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야구에선 노장 감독, 베테랑 감독이 배척당하는 추세다(사진=Bing AI)
최근 한국야구에선 노장 감독, 베테랑 감독이 배척당하는 추세다(사진=Bing AI)

 

[스포츠춘추]

2월 13일 KIA 타이거즈는 제11대 사령탑에 이범호 감독을 선임했다. KBO리그 역사상 최초의 1980년대생 감독이자 이른바 ‘MZ 세대’ 사령탑의 등장이다.

전 감독 김종국이 쫓겨난 뒤 KIA 후임 감독을 두고 야구계에선 다양한 인물이 후보로 거론됐다. 하마평에 오른 인물 중에는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백전노장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선임 절차가 진행되자 베테랑 후보들은 ‘올드스쿨’이란 꼬리표와 함께 배제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내부승격으로 방향을 정한 KIA는 현역 시절부터 일찌감치 ‘차기 감독감’으로 평가받은 이범호 타격코치와 단독 면접을 거쳐 감독으로 임명했다.

‘올드스쿨’을 멀리하는 흐름은 최근 감독을 바꾼 다른 구단도 마찬가지. SSG는 초임 감독인 이숭용을 임명했고 한화도 감독대행을 지낸 최원호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두산과 삼성은 40대인 이승엽, 박진만을 각각 감독석에 앉혔다. 올시즌 10개팀 감독 중에선 58세인 KT 이강철 감독이 최고령이다. 60세 이상 노장 감독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한때 단골 감독 후보였던 70세 김재박의 이름은 매스컴에서 사라진 지 오래. 최근엔 61세의 선동열 전 감독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2024시즌 10개 구단 감독(표=스포츠춘추 배지헌 기자)
2024시즌 10개 구단 감독(표=스포츠춘추 배지헌 기자)

 

한국은 노장 외면받는데, 메이저리그는 노장 감독 전성시대…왜?

베테랑 감독이 외면받는 한국야구와 달리 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선 노장 감독을 원하는 수요가 여전하다. 

2년전인 2022년 미국야구기자단 선정 ‘올해의 감독상’은 양대리그 모두 노장 감독에게 돌아갔다. 아메리칸리그에선 테리 프랑코나 감독이, 내셔널리그는 벅 쇼월터 감독이 최고의 감독으로 선정됐다. 지난해 열린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는 메이저리그 최고령 감독인 74세 더스티 베이커와 68세 브루스 보치의 대결이었다. 여기서 이긴 보치 감독은 텍사스를 창단 첫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고, 개인 통산 네 번째 우승을 이뤘다.

베이커, 프랑코나, 쇼월터 감독이 물러난 올 시즌에도 노장 감독들의 존재감은 여전하다. 보치 감독 외에도 우승후보 애틀랜타를 이끄는 68세 브라이언 스니커 감독이 건재하고, LA 에인절스 감독으로 오랜만에 지휘봉을 잡은 71세 론 워싱턴도 있다. 버드 블랙(콜로라도 로키스), 밥 멜빈(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도 1960년 전후에 태어난 60대 노장이다.

최근 들어 경험 많은 감독을 우대하는 메이저리그에서도 한때 젊은 초보 감독이 유행한 시기가 있었다. 데이터 분석의 중요성이 커지고 명문대와 월가 출신 경영진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구단들은 최신기술과 데이터에 능통한 젊은 감독을 선호했다. 지도자 경험이 전혀 없는 감독을 임명한 팀이 나오는가 하면, 아예 마이너리그 선수 경험조차 없는 감독을 선임한 팀도 있었다.

