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게이트]
월드시리즈 전설의 '더 스틸' 주인공도 세월을 이길 순 없었다. 데이브 로버츠 LA 다저스 감독이 '혜성특급' 김혜성과 달리기 경주를 하다가 얼굴부터 넘어지는 굴욕을 당했다. 2승 3패로 벼랑 끝에 몰린 다저스 선수단은 창피를 감수한 감독의 모습에 잠시나마 현실을 잊고 웃음꽃을 피웠다.
디 애슬레틱,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 등 외신에 따르면 로버츠 감독은 월드시리즈 6차전을 앞둔 31일(한국시간) 캐나다 토론토 로저스센터에서 진행된 훈련에서 김혜성과 베이스 달리기 경주를 했다. 노인 공경 정신이 투철한 김혜성은 감독보다 늦게 출발하는 핸디캡까지 감수했지만,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가 따로 없었다. 무리해서 스피드를 낸 로버츠는 2루를 돌아 3루로 향하던 중 그만 발이 꼬이며 내야 흙바닥에 얼굴부터 처박혔다.
남들 보는 앞에서 넘어지면 보통 아파서가 아니라 창피해서 바로 일어나지 못하는 법이다. 로버츠 감독도 넘어진 뒤 한동안 얼굴을 땅에 박은 채 누워 있었고, 지켜보던 선수들과 코치진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일어난 로버츠 감독은 다리를 절뚝이며 "나 다쳤어!"라고 외쳤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지만, 파란색 후드티는 온통 흙투성이가 됐다.

세월이 야속하다. 로버츠 감독은 현역 시절 10년간 243개의 도루를 기록한 '대도' 출신이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5년간 195개의 도루를 훔쳤고, 도루 성공률은 81%에 달했다. 특히 2006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선 34세 나이에도 49개의 도루로 메이저리그 전체 6위에 올랐다.
로버츠의 가장 유명한 도루는 2004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ALCS) 4차전에서 나왔다. 당시 보스턴 레드삭스는 뉴욕 양키스에 3연패를 당하고 4차전도 9회말 3대 4로 뒤지며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다. 케빈 밀러가 양키스의 마무리 마리아노 리베라를 상대로 볼넷으로 출루하자, 열흘 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벤치만 달구던 로버츠가 대주자로 투입됐다.
리베라는 로버츠를 견제구로 세 차례나 압박했지만, 로버츠는 초구부터 바로 2루 도루를 시도했다. 양키스 포수 호르헤 포사다가 정확하게 송구했지만, 로버츠는 간발의 차로 유격수 데릭 지터의 태그를 피해 세이프됐다. 뮬러가 중전 안타를 치며 로버츠가 홈을 밟았고, 경기는 동점이 됐다.
경기는 연장 12회 데이비드 오티즈의 끝내기 홈런으로 보스턴 승리로 끝났다. 보스턴은 이날부터 내리 4연승을 거두며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3연패 후 4연승으로 시리즈를 뒤집었고, 86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밤비노의 저주'에서 벗어났다. 로버츠의 도루는 그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로버츠가 경주 상대로 도전한 김혜성은 다저스에서 가장 빠른 선수 중 한 명이다. '혜성특급'이 별명인 김혜성의 스프린트 속도는 평균 시속 28.7마일(약 46.2km/h)로 메이저리그 전체 상위 14%에 속한다. 53세 로버츠 감독이 이기지 못한 건 당연한 결과. 하지만 로버츠 감독의 의도가 벼랑 끝에 몰린 팀 분위기를 풀어주는 것이었다면, 이는 성공적이었다.
다저스는 현재 토론토 블루제이스에 2승 3패로 밀려 있다. 31일 오전 9시(한국시간) 열리는 6차전에서 패배하면 시즌이 끝난다. 로버츠 감독이 2루를 돌다 넘어진 것처럼, 다저스도 월드시리즈 경주에서 넘어진 상황. 다시 일어나 흙을 털고 달려갈 수 있을지, 아니면 이대로 엎어진 채 시즌을 마감할지는 6차전에서 갈린다.
로버츠 감독의 2004년 도루가 보스턴 레드삭스의 역사적 대역전극을 촉발시켰듯이, 다저스는 로버츠 감독의 이번 꽈당쇼가 팀의 사기를 북돋워 반등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10일 만에 출전한 로버츠가 '더 스틸'로 역사에 남을 승리를 만들었듯이, 월드시리즈 내내 출전 기회가 없었던 김혜성에게도 별의 순간이 찾아올지 지켜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