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춘추]
이제는 야구인이 아닌 예능인이다. 돌아올 다리를 불사르고 종범신이 떠났다.
한국 프로야구 올타임 레전드 이종범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갔다. 정규시즌 순위싸움이 한창인데 프로야구 소속팀 KT 위즈 코치를 그만두고 방영될지 안 될지도 알 수 없는 방송 예능프로그램 출연을 선택했다.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선수이자 야구계에서 누구보다 영향력 큰 선수의 충격적인 결정에 야구인들도 고개를 젓는다.
KT는 27일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를 앞두고 이종범 코치를 1군 엔트리에서 말소했다. 이 코치는 JTBC 예능 프로그램 '최강야구'의 감독을 맡기 위해 현역 코치직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KT 관계자는 "이종범 코치가 퇴단 의사를 밝힌 게 맞다"며 "구단은 만류했지만, 논의 끝에 코치 의사를 존중해서 보내주기로 했다"고 밝혔다.
소식을 접한 야구 관계자와 야구인들은 대부분 '충격적'이란 반응을 보였다. 물론 아주 극소수는 이종범을 이해한다는 반응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 야구인은 "이종범 정도 커리어와 연차에 자기보다 후배들이 감독하고 있는데 '현타'가 오지 않겠나. 팀에서 딱히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비록 예능 프로그램이지만 좋은 오퍼가 왔으면 마음이 끌렸을 만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온정적이고 내재적 접근법으로 바라보는 이는 드물다. 대부분 이해할 수 없다거나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는 비판 일색이다. 한 관계자는 "프로 현장으로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스스로 다리를 불사른 셈"이라고 비판했다. 지방구단 관계자도 "시즌 중에 이런 식으로 팀을 떠난 지도자를 원할 팀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아마야구 지도자는 "선수들과 팬, 동료 코칭스태프는 물론 자신을 기용한 구단에 대해서도 예의가 아니지 않나. 아무리 이해해 보려고 해도 무리수"라고 의아해했다.
이종범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아직 본인이 입장을 밝히지 않아 알 수 없다. 측근들에게 자신이 예능프로그램에 가는 게 야구에 도움된다는 생각을 밝혔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인지는 모를 일이다. 앞의 야구인 말처럼 후배들이 감독하고 있는데 감독할 나이에 평코치를 맡고 있으니 현타가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방송사에서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파격적인 제안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스포트라이트와 대중의 관심이 그리웠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노력해도 감독을 맡을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데 좌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감독이 하고 싶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하늘이 점지해주는 역할이긴 하지만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진짜 이유가 어느 쪽이건, 시기와 방법이 잘못됐다. 야구판에서 정규시즌 중에 다른 팀 코치를 빼가는 게 정당화되는 경우는 없다. 감독으로 '영전'해서 간다면, 원 소속팀에 양해를 구해서 데려갈 수도 있겠지만 그조차도 팀에 피해를 주기 때문에 권장되는 행태는 아니다. 그런데 이종범이 향한 곳은 프로팀이 아닌 예능프로그램이다. 이건 K리그1 코치가 시즌 중 '골때리는 그녀들'이나 '뭉쳐야 찬다' 감독한다고 빠져나가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아무리 인기 있고 영향력 있어봐야 예능은 어디까지나 예능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진짜 스포츠는 아니다.
KT 구단과 이강철 감독이 겉으로 '원만하게 상의해서 흔쾌히 보내줬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속내도 유쾌할 거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시즌 중인 프로팀 코치를 빼간 쪽이나, 부른다고 달려가는 코치나 프로야구에 대한 존중이라곤 찾아보기 어렵다. 한 원로 야구인은 지난해 "일부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 좀 끌면서 제작진이나 출연자들이 마치 자기들이 한국야구에 대단한 역할을 한다고 착각하고 뭐라도 된 것처럼 구는 게 웃기지도 않는다"고 비판한 바 있다.
특히 이종범 코치의 행동은 자신을 불러준 이강철 감독에 대한 도리도 아니다. 이 코치는 지난해 미국 텍사스 레인저스 지도자 연수를 갔다가 일찍 귀국했다. 일생의 꿈인 프로팀 감독을 위해 떠난 지도자 연수였다는 건 산천초목이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연수를 다녀와서 이종범의 이름값과 연차에 맞는 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워낙 레전드 인사인데다 감독이 목표인 걸 뻔히 아는 구단들로서는 데려가기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이종범을 감당할 만한 1군 감독도 없었다.
