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춘추]
KBO리그 탄생의 산파 역할을 한 이용일 전 KBO 총재 직무대행이 7일 별세했다. 향년 94세. KBO는 고인의 한국 야구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KBO장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KBO장으로 치러지는 첫 장례다.
고 이용일은 1982년 국내 프로야구 창립의 주역으로 초대 KBO 사무총장을 맡아 9년간 한국 프로야구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특히 대기업 유치를 주도하고 지역연고제 도입을 강력히 주장해 현재 KBO리그의 기본 틀을 만든 설계자로 평가받는다.
1931년생으로 서울대 상대 야구부 출신인 고인은 육군 소령 전역 후 가업인 경성고무를 경영하며 야구 보급에 앞장섰다. 1957년부터 군산 지역 4개 초등학교에 야구팀을 창단한 것을 시작으로 1968년 군산남중과 군산상고에도 야구팀을 만들어 '군산야구의 대부'로 불렸다.
1979년 대한야구협회 전무이사로 중앙 무대에 진출한 고 이용일은 당시 실업연맹, 대학연맹, 고교연맹으로 분리돼 있던 야구 단체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데 성공했다. 통합 기념 이벤트로 열린 '고교야구대제전'은 첫 경기부터 만원사례를 이뤄 향후 프로야구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후 청와대의 사회 정화 운동에 휘말려 야인으로 지내던 이용일은 1981년 서울대 동기 이호헌으로부터 문화방송(MBC)이 프로야구단을 만들 계획이니 도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용일은 공을 들여 18쪽 분량의 '한국프로야구 창립계획서'를 작성했다.
계획의 핵심은 지역연고제였다. 부산의 경남고 출신은 부산 팀에, 광주의 광주제일고 출신은 광주 팀에 입단하도록 하는 시스템이었다. 청와대에서는 "지역감정을 심화시킬 수 있다"며 난색을 표했지만, 결국엔 이용일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현재의 지역연고제가 탄생했다.
1981년 12월 KBO 초대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고인은 1991년까지 재직하며 한국 프로야구의 기반을 닦았다. 6개 구단으로 시작한 프로야구가 8개 구단까지 확대될 수 있도록 내실을 다졌고, 한일 슈퍼게임 추진 등 국제교류에도 힘썼다.
사무총장 퇴임 후에도 고인의 야구계 기여는 계속됐다.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쌍방울 그룹 부회장,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쌍방울 고문을 역임했다. 이어 1997년부터 1999년까지는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주 대행을 맡아 직접 구단 운영에도 참여했다.
2009년에는 유영구 KBO 총재의 고문을 맡았고, 2011년 5월부터 8월까지는 KBO 총재 직무대행으로 다시 한번 야구계 발전에 힘을 보탰다. 2011년에는 프로야구 10구단 연고지 선정 과정에서 전북 유치위원장을 맡아 10구단 유치에 앞장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 이용일은 한국 야구뿐만 아니라 체육계 전반의 발전에도 공헌했다. 제4회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총감독(1961), 제20회 뮌헨 올림픽 한국대표단 총감독(1972), 제10회 할렘대회 국가대표팀 단장(1978), 제25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팀 단장(1978) 등을 역임했다. 1971년에는 대한민국 체육상 국민훈장을 수상했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2호실(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01)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0일 오전 8시 서울추모공원(동두천예래원)에서 치러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