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춘추]
KBO리그 무대에서 활약한 지난 7년간 이정후는 항상 인터뷰 시간이 기다려지는 선수였다. 단순히 미디어에 친절하고 인터뷰에 적극적인 선수라서가 아니다.
이정후와의 대화는 언제나 흥미진진했다. 한 방송사 관계자는 “뭘 넣어도 멋진 결과물이 나오는 마술상자 같은 선수”라고 했다. 아무리 틀에 박힌 질문에도 색다른 답을 내놓을 줄 알았다. 어제와 같은 질문이 또 나와도 매번 조금씩 새로운 대답이 나왔다. ‘열심히 하겠다’거나 ‘최선을 다하겠다’는 식의 뻔한 말은 하지 않았다. 때로는 위트있게, 혹은 진지하게 자기 생각을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했고 자신감이 넘치면서도 겸손했다.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자기편으로 만드는 이정후만의 매력이다.
곧 출간 예정인 인터뷰집 ‘긍정의 야구’에서 저자 오효주 아나운서는 “농담 섞인 표현일지라도 근거 있는 자신감이 느껴지는 그 여유로움”이라고 이정후를 묘사한다. 이어 “그는 늘 자신감에 차 있고 어떤 우려의 시선 속에서도 긍정적인 미래를 그린다. 슈퍼스타였던 아버지와의 연결고리로 인한 ‘타고남’에 대해서도 능청스럽게 대응한다”며 “실력에 대해서도, 생활에 대해서도 남들과는 다른 잣대가 (적용되지만) 사람들이 불편을 느낄 만한 선을 넘지 않는다”고 찬사를 보냈다.
12월 19일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면서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도 이정후의 인터뷰 스킬은 빛났다. 이정후는 “그동안 응원 팀이 달라서 저를 응원 안 하셨던 팬들도 이제는 많은 응원을 부탁드린다. 한국에선 아침 시간인데 멋진 플레이로 보답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해보겠다”고 10개 구단 팬 상대 영업에 나섰다. 그러면서도 “미국에서도 시간 날 때마다 홈 최종전 마지막 타석 때 팬들의 함성과 응원 영상을 계속 돌려봤다. 항상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기면서 메이저리그에서도 타석에 나서겠다. 히어로즈 출신 선수답게 잘하겠다”고 키움 팬들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영어로 준비한 자기소개, ‘핸섬?’ 질문에 일동 폭소
이런 이정후의 매력에 미국 야구계와 팬들도 벌써부터 흠뻑 빠져드는 분위기다. 16일(한국시각) 이정후의 입단 기자회견 이후 현지 매체와 SNS(소셜네트워크)에선 한국에서 온 25세 외야수를 향한 기대와 찬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미국 미디어, 팬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유쾌하고 긍정적인 첫인상을 심어준 덕분이다. 이정후 측 관계자는 “기자회견 현장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고 당시 반응을 전했다.
이날 이정후는 수십 명의 취재진과 카메라 플래시 앞에서도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야구단 상징색인 오렌지색 넥타이를 매는 센스는 기본. 오라클 파크에 들어온 뒤 카메라를 발견하고는 미소와 함께 넥타이를 들어 보이는 포즈도 취했다.
파르한 자이디 야구단 사장으로부터 유니폼을 건네받아 입고 모자를 쓴 뒤엔 “핸섬?”이란 한 마디로 취재진을 ‘빵’ 터뜨렸다. 단 두 음절로 미국 기자들은 물론 옆에 있던 스콧 보라스와 구단 관계자들까지 미소 짓게 한 이정후다.
자기소개와 입단 소감은 통역을 거치지 않고 영어로 읽어내렸다. “Hello Giants”로 시작해 “나는 한국에서 온 ‘바람의 손자’”라는 말로 또 한 번 좌중을 웃겼다. “여기 온 지금부터 항상 베이에이리어를 사랑하겠다”거나 “이기려고 샌프란시스코에 왔다”는 등 지역 팬들이 흐뭇해할 말도 전했다. 그리고 마무리에선 “Let's Go Giants!”라고 외치면서 또 한 번 웃음을 자아냈다.
