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춘추=인천]
SSG 랜더스의 ‘천하장사’ 최정이 개인 통산 467홈런 고지에 올라섰다. 오직 한 사람만이 밟았던 영역에 마침내 발을 디뎠다.
이전에도 수없이 봐왔던 장면이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 최정의 스윙과 찰나의 정적, 뒤이어 터지는 큰 함성은 467번째 보는데도 질리지 않는다. 공이 방망이를 떠나는 순간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누구나 직감할 수 있는, 전형적인 최정의 홈런이 나왔다.
최정은 4월 16일 인천 SSG 랜더스필드에서 열린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 9회말 2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홈런을 기록했다. 스코어 3대 4 열세, 승리확률 5.7%로 패배가 확정된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었다. 마운드엔 올 시즌 단 한 번도 주자를 홈에 들여보내지 않은 특급 마무리 정해영이 있었다.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과 최고의 투수와 상대하는 악조건 속에서 최정은 스윙 한 번으로 팀을 구했고, 위대한 기록을 만들었다.
“동점만 만들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경기 후 흠뻑 젖은 채로 나타난 최정이 취재진에게 들려준 말이다. “2아웃에 동점 홈런을 쳤다는 게 기분이 좋아요.”
최정의 홈런으로 랜더스의 승리확률은 54.3%로 10개 가까이 뛰어올랐다. 기예르모 에레디아의 안타가 이어졌고, 최정의 홈런왕 경쟁자 한유섬이 우측 담장을 넘어가는 끝내기 투런포를 날렸다. 기왕이면 팀이 이기는 경기에서 기록을 세우고 싶다던 최정의 바람이 이루어졌다.

“최정 홈런에 소름 돋았다…최정이 왜 최정인지 보여준 홈런”
이날은 SSG 랜더스에 여러 대기록이 걸린 경기였다. 에이스 김광현은 개인 통산 162승이자 KBO리그 역대 최다승 단독 3위 자리에 도전했고, 추신수는 한미 통산 2,000안타에 안타 1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무엇보다 최정의 홈런 신기록 달성 여부에 관심이 쏠렸다. 최정은 14일 수원 KT 위즈전 마지막 두 타석에서 홈런을 때려내 단숨에 이승엽 두산 베어스 감독의 기록에 1개 차로 접근했다. 이 감독은 삼성 라이온즈 시절인 2017년 467홈런을 치고 유니폼을 벗었다. 자신의 은퇴경기에서 466호, 467호 홈런을 때려낸 이 감독의 기록은 오랫동안 전설과 신화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새로운 신화의 탄생을 앞두고 SSG 랜더스 구단도 만반의 준비를 했다. SSG는 468번째?홈런공을?잡은 관중에게 라이브존 시즌권 2매와 최정 친필 사인 배트, 선수단 사인 대형 로고볼, 2025 스프링캠프 투어 참여권 2매를 선물로 준비했다. 모기업에서도 마트 온라인 상품권 140만 원, 음료 1년 무료 이용권, 호텔 75만 원 숙박권을 내놨다. 여기에 홈런이 나온 당일 관중 468명에게 증정하는 계열사 햄버거 쿠폰도 있다. KBO도 기록 달성에 대비해 최정 타석에선 따로 표시한 경기구를 사용했다.
“홈 경기라 그런지 이상하게 첫 타석부터 부담되더라고요.” 최정의 말이다. “수원에서 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타석에서 집중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욕심도 나고, 어이없는 공에 배트가 나가기도 했어요.”
부담이 안 되려야 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최정은 “경기 전 (기록 달성 시) 세리머니를 어떻게 하는지 브리핑해주는데 거기서부터 부담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첫 타석에 나갔는데 공을 교체하더라고요. 처음엔 ‘뭐지?’ 했는데 두 번째 타석에서도 바꾸기에, 홈런볼 때문에 그렇다는 걸 알았죠. 거기서 또 한 번 부담이 됐습니다. 거기에 KIA 포수 김태군이 저한테 ‘온 국민이 홈런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더라고요. 그것도 부담됐어요.”
대기록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최정은 첫 타석에서 내야 뜬공으로, 두 번째 타석에서 우익수 뜬공으로 물러났다. 세 번째 타석에선 KIA 장현식의 슬라이더에 헛스윙 삼진을 당했다.
