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춘추]
지역 정치권의 무리한 요구와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한화 이글스가 최신식 새 야구장을 놔두고 청주 경기를 편성하라는 정치권 압력에도 청주 경기 미편성을 최종 확정했다. 선수단 안전과 합리적 경영 판단을 우선시한 현명한 선택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한화 이글스는 최근 "낙후한 시설로 인한 선수 부상 위험성, 경기력 저하, 팬들의 편의성 및 접근성 문제로 인해 당분간 청주경기장에서 프로야구 경기 진행은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는 내용의 공문을 청주시에 발송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주시가 지난해 11월과 올해 3월 두 차례에 걸쳐 "2025년 시즌에도 지난 시즌처럼 최소 6경기를 배정해 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구단의 답변은 단호한 거절이었다.
도지사까지 나선 '정치적 압박'...구단은 원칙 고수

청주시와 충북도는 한화를 줄기차게 압박해왔다. 지난해 11월 20일 한화 구단을 방문해 홈경기 배정을 요청했고, 같은 달 28일에도 KBO와 한화 측에 경기배정 요청 협조공문을 발송했다. 시즌 개막 전인 지난 12일에도 재요청 공문을 보냈다.
김영환 충북지사는 지난 4월 한화글로벌, 한화솔루션,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등 도내 한화그룹 계열사 임원 7명을 직접 도청으로 소환해 "사회공헌 차원에서 청주 경기 배정에 힘써달라"고 압박했다. 3월 28일에는 이범석 청주시장과 함께 김응용 전 한화 감독, 이상국 전 KBO 사무총장 등 은퇴한 야구계 인사들을 만나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범석 시장은 "성적과 상관없이 열정적으로 응원해준 청주 팬을 외면하면 안 된다"며 감정적으로 호소하는가 하면, "최근 10년 동안 청주시가 120억원을 들여 KBO와 한화 구단의 요구대로 시설을 개선해 왔다"며 청주 야구장의 프로 경기 개최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한화 측의 입장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한화는 '내부 검토 결과 당분간 청주야구장에서의 KBO 리그 경기 진행은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는 원칙을 고수했고, 2025 KBO 정규시즌 한화 이글스의 홈경기 73경기를 모두 신축 구장인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에 배정했다.
170억 투입에도 KBO 점검 3차례 연속 낙제...땜질식 투자의 한계

청주시는 한화 홈경기를 위해 2007년부터 올해까지 누적 170억원을 투입해 시설을 꾸준히 개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세부적으로는 2007년 50억원, 2011년 42억원, 2015년 10억원, 2016년 12억원 등 10년간 총 114억원이 투입됐다. 2018년에는 총사업비 25억원을 들여 조명 타워를 개선했고, 8억원을 들여 관람석 바닥을 친환경 제품으로 교체했다. 2019년에는 총 18억원을 투입해 야구장 전광판을 최신식으로 교체했다고 홍보했다.
지난해엔 약 19억원을 들여 배수로 정비·인조잔디 교체·1루 및 3루 안전펜스 교체·덕아웃 라커룸 리모델링을 진행했고, 올해는 4억원을 들여 본부석 앞 전광판 설치와 출입구 시설 개선, 관중석 의자 교체, 냉난방기 교체, 외야 홈런존 펜스 교체 등을 6월까지 진행할 예정이다.
하지만 이런 투자가 꼭 필요한 곳에 올바르게 이뤄졌는지는 의문이다. 일례로 청주경기가 열린 2019년 NC전에서는 새로 개선한 조명탑이 5분간 꺼지면서 경기가 중단되는 촌극을 빚었다. 2022년 KBO 측에서 시즌 초 청주야구장 실사를 했는데 외야 펜스 등 시설 개선이 없을 경우 경기 개최가 어렵다는 의견이 있었다.
2024년에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드러났다. 6월과 8월 청주 경기가 예정됐지만 4월 KBO 현장실사에서 미비점이 확인되어 모든 경기가 취소됐다. 5월 재점검에서도 베이스와 인조잔디 간의 높이 차로 인한 부상 위험, 외야 펜스 그물망의 불규칙한 간격, 선수 대기실의 기본 시설 부족 등이 지적됐다. 6월 재재점검에서야 겨우 통과해 5년 만에 경기를 치렀지만, 이렇게까지 해서 여기서 1군 경기를 치르는 게 맞느냐는 의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야구계 관계자는 "매년 거액의 세금을 들여 개선했다고 하는데 크게 달라졌다는 게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지난 2019년 청주구장 경기 당시 만난 한 야구인은 "더그아웃 천장이 낮아서 선수 머리가 부딪히고 씻을 곳이 없어서 선수들이 땀에 절어 숙소에 들어가는데 이런 문제는 놔두고 18억원을 들여 전광판을 교체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청주야구장 개보수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시선도 있다. 1979년 건립된 구장으로 워낙 낡고 오래된 데다, 처음 지을 때부터 잘못 지은 야구장이라, 아무리 돈을 들여 보수해도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청주야구장 수리에 수백억을 들이는 게 시민 세금 낭비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실제 경기를 치르는 선수들도 청주경기에 부정적이다. 사실 청주에서 열리는 한화 홈경기를 더 늘려달라는 요구는 한화는 물론 프로야구 구성원들에게 '소름 끼치는' 농담에 가깝다. 한화가 아닌 타 구단 선수들도 "우리 팀은 청주 경기가 배정 안 됐으면 하는 게 솔직한 바람"이라고 털어놓는다. 청주구장의 안전 문제 때문에 야구 팬들도 청주경기에 부정적이다.
신구장 20경기 매진 vs 청주 손해 감수...현실성 떨어지는 요구

