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춘추]
“‘이기흥 회장이 또 시작이구나!’ 생각했다.”
최근 '대(對) 문화체육관광부 투쟁 전면'에 나선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측 움직임을 지켜본 체육 행정가 A씨의 말이다. 이 회장은 최근 문체부를 상대로 전면전을 선포했다.
12월 초 스위스 로잔 국외연락사무소 건립 문제로 시작된 문체부와 이 회장의 마찰은 '정치인의 체육회장 출마를 원천 봉쇄'하려는 목적의 체육회 정관개정을 둘러싼 갈등으로 이어졌다.
급기야 20일엔 한국 스포츠 정책을 총괄 조정하는 민관 합동 기구인 국가스포츠정책위원회(이하 정책위) 첫 회의에 이 회장이 불참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덕수 국무총리와 국가대표 선수 출신 이에리사 전 태릉선수촌장이 공동위원장을 맡은 정책위는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첫 회의를 열고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갔다. 이 회장이 이날 회의에 불참한 건 대한체육회가 추천한 인사들이 정책위 민간위원에서 제외된 데 항의하는 의미로 풀이됐다.
이 회장은 회의에 참석하는 대신 체육회와 산하단체를 움직여 문체뷰 규탄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 문체부 사무관은 “정책위 첫 회의날인 20일에 맞춰 성명서를 발표했다. 정책위 활동에 재를 뿌리겠다는 의도를 명확히 한 것”으로 해석했다.
대한체육회, 82개 회원종목단체, 17개 회원 시‧도체육회, 228개 시‧군‧구체육회 등은 ‘대한민국 체육단체 일동’이란 이름으로 내놓은 성명에서 “문체부의 일방적인 업무추진에 강한 유감을 표한다”면서 “(문체부는) 체육인을 대표하는 체육단체와의 협의 없이 (정책위를) 독단적으로 구성하여 민간위원 참여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 이러한 인사들이 원천적으로 배제된 것은 체육계 원로들의 의사를 무시한 처사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려 7년전 일인 ‘국정농단 사건’까지 거론하며 문체부의 행위가 심각한 ‘업무 방해’라고 맹비난한 성명은 정책위 전면 재검토 요구로 이어졌다. 이어 정책위 대신 체육회가 주도해 ‘국가스포츠위원회’를 설립하겠다고 운을 띄운 뒤, 2024년 1월 16일 열리는 체육인회에서 대대적으로 문체부를 규탄하겠다는 위협으로 마무리됐다.
대한체육회가 앞장서자 26일엔 국가대표지도자협의회, 직장운동경기부지도자협의회, 종목별 학교운동부지도자, 지역별 생활체육지도자 등이 이름을 올린 ‘대한민국 체육인 일동’의 성명이 나왔다.
먼저 나온 대한체육회 성명에 동조의 뜻을 표한 이들은 최근 여론의 뭇매를 맞은 해병대 캠프까지 적극 옹호한 뒤, 유인촌 문체부 장관의 사과를 요구했다. 이어 ‘장관 퇴진 운동’까지 언급하며 실력행사 의지를 드러냈다.

“대 정부 투사 캐릭터 구축” 이기흥 회장의 정치적 노림수?
이기흥 회장과 이른바 ‘체육인’들의 투쟁을 실제 현장에서 뛰는 체육인과 체육 관계자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선수 출신으로 체육계 개혁 운동에 참여해온 B씨는 “한 마디로 서글프다”고 했다.
“체육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기흥 회장이나 자칭 ‘체육인 일동’이란 사람들의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 나 뿐만 아니라 주변의 젊은 체육인 대부분이 비슷한 생각이다. 저분들이 무슨 근거로 ‘체육인 일동’을 자처하는지 모르겠다. 실제로는 이기흥 회장 친위세력이라고 봐야 하지 않나.” B씨의 생각이다.
스포츠인권 전문가 C씨도 “성명서에서 제일 불편했던 대목은 ‘체육인 일동’이란 표현이었다”면서 “그분들은 자기들이 체육계를 대표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실제 많은 체육인들의 생각은 다를 것”이라고 지적했다. 목소리 큰 소수의 주장이 과잉대표되고 있다는 의견이다.