이들 젊은 감독 중에는 큰 성공을 거둔 사례도 나왔지만, 경험부족으로 금세 한계를 드러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선수들과의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거나 기계적인 경기 운영으로 중요한 경기에서 실패를 맛보는 사례도 있었다. 일부는 ‘구단 프런트의 꼭두각시’라는 비판 속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최근 프로야구는 감독들의 연령대가 점점 젊어지는 추세다(사진=Bing AI)
최근 프로야구는 감독들의 연령대가 점점 젊어지는 추세다(사진=Bing AI)

반면 데이터 야구의 선봉격인 휴스턴 구단은 ‘사인 훔치기 스캔들’로 최악의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 베이커 감독을 임명해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짐 크레인 구단주는 AP 통신과 인터뷰에서 “다양한 압박감과 선수, 상황에 대처해본 베이커 감독의 경험이 매력적이었다”고 말했다. 크레인은 한때 데이터와 젊은 감독에 쏠렸던 야구계 흐름을 지적한 뒤 “이제는 다시 중간으로 돌아왔다. 한쪽에 경도되는 것보다는 지금이 야구에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물론 이런 빅리그의 움직임을 한국야구에 그대로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다. 한 야구인 단체 관계자는 “감독은 파리목숨이다. 초보 감독이 베테랑 감독이 될 때까지 살아남아 기회를 얻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실제 역대 KBO리그 사령탑 중에 통산 1,000경기 이상 감독은 단 12명뿐이다. 이 가운데 현역 감독은 롯데 김태형 감독이 유일하다.

앞의 관계자는 “미국은 팀 전력이 약하면 성적이 나빠도 감독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반면 한국에선 전력과 관계없이 감독에게 모든 책임이 돌아간다”고 꼬집었다. 이렇게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난 감독은 대부분 두 번 다시 감독 기회를 얻지 못한다. 드물게 해설위원이나 단장으로 재기를 노리는 경우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극소수의 일이다. 감독에서 내려온 뒤에도 빅리그 코치나 마이너리그 감독으로 일하면서 수시로 감독 면접 기회를 갖는 미국과는 다른 환경이다.

메이저리그에선 현역 시절 소속팀이나 출신지와 무관하게 역량과 비전을 기준으로 감독을 고른다. 반면 국내야구의 감독 선임에선 ‘인연’이 1차 서류심사 기능을 한다. 팀 레전드 출신이거나 프랜차이즈 출신, 지역 출신인 지도자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 과거엔 오너 일가와의 인연, 지역 정치인과의 친분, 유력 인사의 후원으로 감독직을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팀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감독이 순수하게 능력만으로 선택받는 경우는 웬만해선 보기 드물다. 베테랑 노장보단 구단 출신 젊은 야구인에게 유리한 시스템이다.

야구인 단체 관계자는 “최근 젊은 선수 출신 단장이 늘어난 것도 노장 감독이 사라지는 원인”이라 했다. 선수 출신 4~50대 단장들이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껄끄러운 노감독이나 야구 선배를 감독으로 선호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앞의 관계자는 “단장뿐만 아니라 사장들도 요구사항 많고 까다로운 노장 감독을 원하지 않는다”고 귀띔했다.

브루스 보치(사진=게티이미지 코리아)
브루스 보치(사진=게티이미지 코리아)

 

데이터도 안 보고 업데이트도 안 하고…노장 감독 외면받는 진짜 이유

미국과 한국의 노장 감독들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구단 프런트 출신 야구인은 “노장 감독들이 외면받는 현상은 노장 감독들 스스로 자초한 결과”라며 “과거의 성공에 갇혀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야구의 변화를 외면하는데 구단에서 기회를 줄 이유가 없다”고 비판했다.

실제 메이저리그에선 60세 이상 나이 많은 감독들도 야구계 최신 트렌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활용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미국은 노장 감독들도 구단에서 내려주는 세이버메트릭스 기록을 참고하고, 파트별 전문가의 권한을 존중하고, 프런트의 조언을 받아들인다. 과감한 수비 시프트, 멀티포지션, 오프너 활용 같은 파격도 주저하지 않는다. 데이터를 무시하고 강훈련을 신봉하며 프런트의 조언을 간섭으로 여기는 국내 올드스쿨 감독들과 대조적이다.

