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춘추=수원]
가슴 깊숙이 잠들어 있던 오랜 꿈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KT 위즈의 '천재' 강백호가 글로벌 에이전시와 손잡고 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진출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하고 나섰다.
강백호는 지난 4월 글로벌 스포츠 에이전시인 파라곤 스포츠 인터내셔널과 계약을 체결했다. 이 사실이 13일 해당 에이전시의 SNS를 통해 뒤늦게 공개되면서 올 시즌 후 프리에이전트(FA) 자격을 얻는 강백호의 MLB 진출이 다시 화두로 떠올랐다.
"솔직히 아직 정해진 건 없다. 에이전시와 계약은 하나의 옵션일 뿐이다." 우천취소된 13일 LG-KT전을 앞두고 취재진과 만난 강백호는 갑작스러운 관심에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신중하게 입장을 밝혔다.
강백호에 대한 메이저리그의 관심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서울고등학교 2학년 때인 10년 전엔 보스턴, 볼티모어, 텍사스 등 10개 이상의 메이저리그 팀 스카우트가 야구장을 찾아 그를 관찰했다. 당시 한 NL 동부 스카우트는 강백호를 "아주 뛰어난 원석"이라 평했고, AL 중부 스카우트는 "고교 시절 박병호가 떠오르는 힘이 뛰어난 타자"라고 극찬했다.
하지만 강백호는 2018 신인 드래프트 1순위로 KT에 입단하며 한국야구를 선택했다. 이후 데뷔 첫해 타율 0.290에 29홈런 84타점의 믿기 힘든 활약으로 신인왕을 거머쥐었고, 8시즌 통산 타율 0.304에 131홈런 543타점을 기록하며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성장했다.

강백호는 "감사하게도 에이전시 쪽에서 먼저 큰 관심을 가져줬다. 다른 곳에서도 연락이 왔었는데, (파라곤이) 가장 적극적이었다"면서 "솔직히 아시아 선수 한 명 보려고 오너가 움직이기에는 파라곤은 결코 작은 회사가 아니다. 열정과 진심을 많이 느꼈다"고 설명했다.
계약 사실이 공개된 타이밍도 흥미롭다. 강백호는 "원래 계약은 이미 4월에 체결했었다. 올해 시즌 중간에 (내가) 다쳤다 보니까 시기가 밀린 것 같다"며 "사실 이렇게까지 뜨거운 관심을 받을 줄은 몰랐다. 솔직히 공개가 되는 줄도 몰랐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실제로 강백호는 올 시즌 부상과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최근 들어 눈에 띄는 반등세를 보이고 있다. 8월 들어 10경기에서 타율 0.359(39타수 14안타) 3홈런 12타점을 기록하며 예전의 강타자다운 모습을 되찾았다. 마침 타격감이 살아나서 맹활약하는 시기에 소식이 알려진 것은 우연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올 시즌 후 강백호 앞에는 여러 선택지가 놓여 있다. KT 잔류, 다른 KBO리그 구단과의 계약, 그리고 메이저리그 진출이다. 소속팀 잔류나 다른 팀 이적이란 좁은 선택에 얽매이지 않고 또다른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건 선수 입장에서 나쁠 게 없다.
이와 관련해 강백호는 "4월 (계약) 당시에도 '새로운 길이 하나 더 생기는구나' 정도로 생각했지, MLB 진출을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좋은 조건의 에이전시 제안이 와서 계약한 것이지, 미국에 가겠다고 선언한 건 아니다"라며 "미국 에이전시를 선임한다고 해서 무조건 국외로 나간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여러 선택지 중에 하나"라고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군 복무 의무까지 해결한 상황에서 해외 진출의 걸림돌은 대부분 사라진 상태다. 여기에 포스팅이 아닌 FA 신분이라 조건에 관계없이 본인이 미국행을 선호하면 얼마든지 계약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강백호의 메이저리그 진출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일까. 일단 강백호의 타격 능력은 누구나 인정한다. 강력한 스윙과 타고난 힘에서 나오는 타구속도, 배럴비율 등은 빅리그 타자들과 비교해도 손색없다. 한 메이저리그 구단 스카우트도 "타격 능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평가했다.