지방 체육회 고위 관계자는 “대한체육회 성명서가 너무 나갔다. 과거 국정농단 사태 얘기까지 언급했던데, 그렇다면 윤석열 정부가 국정농단을 일삼던 박근혜 정부와 똑같은 정권이란 소리냐. 야당이나 할 소릴 대한체육회가 해서 놀란 사람이 많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정농단 당시 사건 관련 문체부 책임자들은 다 처벌받고 직위해제되지 않았나. 사건 이후 문체부는 반성과 자정 과정을 거쳤다. 같은 논리로 따지면 대한체육회는 고 최숙현 선수 사망 사건을 비롯해 온갖 사건사고와 부정부패가 터진 곳이다. 그것도 전부 이기흥 회장 임기 동안 터진 일 아닌가. 이 회장의 논리라면 대한체육회는 한국 체육을 책임질 자격이 없는 거다. 대한체육회가 그 사건들 이후 무슨 변화와 노력을 했는지 이 회장 본인이 제일 잘 알거라고 본다.”
이번 대 문체부 투쟁이 체육회장 3선 도전을 앞둔 이 회장의 정치적 노림수라는 분석도 있다. 행정가 A씨는 “내부 결속을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드는 건 오래된 정치 수법이다. 이 회장은 매번 체육회장 선거 때마다 문체부와 각을 세우고 투쟁하는 이미지로 승부를 걸었다”며 “정부 상대로 투쟁하는 회장, 체육인들을 위해 싸우는 전투력 있는 지도자 캐릭터를 구축해서 내년 선거 때까지 끌고 가려는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를 내놨다.
“여러 소식을 듣고 이기흥 회장이 또 시작이구나. 벌써 다음번 회장선거 시기가 다가오는구나 싶었다.” A씨의 말이다.
개혁파 체육인 B씨는 “체육회 내부에서 친 이기흥 세력을 줄세우고 과시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본다”며 “이번 사태만 봐도 이 회장이 나서자 온갖 산하 체육단체가 줄지어 문체부 공격에 동참하지 않았나. 해병대 캠프 건도 여론의 비판엔 아랑곳없이 온갖 종목단체, 지방 체육회가 따라 나섰다. 체육회 내에 이렇다할 '이기흥 대항마'가 없는 상황이다보니 체육인들이 벌써부터 회장을 향한 줄서기와 충성 경쟁에 여념이 없다”고 비판했다.
2024년 총선을 앞둔 정부와 정치권이 결국엔 체육회 요구에 굴복할 것이라는 계산도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체육회는 2024년 1월 16일 체육인 대회를 사실상 문체부 규탄 집회로 삼을 예정이다. 4월 10일 국회의원 선거를 석 달 앞둔 시점에서 정부와 여당이 체육인들을 적으로 돌리긴 어려울 거란 계산이다.
체육단체에서 일하는 D씨는 “총선을 코앞에 두고 정부 상대로 체육인 세를 과시해서 원하는 바를 관철하려는 의도일 것”이라며 “문체부로서는 체육회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체육회와 계속 각을 세우는 것도 부담일 거다. 정치인보다 더 ‘정치질’에 능한 이기흥 회장다운 승부수”라고 평가했다.
덧붙여 D 씨는 "하지만, 대통령 선거면 모를까 지역 일꾼을 뽑는 총선에선 체육인들의 대정부 투쟁 선언이 총선 결과엔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한다"며 "총선을 앞두고 체육회를 달래야 한다는 식의 '친 대한체육회 언론' 나팔에 아예 관심을 줘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해병대 캠프는 극찬하고 스포츠혁신위는 비난, 이런 ‘체육인들’에게 한국 체육 미래를 맡길 수 있나
취재에 응한 체육인 사이에선 정책위 구성, 로잔 사무소 건립 등 주요 쟁점에 관한 이기흥 회장과 대한체육회 주장에 수긍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많다.
이 회장과 대한체육회는 성명에서 “체육단체의 의사를 대표하지 못하는 인사들이 (정책위) 민간위원으로 위촉됐다”고 주장했다. 이 회장을 지지하는 ‘체육인’들도 성명을 통해 “(정책위의) 민간위원을 체육 분야의 대표성을 보유한 인사로 인정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실제 정책위 민간위원 구성을 살펴보면 체육회의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체육 행정가 A씨는 “민간위원 9명 가운데 이기흥 회장, 정진완 장애인체육회장 등 당연직 3명을 제외한 나머지 6명은 체육계 다양한 전문가들로 구성됐다”며 “엘리트 선수 출신이자 행정가인 KBO 허구연 총재, 윤석열 대통령 선거캠프에서 체육정책을 만드는 데 참여한 교수, 체육과학연구원 출신 교수, 국가대표 메달리스트 출신 교수 2명이 정책위에 참여한다. 과연 이분들이 체육과 관계가 없거나 체육 분야 대표성이 떨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체육인권 전문가인 C씨는 “개인적으로 현재 민간위원 구성도 100%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체육회 생각은 자기들이 원하는 민간위원을 심어놓고 체육정책은 물론 문체부까지 마음대로 좌우해보겠다는 것 같은데, 현재의 체육회는 그 정도 신뢰를 줄 만한 단체가 아니다. 문체부가 체육회 의도에 따라줄 이유가 없다”고 일갈했다.