과거 베이커 감독을 기용했던 워싱턴 내셔널스 마이크 리조 단장은 2016년 한 인터뷰에서 “구단은 감독이 원하는 분석 정보와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분석팀의 분석이 굉장히 효과가 좋기에 베이커 감독에게 모든 정보를 준다. 베이커 감독이 주어진 정보를 굉장히 잘 활용하고 있다”면서 감독과 구단의 원활한 협력관계를 자랑했다.

휴스턴에서 베이커 감독과 함께한 크레인 구단주도 “그는 똑똑한 사람이다. 몇 번 만나보니 그가 얼마나 똑똑하고 야구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면서 “베이커는 분석을 수용하면서도 구식 방식을 따르기도 한다.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크리스 영 텍사스 레인저스 단장은 보치 감독이 구식이라는 주장에 대해 “내 생각은 정반대”라고 반박했다. 영 단장은 “자기 방식에 갇혀 있으면 오래가지 못한다. 오랫동안 살아남은 노련한 감독은 진화하는 마음으로 계속 성장한다. 보치 감독은 그 점에서 훌륭했다”고 했다. 영 단장에 따르면 자신이 분석 파트 얘기를 하기도 전에 보치 감독이 먼저 “R&D 팀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레인저스 구단의 데이터 분석가 바비 밴델로가 ‘디 애슬레틱’과 인터뷰에서 한 말도 인상적이다. 보치 감독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밴델로는 노장 감독인 보치가 데이터를 무시하는 것 아닐까 걱정이 많았다. 내심 감독과 싸울 각오도 했다고. 그러나 실제로 경험한 보치는 예상과 전혀 달랐다. 밴델로는 “내가 보치에 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치 감독은 개방적인 사람이고 숫자를 원한다. 그는 과학적인 방법을 따른다. 가설로 시작해 가설을 검증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숫자를 찾으라고 한다. 그리고 그 수치가 자신의 가설을 반박하면 생각을 재고할 줄 안다. 그게 보치를 차별화하는 요소다. 보치는 데이터의 기초를 바탕으로 투수 코치의 의견과 투수, 타자가 과거에 보여준 모습을 겹겹이 쌓는 능력이 있다.”

보치 감독은 과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절에도 데이터에 귀를 열어놓고 분석가들의 말을 귀담아듣는 감독이었다. ‘디 애슬레틱’에 따르면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 반드시 분석가들로부터 의견을 듣고, 여러 의견을 통합한 뒤에 최종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가능한 모든 정보를 들어보고 수집하지 않는 건 미친 짓”이란 말도 남겼다. 몸은 나이 들었지만 생각은 늙지 않았다. 밴델로는 “이제는 그가 왜 성공했는지 알 것 같다. 항상 배우려고 하는 자세 때문”이라고 극찬했다.

반면 국내의 나이 많은 감독 가운데 새로운 정보와 변화에 마음을 열고 끊임없이 업데이트하는 지도자는 드물다. 김응용 감독은 한화에서 해태, 삼성 시절 야구를 그대로 하다 실패했다. 김성근 감독도 한화에서 SK 시절 성공했던 방식에 집착하다 무너졌다. 다른 구단들이 효율적인 훈련과 웨이트 트레이닝을 고민할 때 장시간 강훈련과 무의미한 특타로 체력을 소모했으니 실패는 예정된 결과였다. 한 야구인은 “요새는 야구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서 일 년만 현장을 떠나 있어도 변화를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라며 정기적인 업데이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범호 신임 KIA 감독(사진=스포츠춘추 DB)
이범호 신임 KIA 감독(사진=스포츠춘추 DB)