다만 수비 포지션이 없는 게 약점이다. 국내에서도 우익수부터 1루수, 포수까지 여러 포지션을 오갔지만 확실한 자기 포지션을 만들지 못했다. 앞서 언급한 스카우트는 "김하성과 김혜성은 다양한 포지션이 가능하고 이정후도 중견수라 타격이 부진해도 수비에서 기여할 수 있는 선수들이다. 반면 강백호는 코너 외야, 1루수, 지명타자로 제한적"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메이저리그 1루수나 코너 외야수들의 평균적인 타격 스탯과 비교해 강백호가 그 정도의 공격력을 보여줄 거란 확신이 있어야 실제 계약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팀 입장에서는 일종의 베팅이다. 1루수나 코너 외야수로 보고 데려가기에는 모험을 걸어야 하는 면이 있다"고 진단했다.
이런 한계에도 강백호에게 러브콜을 보낼 메이저리그 구단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앞서 언급한 스카우트도 "계약 제안이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구단마다 평가 기준에 차이가 있다. 구단에 따라 예상을 뛰어넘는 금액을 제안하는 팀도 나올 수 있다"고 전망했다.
여러 관계자들은 최소한 단년 계약이나 스플릿 계약은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강백호를 특별히 높게 평가하는 구단이 등장한다면 더 좋은 조건의 계약도 기대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남은 시즌 강백호의 활약상과 미국 시장 상황이 최종 결과를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조건과 상관없이 강백호에게 새로운 자극과 환경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 국내 에이전트는 "강백호 선수 개인적으로는 조건을 떠나 국외 무대에서 뛰면서 분위기 전환과 새로운 도전을 해보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고 분석했다.
이 에이전트는 "가진 재능에 비해 다소 정체된 느낌도 있었다. 자유로운 미국 야구에서 활약하면 족쇄를 풀고 재능이 더 만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며 "그간 국내에서 받았던 여러 부담감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야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강백호에게 다행인 것은 시즌 막판으로 향해가는 최근 타격 컨디션이 최절정이라는 점이다. 지난주 열린 한화전에선 최고 마무리 김서현을 상대로 홈런성 3타점 적시타를 치고, 9회 역전 홈런을 날리는 등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최근 컨디션이 정말 좋다. 지난 몇 년 통틀어 제일 매서운 것 같다"며 강백호는 현재 상태에 자신감을 보였다. "치는 느낌이 아예 다르고, 타석에서 공 보이는 것도 다르다"며 완전히 달라진 타격감을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화의 강력한 투수진을 상대로 맹타를 휘두른 데 대해서도 "그만큼 내 컨디션이 좋았던 덕분"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직 시즌이 한창인 만큼 미래보다는 현재에 집중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는 "일단 올해는 안 다치고 지금 컨디션을 유지하는 게 최우선 목표다. 지금은 계약보다는 지난주에 잘한 걸로 신나있어서 (나중 일에는) 큰 관심이 없다"며 "아직 정해진 건 없다. (계약 문제에) 치우치기보다 현재에 조금 더 집중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도전의 가능성은 열어뒀다. 강백호는 "긍정적으로 봤을 때는 향후 좋은 기회가 온다면 (메이저리그에) 도전할 생각도 충분히 있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면서 "이랬을 때 부진하면 리스크가 더 큰 편이라 걱정도 되지만, 어쨌든 이미 벌어진 일이다. (지금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힘줘 말했다.
고교 시절부터 가슴에 품어온 메이저리그라는 꿈이 10년이 지난 올 시즌 뒤 과연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잠들어 있던 꿈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 지금, 강백호는 야구인생에서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그 길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강백호는 "저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웃으며 말한 뒤, 클럽하우스 쪽으로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