그런 이종범에게 해태 타이거즈부터 33년 인연을 이어온 이강철 감독이 손을 내밀었다. 이종범은 1군 외야 수비 및 주루코치로 KT에 합류해 지난해 가을 마무리 캠프부터 선수단을 지도했다. 올 시즌 중반에는 본인 의사에 따라 타격 파트를 일부 맡기도 했다. 후배 지도자를 위한 이강철 감독의 배려였다. 그러나 이를 뒤로 한 채 이 코치는 3개월 만에 팀을 떠났다.
이강철 감독은 짐짓 쿨한 반응을 보였지만 잘 곱씹어보면 말 속에 뼈가 있다. 이 감독은 27일 현장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좋게 받아들인다. 가서 잘하면 된다. 그래도 감독 되는 것 아닌가"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언뜻 덕담처럼 들리지만, 현장 야구인들이 예능프로그램 감독자리를 진짜 같은 '감독'으로 생각할 리는 만무하다.
코치 이종범의 공백이 없다는 말도 뼈아프다. 이 감독은 "(이 코치의) 공백은 없다. 공백이 생긴다고 했다면 본인도 가겠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자리였다면 말렸겠지만 지금 박경수가 그 역할을 잘하고 있었다. 코칭스태프가 부족하지 않다. 출혈이 있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바꿔 말하면 그동안 이 코치가 KT에서 코치로서 별다른 역할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종범의 이름값과 코치 연차를 생각하면 시즌 중에 팀을 떠나는 게 큰 출혈이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할 일일 텐데, 그렇지 않다는 건 어찌보면 날선 비판보다도 더 굴욕적인 평가다. 이 코치 이탈 소식이 전해진 이날 KT는 타선이 대폭발해 11대 8로 역전승을 거뒀다.

어쩌면 이종범 코치에게도 이강철 감독처럼 될 기회가 있었다. 이 감독도 한때 이 코치처럼 감독의 꿈을 이루지 못해 괴로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현역 시절 리그를 대표하는 레전드 선수였던 이강철은 2006년 은퇴 후 지도자로 변신했다. 감독이 되고 싶은 꿈은 있었지만, 섣불리 행동하기보다는 조용히 코치로서 역할을 다하면서 묵묵히 때를 기다렸다. KIA에서 시작해 넥센(현 키움), 두산 베어스에서 온갖 보직을 다 맡으면서 13년이라는 긴 세월을 코치로 견뎌냈다. 마침내 2019년 KT에서 53세의 나이에 기회를 잡았고, 2021년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화려한 성과로 자신의 진가를 증명했다. 이후 리그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반면 이종범 코치는 은퇴 이후 좀처럼 한곳에 정착하지 못했다. 한화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방송 해설, 이후 LG에서 2군 총괄 타격코치로 시작해 일본 주니치 연수, 2021년 돌아와 LG 1군 타격코치로 시즌을 시작했다가 시즌 중 2군 타격코치로 강등됐다. 이듬해는 2군 감독으로 역할을 바꿨다. 염경엽 감독 부임으로 팀을 떠나려다가 염 감독의 만류로 1군 주루코치를 맡았다. 시즌 뒤 미국야구 연수를 떠났다가 돌아와 KT 코치진에 합류했다. 지도자로서 착실하게 경력을 쌓고 전문성을 인정받을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은 시즌 중 예능프로그램으로 향하는 초유의 선택을 했다. 사실상 현장 지도자의 길을 접고 예능인의 길로 나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종범 코치의 선택은 그가 왜 지금까지 프로 감독이 되지 못했는지 스스로 증명한 셈이 됐다. 감독 꿈을 이루지 못한 좌절감이나 프로팀 코치의 척박한 현실은 핑계가 될 수 없다. 같은 좌절감을 안고도 10년 넘게 코치 역할을 한 이강철 감독 사례가 있고, 힘든 여건 속에서도 사명감을 갖고 후배들을 지도하는 수많은 코치들이 있다. 다른 선수도 아니고 '레전드' 이종범이라면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