메이저리그 노장 감독들은 나이도 많고 경력도 화려하지만 권위적이지 않다. 손자뻘 되는 선수와도 소통에 어려움이 없다. 베이커와 보치 감독을 모두 경험해본 마우리시오 듀본은 AP통신 인터뷰에서 “보치 감독은 선수들이 대우받아야 할 방식으로 선수들을 대한다. 더스티도 마찬가지다. 선수들을 올바른 방식으로 대하기 때문에 선수로서 천국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듀본은 보치와 베이커 밑에서 선수로 뛰는 것을 할아버지 곁에 있는 것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는 “할아버지는 귀를 잡아당기고 외출을 금지할 거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그러는 건 우리를 아끼고 잘 되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라며 노장 감독들을 향한 존경심을 표현했다.

반면 국내 노장 감독들은 대개 권위적이고 제왕적이다. 일부 노장들은 코치와 프런트 직원을 종 부리듯이 대하기도 한다. 구단 직원 중에는 감독의 폭언과 갑질에 몸과 마음의 병을 얻어 평생을 몸담았던 야구단을 떠난 이도 있다. 젊은 지도자들도 다르지 않다. 초보 감독 시절엔 프런트와 잘 소통하고 코치진의 권한을 존중하던 감독이 성공하고 난 뒤엔 흑화해서 ‘야신’이 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많은 팬들이 ‘감독감’으로 착각하는 레전드 선수 출신들도 다르지 않다. 이들이 유튜브 방송이나 예능프로그램에서 말하는 ‘지나치게 솔직한’ 발언을 보면, 나이만 젊었지 구시대 야구인들과 다를 게 없다. 최고 레전드란 선수가 스포츠 과학을 부정하고 ‘난 데이터 같은 거 안 본다’는 말을 당당하게 한다. 이런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고 감독이 돼서 선수를 가르치는 게 한국야구가 발전하지 못하는 원인이자 한국야구의 비극이다.

한 지방구단 코치는 “최근 입단한 신인 중엔 고교 때부터 새로운 훈련법, 최신 트렌드를 접한 선수가 많다. 경험에만 의존한 코칭으로는 선수들에게 다가가는 데 한계가 명확하다”고 했다. “물리학이나 생체역학(운동역학 등)을 공부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코칭을 하다 보니 지금 시대에 맞지 않게 된다. 지도법에 근거가 없고, 선수들이 납득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간다”는 다르빗슈(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지적은 일본 지도자들을 향한 말이지만, 한국 지도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지도자가 감독이 되고, 감독이 베테랑 명감독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베테랑 투수코치 브랜트 스트롬은 보치와 베이커에 대해 “두 사람 모두 전쟁을 겪었고 산 정상에 올랐던 분들이다. 그들 모두 전투에서 생긴 상처가 있고 자부심을 갖고 있다”며 오랜 세월 쌓은 경험의 가치를 강조했다.

최근 KBO리그 구단들은 ‘공부하는 지도자’ 육성에 적극적으로나서고 있다. 이렇게 키운 지도자 가운데 감독이 되어 성공하는 사례가 나오고, 이들 중에 장수 감독이 나온다면 한국야구에도 다시 베테랑 감독 시대가 올 수 있다. 이강철, 염경엽 감독은 현 리그 감독 중에 최고령에 속하지만 최신 트렌드에 열려있고 선수들과도 원활하게 소통한다. 이들이 앞으로 오랫동안 감독직을 수행하면서 60대 감독, 70대 감독이 되면 어떤 모습일지도 궁금하다. 

무엇보다 최초의 MZ 감독 이범호가 보여줄 소통과 인화의 리더십이 기대된다. 선수들에게 거침없는 자기표현을 주문한 이 감독은 KIA의 경직된 팀 분위기를 바꿀 적임자란 평가를 받는다. 이 감독이 성공한 감독이 되고, 끊임없는 노력과 업데이트로 노장 감독이 될 때까지 성공을 이어간다면 한국 야구사에 의미있는 사건이 될 것이다.

저작권자 © 스포츠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 후원하기 후원하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