“내 존을 지키면서 냉철하게 타격해야 했습니다. 장현식과 상대할 땐 유리한 볼카운트에서 저도 모르게 욕심이 나서 (승부를) 걸었어요. 그런데 유인구에 헛스윙했고, 거기서부터 갑자기 영점이 사라졌습니다. 투수밖에 안 보이더군요. 그냥 공만 보고 (배트를) 돌렸는데 유인구에 삼진 당했죠. ‘안돼, 이러면 안 돼’ 생각하면서 수비하러 나갔습니다.”
7회 네 번째 타석에서 나온 좌전안타가 터닝포인트였다. 최정은 “그 타석도 솔직히 좀 ‘쫄렸었다.’ 계속 결과가 나오지 않다 보니 생각이 많아진 상황이었는데, 거기서 안타가 나오면서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했다. “오늘 안타 하나 쳤으니까 오케이, 이런 느낌으로 만족한다는 마인드를 갖고 계속 플레이했습니다.”
9회말 최정의 마지막 타석은 극적으로 성사됐다. 8회말 SSG 공격에서 두 명의 주자가 출루하면서 9회 2아웃 최정까지 기회가 돌아왔다.
“9회에 타석이 돌아오겠다고 생각했죠. 9회 KIA 마무리 정해영의 공을 치는 상상을 했습니다. 수비하러 나가서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정해영의 투구는 3구 연속 높게 벗어나는 볼이 됐다. 최정은 “3볼엔 치지 않으려 했다”고 밝혔다. “다음 타자 기예르모 에레디아가 워낙 잘 치잖아요. 주자만 나가면 동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기다렸습니다. 볼넷으로 나가고 싶었어요.”
그러나 정해영은 승부를 피할 생각이 없었다. 4구째 한복판에 빠른볼 스트라이크를 꽂았고, 5구째에도 존 높은 곳을 향해 빠른 볼을 던졌다. 순간 최정이 한 번의 스윙으로 모든 것을 바꿨다.
“찬스였으면 부담스러워서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2아웃 상황인 게 오히려 마음이 편했죠. 게다가 볼카운트도 유리한 카운트라서, 정해영 투수가 자신 있는 공을 던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 타이밍을 맞춰서 친 타구가 뜨면서 홈런이 된 것 같습니다.”
최정은 “3-1 카운트에서 솔직히 고민됐다”고 털어놨다. “그래도 정해영이 워낙 공이 좋은 투수니까 무조건 승부를 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4구째 스트라이크를 던지기에 ‘그래, 팀의 마무리 투수면 이 정도는 돼야지’라고 생각했죠. 빠른 볼로 승부할 것 같았어요. ‘에이 모르겠다’하고 과감하게 방망이를 돌린 게 잘 맞았습니다.”
“소름이 돋았습니다.” 경기 후 이숭용 SSG 감독이 들려준 소감이다. 이 감독은 “최정은 역시 최정이다. 왜 최정이 대단한 선수임을 보여준 장면”이라고 홈런 장면을 묘사했다.
최정은 “치는 순간 그냥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냥 안타만 쳤어도 기분이 좋았을 거다. 경기 전 전력분석을 하며 영상을 봤는데, 정해영의 공이 작년보다 엄청 좋아진 걸 알고 있었다. 치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면서 “홈런이 된 것도 기분 좋지만, 안타만 됐어도 기분이 엄청 좋았을 것 같다”고 상대 투수를 높였다.
네 번째 타석까지 못 친 홈런을 가장 중요한 마지막 타석에서 때려낸 건 최정이 어떤 선수인지 보여준다. 이숭용 감독은 “최정은 참 재미있는 선수이고 대단한 선수”라며 “보통 첫 타석에서 타이밍이 안 맞으면 두 번째, 세 번째 타석에서 데미지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최정은 첫 타석에서 타이밍이 전혀 안 맞더라도 다음 타석에서 바로잡는다. 이렇게 바로 타이밍을 맞춘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경외감을 표했다.
“예전에 타격코치를 하면서 여러 선수와 함께했지만, 최정 같은 선수는 본 적이 없습니다. 바로바로 한 타석 혹은 공 하나에 (타이밍을) 찾아가니까요. 정말 대단하죠.”
이날도 최정은 마지막 타석에서 홈런으로 앞의 네 타석을 반전시켰다. 최정이 베이스를 도는 동안 뱃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고, 전광판은 ‘467’이란 숫자로 채워졌다. 올 시즌 9호이자 21경기 만에 쏘아 올린 이 홈런으로 지난 42년간 홈런왕으로 군림한 이승엽의 시대에 마침표가 찍혔다.
