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춘추]
나의 친구 최동원에게...
나의 친구이자 만인의 친구, 위대한 최동원 투수가 우리 곁을 떠난지 벌써 14년이 된다. 지금 40대 혹은 50-60대 이상이라면 야구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무쇠 팔’ 최동원(崔東原·1958~2011) 투수를 기억할 것이다.
선수 최동원은 근면과 성실, 열정과 집념으로 상징되는 1970~1980년대 산업화 시대의 상징적인 모델이었다. 최동원 투수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승부 근성을 갖고 있다. 안쪽으로 들어오는 볼에 안타를 맞으면 다음 타석에서도 똑같이 안쪽 공으로 승부를 볼 정도로 승부사 기질이 있는 친구였다.
최동원을 처음 본 것은 중학교 2학년 시절이었다. 청주에서 열리는 문교부장관기 전국대회가 열렸다. 나는 대구중학교 대표로, 최동원은 부산 경남중학교 대표로 문교부장관기대회에 출전했다.
작은 체구지만 이 당시만 해도 상체와 하체가 기존의 선수들에 비해 상당히 발달된 몸이었다. 안경 낀 투수가 마운드에서 볼을 던지는데 중학생 엘리트선수들이 공에 손도 대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뒤에서 구경한 나 또한 어떻게 중학생 선수가 고등학생 이상의 강하고 빠르게 볼을 던지는지 넋을 놓고 구경했던 기억이 난다.
최동원은 야구를 잘해 유급하지 않고 그대로 고등학교와 대학을 진학했지만, 나는 중학교부터 야구를 시작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년을 유급했다. 이렇게 동급생인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최동원의 1년 후배 선수가 되어 야구 선수로서의 길을 걸어왔다. 최동원은 경남고등학교로, 나는 대구상고로. 이후 최동원은 연세대학교, 나는 한양대학교로 진학하게 됐다. 프로에서는 최동원은 부산 연고의 롯데 팀으로, 나는 대구 연고의 삼성라이온즈에 입단하였다. 그렇게 어린시절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 늘 투수와 타자로 숱하게 겨루며 자랐다.

한국 야구사에 수많은 투수가 있지만, 개인적으로 최동원 투수를 첫손에 꼽는 이유는 남다른 근성과 야구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그는 마운드 위에서 투수로서 자신의 '업무'를 시작하는 자세가 언제나 진지했다. 같은 시기를 지나온 선수로서 서로 대면하여 경기장에 서면 최동원 투수가 버릇처럼 하는 행동이 있다. 가장 먼저 로진백, 양말, 금테안경, 모자챙을 차례로 만지고 나서야 공을 던지던 그의 루틴은 아직도 나의 뇌리에 남아있다. 특히 독특한 투구폼은 요즈음 자라나는 투수들이나 일반 팬들에게는 독특하게까지 보일 정도다.
최동원은 아무리 멀리서 볼을 던지더라도 그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한 투구폼으로 볼을 던졌다. 왼팔과 왼발을 다이내믹하게 휘두르는 특유의 투구폼은 수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여전히 최동원 투수의 시그니처로 남아있다.
최동원의 주무기는 시속 155㎞에 육박하는 강속구와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커브다. 특히 커브는 알면서도 칠 수 없을 정도로 까다롭고 어려운 볼이다. 나의 친구인 최동원을 만나면 늘 이야기 한다. '너 때문에 나의 프로야구 통산 타율이 3할이 되지 못했다'라며 농담 아닌 농담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최동원의 또 다른 장점이라면 빠른 승부였다. 최동원이 등판하면 늘 2시간 40분 안에 경기가 끝날 정도로 빠른 템포로 투구했다. 빠른 템포로 인해 타자들이 경기 도중에 타임을 자주 부를 정도였다.

한번은 대표팀에서 함께 배터리로 조를 이루어 연습하는데 최동원이 피칭 전에 몸을 풀 때 롱팩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좌측 폴대에서 우측 폴대까지 롱팩을 하는데 정말 놀랐다. 더불어 갖춰진 유연성 또한 놀라울 정도였다. 최동원뿐 아니라 메이저리그에서도 투수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롱팩을 많이 하는 편이다. 예전 구대성 투수도 어깨를 다쳐 한참 재활 할 때도 가장 많이 던졌던 것이 롱팩이었다. 요즈음 젊은 투수들에게 건하고 싶은 것은 이들 최동원이나 구대성 그리고 메이저리그 투수들이 던지는 것처럼 롱팩을 많이 했으면 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어깨가 강해지고 좋은 밸런스를 잡을 수 있다.
그러던 최동원이 드디어 나와 함께 밧데리로 경기장에서 함께 하게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프로야구에서 가장 이슈가 되었던 대형 트레이드가 발생하게 됐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던 시절이었지만 프로야구가 출범하고 10년전까지만 해도 트레이드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이 당시만 해도 트레이드 되어 간다는 것은 좋지 않은 인식들이 있어 팬들이나 선수들에게 큰 상처가 되곤 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상상도 할 수 없는 대형 트레이드가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삼성라이온즈에서는 장효조 선수와 김시진 투수 롯데자이언츠 팀에서는 최동원 투수와 김용철 선수가 서로 맞 트레이드 됐다.

이 일 하나로 인해 오랫동안 프로야구가 시끄러웠고 팬들로부터 서로 구단을 외면하는 사건이 한동안 벌어지곤 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프로야구가 40년이 지난 지금은 트레이드가 너무나 당연시 된 시기지만 그 당시만 해도 트레이드 되어 간다는 것은 선수의 생명이 끝났다는 인식이 많았던 시절이다. 이렇게 서로 대형트레이드가 되어 각각 고향을 떠나서 야구한다는 것 자체가 선수들에게 크나큰 상처를 안겨 주었다. 선수들뿐만 아니라 팬들에게도 구단에 대한 배신감으로 인해 지금도 여전히 올드 팬들에게 회자가 되곤 한다.
대한민국 아마추어와 프로야구를 풍자했던 최동원이 기나긴 투병생활 중에서도 평생 해온 야구를 잊지 못해 운명할 때까지 야구를 그리워하며 손에서 볼을 놓지 않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지금도 친구인 최동원투수의 다이나믹하고 힘있는 투구폼이 생각이 난다. 비록 현장을 떠나 우리 곁을 떠난지 오래 되었지만 최동원투수의 야구사랑과 정신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친구야 너무 보고 싶고 그립다.
너의 친구 이만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