체육단체에서 일하는 D씨 역시 “체육회에서 ‘왜 우리가 추천한 인사를 배제했나’고 따지기 전에 과연 자신들이 추천한 인사가 국가 체육 정책의 미래를 논의하는 데 적합했는지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고 꼬집었다.
이어 D씨는 “국가스포츠 정책위원회의 취지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체육 정책도 오락가락했던 시행착오에서 벗어나, 국가 차원의 큰 그림을 그려놓고 일관된 방향성으로 체육 정책을 추진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조직”이라며 “정책위 활동은 경쟁과 성적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스포츠 인권과 학생, 국민들의 ‘체육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이는 현재 대한체육회가 추구하는 방향과는 정반대”라고 지적했다.
실제 이기흥 회장과 대한체육회는 구시대적 해병대 캠프를 주도하는 등 한국 체육의 역주행에 앞장선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런 행태를 유인촌 장관이 비판하자 친 이기흥 체육인들은 26일 발표한 성명서에서 “무책임한 발언”이라며 “각 종목단체는 이미 파리올림픽을 대비하여 대한체육회의 특별지원TF와 함께 종목별로 맞춤형‧과학적 훈련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도전’과 ‘열정’을 추구하는 해병대 정신을 체험해 보고자 함이 동 행사의 목적인데, 이것이 구시대적이라는 것인가?”라고 발끈했다. 해병대 훈련을 향한 전문가들의 우려와 비난 여론엔 눈을 감고 귀를 막은 듯한 반응이다.
이와 관련해 행정가 A씨는 “대한체육회에선 해병대 캠프의 명분으로 파리올림픽 대비 정신력 강화를 들었는데, 실제 해병대 훈련에 동원된 선수 가운데 파리에 갈 선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며 “체육회에서 관계자, 선수를 동원하라고 지시하니 부랴부랴 반강제로 차출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해병대 훈련인가. 제정신인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성적지상주의 엘리트 체육 지속 불가…이기흥 선거 운동에 체육계 에너지 낭비할 때 아냐”
체육계 개혁 인사인 B씨는 “지금은 한국 체육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중요한 시기”라며 “체육계가 하나로 힘을 합쳐 큰 방향을 정하고 미래를 준비해도 시간이 모자라다. 대한체육회가 문체부를 상대로 전면전을 선포할 때가 아니다”라고 했다.
B씨는 “급격한 인구감소와 환경 변화로 지금같은 방식의 엘리트 체육은 더는 지속불가능한 상황이다. 학생선수의 학업병행과 일반 학생들의 운동부 활동 등으로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앞으로 10년 뒤엔 선수가 없어서 엘리트 체육까지 무너지는 때가 올 수도 있다. 정책을 만들고 추진하는 컨트롤 타워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면서 “문체부가 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이번 사태만 놓고 보면 이기흥 회장과 체육회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본다”는 의견을 내놨다.
체육단체 소속 D씨 역시 “지금은 이기흥 회장 선거운동으로 체육계의 에너지를 낭비할 때가 아니다”라면서 “문체부 정책이나 추진 방식에 불만이 있을 수 있지만 지금처럼 전면전을 하는 방식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밝혔다.
D씨는 “체육 발전이나 선수 지도엔 관심없고 이기흥 회장에 붙어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체육인을 자처하며 한국 체육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이들 자칭 ‘체육인’이 아니라 정말로 일선에서 노력하고 공부하는 진짜 체육인들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지도자 E씨는 “안타깝게도 현재 체육회의 세력구도와 정관상으로 이기흥 회장의 재선을 막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며 “투표인단 구성으로 볼 때 누가 나와도 이기흥 회장의 상대가 되기 어렵다. 최태원 SK 회장이 출마하면 모를까, 나와봐야 떨어질 게 뻔한데 괜찮은 후보 중에 누가 출마하려고 하겠나. 사정이 이렇다 보니 체육인들 중엔 벌써부터 이 회장에게 잘 보이려고 줄서기가 한창”이라고 자조했다.
한국 체육의 발전과 미래를 고민하는 진짜 체육인들에게 ‘봄’은 아직 먼 얘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