‘아버지(이종범 코치)와 비교해 누가 더 빠른가’란 질문에는 “아버지는 정말 빨랐다. 지금은 이기지만 같은 나이라면 절대 못 이겼을 것”이라고 답한 뒤 “(아버지는) 지금 ‘올드 햄스트링’이다”라는 농담을 덧붙였다. 스포츠 매체 ‘디 애슬레틱’이 이날 이정후의 기자회견에 관해 “매력적이고 재치 있는 첫인상을 남겼다…언어장벽도 이정후의 개성이 빛나는 걸 막지 못했다”고 호평한 이유다.
이정후 측 관계자는 “원래 인터뷰 센스가 좋은 선수이고, 틈틈이 영어과외를 받으며 준비한 것도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영어 자기소개는 이정후의 생각을 반영해 소속사에서 함께 준비했다고. 관계자는 “이날 통역을 맡은 테드 여 보라스 코퍼레이션 아시아총괄이 원래 영어를 위트있게 잘한다. 덕분에 이정후가 영어로 말한 것도 호응이 좋았다”고 했다.
센스와 위트, 구단과 지역을 향한 존중까지 보인 이정후의 기자회견에 현지 미디어와 팬들도 호평 일색이다. MLB닷컴은 “(이정후가) 매력을 발산했다…그가 ‘핸섬?’이라 묻자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디 애슬레틱 역시 "이정후가 꽤 재미있는 장면을 연출했다”고 평가했다.
자기소개와 소감을 영어로 말한 것도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비록 유창한 발음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농담까지 곁들이고 구단과 지역에 대한 존중까지 표현하는 모습에 반했다는 반응이 많다. SNS엔 “익숙하지 않은 외국어로 말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대단하다”거나 “연습 많이 했을 것 같다. 보기 좋다” “기자회견도 이렇게 노력하는 걸 보면 야구장에서도 열심히 할 것 같다”는 댓글이 많은 공감을 받았다.

유머감각과 친근감 어필한 이정후, 오타니와는 또 다른 매력
메이저리그 구단과 자주 교류하는 야구 관계자는 “미국인들은 유머감각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며 “아시아 출신 선수나 중남미 출신 선수들은 언어 장벽 탓에 유머감각을 보여주기 쉽지 않은데, 이 점에서 이정후는 첫 만남부터 아주 좋은 인상을 심어줬다고 본다. 앞으로도 현지 미디어, 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쌓아갈 기반을 만들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라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정후는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라이벌팀 LA 다저스에 입단한 오타니 쇼헤이와는 또 다른 매력을 어필했다. 오타니는 최고의 스타이자 완벽한 선수지만, 현지 미디어와 팬 사이에선 신비하고 미스터리한 존재로 여겨지는 면도 있다.
일례로 오타니는 최근 다저스 입단 기자회견 전까지 약 4개월 동안 미디어와 어떤 접촉도 없이 두문불출했다. 미디어는 그의 부상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그가 받았다는 정체불명의 수술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FA(프리에이전트) 최대어가 새로운 팀을 고를 때 무엇을 최우선으로 고려할지 등을 파악할 길이 없었다. 관계자와 에이전트를 통해 흘러나오는 정보의 파편을 이리저리 끼워 맞추면서 추측에 또 다른 추측을 더할 뿐이었다.
입단 기자회견에서도 오타니는 자신이 받은 수술이 어떤 수술인지, 왜 다저스를 선택했는지 등 사람들이 정말 궁금해하는 질문에 대해선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이날 사람들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오타니 반려견 이름’이 전부였다고 할 정도로 여전히 오타니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베일에 싸인 존재다. 항상 겸손하고, 사려 깊고, 야구선수는 물론 한 인간으로서도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지만 친근한 이미지는 아니다.
반면 이정후는 특유의 친화력과 유머로 오타니와는 다른 개성과 이미지를 만들었다. 한국에서 그랬듯 친근하고 호감 가는 첫인상을 심었다. 이는 앞으로 이정후의 미국 무대에서 여정에 큰 자산이 될 전망이다. 실제 LA 다저스라면 자다가도 치를 떠는 자이언츠 팬 사이에선 SNS로 ‘기자회견은 이정후가 오타니보다 낫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이정후의 생각은 어떨까. 그는 19일 기자회견에서 오타니 질문이 나오자 “오타니 선수와 비교는 솔직히 말이 안 된다”고 손사래 쳤다. “나와 견줄 수가 없는 존재다. 오타니는 세계에서 야구를 가장 잘하는 선수고 나는 막 시작하는 단계이지 않나. 계약한 금액도 비교가 안 되는데, 라이벌 구도로 비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역시 이정후다운 대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