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춘추]
'도박꾼' 피트 로즈 복권에 이어 이번에는 '약쟁이' 로저 클레멘스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야구계를 향한 '오지랖'이 갈수록 도를 넘고 있다. 골프를 치다가 뜬금없이 클레멘스를 명예의 전당에 당장 보내라고 요구했다. 대통령 한 마디면 쿠퍼스타운 문도 강제로 열 수 있는 모양이다. 여기가 미국인지, 바나나공화국인지 헷갈린다.
트럼프는 25일(한국시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어제 위대한 로저 클레멘스와 그의 아들 케이시와 골프를 쳤다"며 포문을 열었다. 이어 "로저 클레멘스는 역사상 몇 안 되는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354승을 기록했고 사이 영 상을 7번이나 받았으며(기록적인 숫자다!), 6번 월드시리즈에 출전해 2번 우승했다. 또 놀란 라이언에 이어 삼진 2위를 기록했다"고 외쳤다. 미안하지만 클레멘스는 탈삼진 3위이지 2위가 아니다(가짜 뉴스!).
더 가관인 것은 스테로이드 의혹에 대한 대통령의 '변호사' 행세다. 트럼프는 "클레멘스가 지금 당장 야구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야 한다!"며 "사람들은 그가 약물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것도 입증되지 않았다. 양성 반응을 보인 적이 없고, 로저는 처음부터 완전히 부인하고 있다"고 마치 법정에 선 것처럼 강변했다. 심지어 "그런 루머가 수년간 지속됐지만 그가 '약쟁이'였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고까지 했다.

클레멘스도 즉각 화답했다. 약물 파문으로 몰락한 뒤 야인 신세가 된 로켓은 자신의 X(옛 트위터)에 "사랑에 감사드린다! DT(도널드 트럼프)는 누구보다 가짜 뉴스가 무엇인지 안다"며 맞장구를 쳤다. 이어 "나는 가족의 운명을 바꾸고 승리하기 위해 야구를 했다!"고 덧붙였다. 대통령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생겨서 의기양양한 모양이다.
하지만 대안적 현실은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트럼프가 좋아하는 팩트는 이렇다: 클레멘스는 2007년 미첼 리포트에서 스테로이드 사용과 연루됐고, 의회 위증죄 등 6건의 중죄로 기소됐다. 위증죄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금지약물 사용 면죄부는 아니다. 명예의 전당 투표자들도 클레멘스를 외면했다. 2022년 마지막 기회에서도 65.2%의 득표율로 입성 기준인 75%에 한참 못 미쳤다.
트럼프는 이번에도 피트 로즈 사례를 들먹였다. "이것은 4000개가 넘는 안타를 친 피트 로즈와 같은 경우가 될 것이다. 내가 커미셔너에게 말하기 전까지는 명예의 전당에 넣어주지 않았고, 그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본질적으로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었다. 피트가 죽고 나서야 '문을 열어줬고', 그것도 죽음 덕분에야 겨우 검토 대상이 됐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로저 클레멘스의 경우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두지 않을 것이다. 354승 - 지금 당장 그를 넣어라. 그와 그의 훌륭한 가족이 더 이상 이런 '바보 같은 짓'을 견뎌야 할 이유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트럼프는 명예의 전당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른다는 점이다. 명예의 전당은 미국야구기자협회가 투표하고, MLB 커미셔너가 "넣어라" 한다고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로즈와 달리 클레멘스는 이미 10년간 충분히 기회를 가졌지만 번번이 탈락했다. 올 12월 베테랑 위원회에서 마지막 기회가 있지만, 신설 규정에 따라 이번에도 5표 이상 얻지 못하면 영원히 안녕이다.
이쯤 되면 패턴이 보인다. 로즈든 클레멘스든, 실제 자격보다는 대통령과의 친분이 더 중요한 기준인 모양이다. 로즈는 도박, 클레멘스는 스테로이드. 둘 다 야구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인물들이지만, 골프 한 라운드면 모든 게 용서되나 보다.

MLB 사무국으로서는 머리를 쥐어뜯을 일이다. 롭 맨프레드 커미셔너는 이미 로즈 건으로 한 번 굴욕을 당했다. 맨프레드가 로즈를 받아준 것은 순전히 야구적 판단이 아니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연방 스포츠 베팅 합법화 법안, 반독점 면제권 재검토 등 MLB가 워싱턴에서 풀어야 할 숙제가 한둘이 아닌 상황에서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클레멘스까지 넘겨주면 명예의 전당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야구는 골프가 아니다. 18홀 라운딩으로 100년 전통이 바뀔 수는 없다. 대통령의 '친구 찬스'가 쿠퍼스타운까지 통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명예의 전당이 골프 클럽하우스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트럼프의 '오지랖'이 과연 이번에도 통할지 지켜볼 일이다. 이러다 나중엔 극우파 야구인의 대명사 커트 실링도 명예의 전당에 밀어넣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