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춘추=수원]
해마다 신인드래프트 철이 다가오면 전국 각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그전까지는 안 보이던 ‘강속구 사이드암’ 투수들이 여기저기서 출몰해 벌이는 스피드 경쟁이다.
원래는 130km/h 중후반 대를 던지던 고교 투수가 3학년이 돼서 갑자기 140km/h를 던지고, 140km/h을 간신히 넘기던 투수가 140km/h 후반을 찍었다고 자랑한다. 그와 함께 원래는 잠수함이던 팔각도가 옆구리로 올라가고, 옆구리에 있던 팔각도는 스리쿼터에 가까운 높이로 올라간다.
프로 스카우트들에게 조금이라도 어필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볼 스피드가 빨라야 스카우트의 눈길을 끌고, 더 높은 순위로 지명받는다는 생각이 팔각도 변화를 부른다. 언론 보도에도 가장 먼저 강조되는 게 최고구속이다 보니, 투수들은 ‘140km/h 이상 던져야 산다’는 압박을 느낀다. 그러면서 점차 원래 갖고 있던 장점을 잃고, 공만 빠른 평범한 투수가 된다.
“팔 높이, 인위적으로 올리면 안 된다” 통산 150승 레전드 잠수함의 소신

하지만 잠수함 투수의 전설, 이강철 KT 위즈 감독의 생각은 다르다. 이 감독은 볼 스피드 향상을 위한 인위적 팔높이 조정에 부정적이다. 16일 수원 경기를 앞두고 취재진과 만난 이 감독은 “팔 높이는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가야지 인위적으로 올리면 안 된다. 진짜 그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감독은 KBO가 리그 40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레전드 40인’에 9위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현재까지 발표된 20인 가운데 잠수함 투수는 이 감독이 유일하다. 양현종 이전까지 타이거즈 투수 최다승(150승)-최다탈삼진(1731삼진) 기록을 쌓았고, 역대 유일한 10년 연속 10승-100탈삼진 기록 보유자로 꾸준함을 인정받았다.
현역 시절 이 감독은 강속구 투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구속은 130km/h 후반대로 빠르지 않았지만, 대신 뛰어난 무브먼트와 디셉션을 무기로 타자들을 요리했다. 몸을 한껏 비틀어 힘을 모은 뒤, 크로스 스탠스로 던지는 투구폼은 이 감독의 트레이드마크. 타고난 유연성으로 커리어 내내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를 증명해 보인 이 감독이다.
이 감독은 “TV로 (고교야구를) 보면서 ‘왜 그러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고 의문을 표했다. 이 감독은 모 고교 잠수함 투수를 언급하며 “그 투수도 원래 팔 높이가 낮았다가 위로 올렸다. 원래 좋은 공을 던지고 있었는데 팔 높이를 올리더라”고 말했다. 해당 투수는 올해 최고구속 145km/h를 기록하며 신인드래프트 상위 지명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볼 스피드가 피칭의 전부는 아니다. 이 감독은 “팔 각도에 따라 볼의 움직임이 달라진다”면서 잠수함 투수가 스피드를 내려고 팔을 올린 높이가 “타자가 제일 치기 좋은 높이”라고 지적했다. 회전축 변화로 공의 무브먼트가 줄면서 ‘밋밋한’ 공이 되는 문제다. 이런 공은 아무리 스피드가 빨라도 타자들에게 쉬운 먹잇감이 된다.
신인 시절 이 감독이 지도한 키움 한현희가 좋은 예다. 이 감독은 “한현희도 처음 입단해서 150km/h를 던지는데 계속 맞았다”면서 “경남고 감독에게 물어보니 스피드를 내려고 고3 때 팔각도를 올렸다고 하더라”고 떠올렸다. 구속은 좀 덜 나와도 하체를 쓰면서 자연스러운 연결동작에서 던지는 공이 훨씬 위력적이다.
프로에서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통해 힘을 키우면 스피드는 자연히 향상된다. 이 감독은 “과거 김병현도 그랬다. 자연스럽게 몸이 커지고 힘이 붙으면, 프로에서 훨씬 더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다”고 밝혔다. 인위적으로 팔을 올려 스피드를 얻고 장점을 잃는 것보다는, 원래 폼과 장점을 유지하면서 구속 향상을 추구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는 지적이다.
원래 언더핸드였던 김병현의 팔각도는 나이가 들며 점점 위로 올라가 나중에는 사이드암에 가까운 형태가 됐다. 반대로 오버핸드 투수의 팔각도는 나이가 들면 점점 아래로 내려가 스리쿼터 형태가 된다. 투수가 나이가 들거나 힘이 떨어지면 팔 높이는 자연스럽게 중간 위치로 향하게 마련이다.
아직 젊고 힘 넘치는 투수들이 원래 폼을 버리고 팔 각도를 세우는 건 자연스럽지 않다. 이 감독은 “자연스럽게 내 몸이 가는 대로 던지는 게 좋다. 정말 코칭스태프나 분석파트에서 ‘아니다’라고 한다면 몰라도, 억지로 바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이 감독은 “프로에서 스카우트되려면 스피드가 빨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꼭 스피드가 아니라도 수직 무브먼트나 수평 무브먼트를 보고 뽑는다고 생각하면 어떨까”라고 제안했다. 선수와 아마추어 지도자들만 생각을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스피드를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프로 스카우트, 미디어, 야구팬들도 발상의 변화가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