올해 한화 새 야구장이 개장하면서 청주 경기는 더욱 현실성이 떨어지는 요구가 됐다. 3월 개장한 대전한화생명볼파크는 2000억원을 들여 건립한 최신 시설로, 1만7000석 규모에 국내 최초의 좌우 비대칭 그라운드, 높이 8m의 몬스터 월, 복층형 불펜 등을 갖춘 복합 문화공간이다. 인피니티풀과 인공서핑장, 캠핑·카라반 존까지 갖춘 이 구장은 20경기 연속 매진될 정도로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구단 입장에선 큰 돈을 들여 개장한 새 야구장에서 한 경기라도 더 치르는 게 당연한 선택이다. 관중석이 9천석에 불과한 청주에서 경기를 치르면 한화로서는 관중 동원은 물론 수익 면에서도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대전 경기를 취소하고 청주에서 경기하면, 신구장에 입점한 식음료 매장에 보상을 해줘야 하는 문제도 있다. “청주와 대전이 차로 40분 거리인데, 멀쩡한 최신식 구장을 놔두고 굳이 여기 와서 경기를 치를 의미가 있냐"는 지적도 일리가 있다.
제2구장 홈경기 개최는 구단의 의무가 아니다. 연고 도시 외 다른 지역 팬들에게도 프로야구를 즐길 기회를 제공하는 서비스 목적이 크다. 구단으로서는 손해를 감수하고 하는 이벤트이기 때문에 구단에 개최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정 1군 경기를 개최하고 싶으면 그에 걸맞은 시설을 갖추고 합당한 지원을 해야 한다. 지역 정치권에서 억지를 부리고 압력을 가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청주경기를 요구하는 정치권의 압박은 유권자들 표를 의식한 정치적인 보여주기로 봐야 한다. 무엇보다 프로스포츠 구단의 경영 판단에 정치권이 개입하는 것 자체가 월권이다. 연고지도 아닌 청주시나 충북도는 한화 야구단을 압박할 명분도 방법도 없다. 한화 모기업 관계자를 불러다 경기 개최를 요구하는 건 정치권 갑질에 가까워 보인다.
한화는 이런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청주경기 미편성을 고수했다. 정치적 논리에 굴복하지 않고 프로스포츠단으로서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앞으로도 중대한 변화가 있지 않는 한 한화가 청주 경기를 치를 일은 없을 것이다. 청주시는 한화 구단을 붙들고 생떼를 쓰거나 압력을 넣을 게 아니라 다른 합리적 대안을 찾는 게 현명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