“정말 영광스럽습니다. 제가 뭐라고, 이렇게 관심을 받고 이슈가 된다는 것 자체가 기분 좋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최정은 “이승엽 감독님을 넘어섰다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겸손을 보였다. 20년간 KBO리그에서만 뛴 자신과 달리 이 감독은 2004년부터 2011년까지 8년간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했다는 게 이유다.
그는 “저도 해외에 다녀와서 이렇게 (기록을) 세웠으면 뭔가 떳떳할 거다”라며 “이승엽 감독님을 넘어섰다고 해도 그게 (정말) 넘어선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광스럽지만, 그래서 오히려 덤덤한 것 같다”고 차분하게 말했다.

신기록까지 -1, “빨리 이 상황이 끝났으면 좋겠어요”
홈런왕 최정의 전설은 프로 입단 2년째인 2006년부터 시작됐다. 그해 최정은 12차례 담장을 넘기며 소년장사의 탄생을 알렸다. 그러나 최정은 프로 데뷔 초기엔 자신이 홈런타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홈런이 잘 나오기 시작한 건 2012년부터입니다. 그때부터 공이 뜨기 시작하면서 멀리 나가게 됐어요.” 최정의 말이다. “당시 미겔 카브레라를 따라 한다고 스윙 궤도를 바꿨어요. 가볍게 면으로 친다는 느낌으로 친 게 딱 하나 잘 맞았는데, 거기서 영감을 얻었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 느낌을 유지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최정이 영감을 얻은 순간은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와의 경기, 상대 투수는 강윤구(강리호)였다. “그 당시엔 밀어쳐서 넘긴다는 건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센터로 홈런을 때렸어요. 그전까지 제가 쳐보지 못한 느낌으로 홈런이 돼서, 이거다 싶었죠. 그때부터 타구가 뜨면서 멀리 나가게 됐습니다.” 강리호는 최정에게 홈런을 맞은 263명의 투수 가운데 하나다. 통산 최정 상대 피홈런은 5개(7위)에 해당한다.
홈런치는 법을 깨달은 최정은 빠른 속도로 홈런의 탑을 쌓아올렸다. 통산 100홈런까지는 704경기가 필요했지만 200홈런을 치는 데는 1,171경기밖에 걸리지 않았다. 300홈런은 1468경기 만에 나왔고, 400홈런은 1,907경기에서 달성했다.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기록한 18시즌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은 오직 최정만이 갖고 있는 기록이다.
“나이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올해로 36세 시즌을 맞은 최정의 말이다. “나이 들었다는 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조금만 (운동)하면 근육이 올라오고, 타이트해지는 걸 느낍니다. 그래도 조금만 관리하면 계속 무난하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SK 시절부터 (오래 야구한) 선배님들을 많이 봤으니까요. 처지지 않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이제 최정은 홈런 하나만 더하면 이승엽을 넘어 역대 최다홈런 단독 1위가 된다. 그는 “이 기록을 깬다기보다, 빨리 이 상황이 끝났으면 좋겠다”면서 웃어 보였다. “제일 걱정되는 건 팀이 지고 있는데 홈런이 나와서 세리머니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팀에 미안하잖아요. 그 상황만 안 나오면 좋겠어요.”
어렵게 467홈런을 달성하면서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최정은 “여기서 (선수생활) 끝날 때까지 홈런을 하나도 못 치면 그건 사고 아닌가”란 말로 웃음을 자아냈다. “빨리 치려고만 안 하면 됩니다. ‘언젠가 하나는 치지 않을까’란 생각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어요. 내일(17일) 첫 타석에 나오면 좋긴 하겠네요.”
최정은 지나간 일을 오래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편이다. 자신의 경기 영상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보지 않는다. 빠르게 잊어버리는 망각 능력은 20년 동안 최정이 정상을 지킨 비결 가운데 하나다. 그는 “경기 후 영상이 올라오면 딱 한 번만 봅니다. 계속 기억하기보다 딱 그 기분을 느끼고 끝내려는 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마음껏 즐기고 오랫동안 기억에 담아둘 생각이다. “오늘 경기는 이어서 볼 생각입니다. 한유섬이도 멋있게 홈런을 쳤잖아요. 하이라이트를 다 볼 생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