰게 된다. 그래서 최대한 힘을 빼려고 노력했다. 오히려 롱릴리프로 시작하면서 힘을 뺀 계기가 된 것 같았다. 힘을 빼면서 좋은 결과가 있었던 것 같고, 오히려 롱맨으로 가면서 염경엽 감독님이 저에게 입혀주신 새로운 야구를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올 시즌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된 시점을 꼽는다면.
5월이 내게는 중요한 키가 됐다. 5월에 감독님께서 ‘볼 스피드가 떨어져도 된다, 135km/h가 나와도 믿고 100구를 던지게 할 거다, 이제 너는 책임 투구 수가 90구에서 100구고 5이닝 이상이다’라고 하셨다. 지금까지 야구하면서 처음 듣는 얘기였다. 감독님이 내게 투구 수를 부여했고 이닝을 부여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깨달음을 얻지 않았나. 내가 어떻게 던져도 감독님이 믿고 맡기시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 더 다른 시도를 해보려고 했고, 절실함보다는 조금 더 힘을 빼고 던질 수 있는 시기가 됐던 것 같다. 그전과 다른 느낌이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그때가 가장 키포인트였던 것 같다.
그동안 두산 상대로 약했는데 오늘 잘 던져서 승리를 거뒀다.
지금까지 야구하면서 두산에 수도 없이 맞았다. 수없이 점수를 줬고 패전투수가 됐고, 매번 나갈 때마다 언젠가는 꼭 이기고 싶은 팀이었다. 그래서 항상 최선을 다했지만 거기에 못 미치는 내용이 아쉬웠는데, 오늘 이렇게 최종적으로 승리해서 기분이 좋다.
팀도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했고 트로피도 들어 올렸다. 소감이 어떤가.
많이 무겁더라. (웃음) 29년 만이고 내가 어릴 때인 2002년에도 한국시리즈에서 떨어졌었다. 구단에서 투수 조장이라고 배려해주셔서 같이 들어보게 됐는데, 구단에도 감사하고 팀원들에게도 감사하다. 정말 그것만으로도 이미 성공한 것 같다. 2002년 거실에서 한국시리즈 지는 걸 보고 많이 울었는데, 이렇게 한국시리즈에 올라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성공이라 생각한다. 물론 정규시즌 우승도 대단하지만 마지막 한국시리즈가 남았기 때문에 아직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될 것 같다.
한국시리즈 준비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많은 이미지 트레이닝이 필요할 것 같다. 많은 날씨까지도 생각해서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또 내가 생각한 대로 안 될 수도 있고, 더 욕심부리다 보면 과도한 힘을 쓰게 되기 때문에 조금 더 힘을 빼고 던질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이천에서 코치님 감독님과 회의하고 상의하면서 잘 준비하겠다.
한국시리즈 마운드에 서는 상상을 하면 어떤 느낌인가.
그것도 똑같은 18.44m에서 던지는 공인데 한국시리즈라고 다른 생각들이 입혀지면 도움이 안 될 것 같다. 내가 한국시리즈를 경험해보진 않았지만, 최대한 같은 마음으로 같은 거리에서 같은 선수를 상대하는 거다. 물론 내가 긴장을 안 해도 몸이 알아서 반응하겠지만, 정신까지 긴장하면 더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전 포스트시즌에서는 투구 내용이 좋지 못해 아쉬웠을 것 같다. 만회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나.
같은 얘기의 반복인데, 결론은 단순하다. 그거를 내가 만회해야지, 퀄리티 스타트 해야지, 5이닝 던져야지 해도 뜻한 바가 이뤄지지 않으면 마운드에서 다른 생각이 들 거고 좌절을 맛볼 거다. 결국 내가 지금까지 실패한 것도 그걸로 인해서고. 그래서 감독님이 내려오라고 하실 때까지, 내용에 신경 쓰지 않고 전력투구하는 게 가장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다.
한국시리즈 대비 캠프 전까지 사흘 휴식이 주어진다. 어떻게 보낼 생각인지.
일단 오늘 하루는 좀 푹 쉬고 싶다. 내일부터 리커버리를 한다. 너무 ‘바로 운동하겠다’ 이런 것보다는 생각 정리도 하고, 가족들이랑 맛있는 것도 먹고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