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춘추]
'차라리 AI가 감독하는 게 낫겠다!'는 야구팬들의 바람이 이뤄진다. 미국 독립리그 파이어니어리그 소속 오클랜드 볼러스가 7일(한국시간) 경기에서 인공지능(AI)에게 감독 역할을 맡긴다고 6일 발표했다. 프로스포츠 정규시즌에서 AI가 팀을 지휘하는 건 이번이 사상 최초다. 한 경기 한정이긴 하지만, 야구 역사에 새로운 페이지를 쓰게 됐다.
애런 마일스 감독은 이날 하루만큼은 더그아웃 구석에 앉아 구경꾼이 된다. AI가 선발 라인업을 짜고, 투수 교체 시점을 결정하며, 대타를 언제 쓸지도 정한다. 수비 시프트까지 AI 몫이다. 다만 도루나 홈 스틸 같은 주루 작전은 AI가 맡지 않는다. 실시간으로 사인을 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선발투수는 기존 로테이션을 따르지만, 그 외 모든 전술적 결정은 AI 손에 달렸다.
이번 실험은 팬 감사의 날 이벤트의 일환이다. 작년엔 팬들이 앱을 통해 경기 중 결정을 내리는 이벤트를 했는데, 경기는 볼러스의 패배로 끝났다. 올해는 생성형 인공지능에게 기회를 줘보기로 했다. 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또 다른 실험인 셈이다.
로스앤젤레스 소재의 소프트웨어 회사 디스틸러리가 단 2주 만에 플랫폼을 구축했다. AP통신에 따르면 야구광들로 구성된 개발팀이 밤낮 없이 매달렸다고 한다. 실시간 경기 통계, 선수 과거 성적, 매치업 데이터, 날씨까지 모든 걸 처리하는 AI다. 안드레이 쿠디예프스키 디스틸러리 CEO는 인터뷰에서 "수백 개 통계를 보여주며 혼란만 주는 게 아니라, 정확한 결정만 제시한다"고 설명했다. "투수를 언제 바꿀지, 타순을 어떻게 조정할지만 딱 알려준다"고 했다.

물론 AI가 모든 걸 할 순 없다. 벤치로 밀려난 선수 달래기, 부진한 타자 격려하기, 기자회견 같은 건 여전히 인간 감독 몫이다. 불펜투수를 언제 워밍업시킬지 같은 미묘한 판단도 AI가 과연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야구는 숫자로만 설명되지 않는 영역이 분명 존재한다.
그래서 볼러스 구단도 이번 실험을 일회성으로 본다. 스포츠 매체 '디 애슬레틱'에 따르면 폴 프리드먼 CEO는 "AI가 감독을 완전히 대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이번 시즌 리그 최다승인 70승을 거둔 마일스 감독 자리가 위험한 건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마일스 감독도 이날 경기 중에는 AI 결정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했다. 다만 선수 안전에 문제가 생기면 개입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마일스 감독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 팀이 워낙 잘해서 AI도 내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메이저리그에서 9시즌을 뛴 그는 "AI가 감독을 대체하지는 못하겠지만, 코칭스태프에게 더 많은 도구를 줄 수는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정보가 너무 많아서 사람이 실시간으로 처리하기 어려운데, AI가 그걸 더 잘할 수도 있다"고 했다.
쿠디예프스키 CEO는 AI의 역할을 팬 경험 향상에서 찾는다. 내년부터는 AI 프로그램을 실시간으로 온라인에 공개해서 팬들이 "지금 상황에서 AI라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를 볼 수 있게 할 계획이다. "팬들이 자신만의 팀 감독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그는 말했다. 일종의 '가상 감독 체험' 서비스인 셈이다.
2주 만에 급조한 시스템이라 이날 경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AI 환각이나 야구 룰 오해로 황당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실험의 재미 중 하나다. 독립리그라서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프리드먼 CEO는 "우리는 다른 곳에서 할 수 없는 걸 시도해볼 자유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00년대 초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머니볼' 시대를 언급하며 "오클랜드는 늘 혁신의 무대였다"고 강조했다. "AI가 야구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논의를 시작하는 재미있는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볼러스는 올해 창단 2년차로, 애슬레틱스가 라스베이거스로 떠난 현재 지역 유일의 프로야구팀이다. 팬 지분 참여와 이사회 팬 대표 선출 등 혁신적 운영으로 주목받고 있다. 올 시즌 70승22패로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했다. 관중 동원력과 온라인 팬 참여도도 늘고 있다. AI 실험도 이런 혁신 전략의 연장선이다. AI 감독이라는 상상이 현실로 펼쳐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진진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