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에 참석한 트럼프(사진=백악관 홈페이지)
행사에 참석한 트럼프(사진=백악관 홈페이지)

 

[더게이트]

지안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이 또 한 번 바닥을 드러냈다. 6일(한국시간) 미국 마이애미 아메리카 비즈니스 포럼에서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향해 "정말 친한 친구"라며 끝없는 찬사를 쏟아냈다. 12월 월드컵 조 추첨식에서 신설 '평화상'을 줄 것처럼 암시하면서 말이다. 

이날 무대엔 트럼프와 리오넬 메시, 인판티노가 함께 섰다. 세계적 축구 스타 옆에서 인판티노가 선택한 건 축구계 수장으로서의 품격이 아니라 권력자에게 바치는 아부였다. FIFA는 같은 날 "평화를 위해 예외적이고 비범한 행동을 한 이들"에게 주는 'FIFA 평화상'을 신설한다고 발표했다. 수상자를 명시하진 않았지만, 누가 봐도 트럼프를 겨냥한 상이었다.

평화상? 트럼프는 재집권 후 8개 전쟁을 끝냈다고 주장하지만 검증된 바 없다. 그는 스스로 '평화의 대통령'이란 호칭까지 붙이며 노벨 평화상을 받아야 한다고 염불처럼 되뇌었다. 하지만 올해 노벨 평화상은 베네수엘라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에게 돌아갔다. FIFA 평화상은 노벨상을 못 받아 속상할 트럼프를 인판티노가 급조한 상으로 달래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장광설 늘어놓는 트럼프, 웃으며 박수친 인판티노

트럼프의 연설은 가관이었다. 작년 11월 선거 승리 1주년을 자축하는 자리에서 그는 지금이 "미국의 황금기"라며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 이스라엘 인질 석방과 가자지구 평화 계획을 업적으로 내세웠지만, 정작 중동은 여전히 불안하다.

정치적 공격도 멈추지 않았다. 전임 대통령 조 바이든을 "사기꾼 조 바이든", "졸린 조"라고 조롱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중간 이름 '후세인'을 일부러 강조하며 "못된 사람이자 분열을 일으키는 자"라고 비난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개빈 뉴섬은 "개빈 뉴스컴"으로, 뉴욕 시장 당선자 조란 맘다니는 "공산주의자"로 불렀다. 여성 스포츠에 트랜스젠더 선수가 참여하는 문제도 또다시 꺼냈다.

극우 정치인의 전형적인 장광설이었다. 그런데 객석의 인판티노는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트럼프가 "2026 월드컵은 내가 1기 임기 때 따냈다"고 말하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트럼프가 "그들이 2020년 선거를 조작했다"며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되풀이했을 때도 카메라는 웃고 있는 인판티노를 비췄다. 세계 축구를 대표하는 인물이 권력자의 거짓말에 동조하는 장면이었다.

트럼프는 인판티노를 "대스타"라고 치켜세웠다. "월드컵 티켓이 전례 없이 팔리고 있다. 지아니가 기록적인 사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로가 서로를 띄워주는 모습이 마치 서로 등을 긁어주는 침팬지 한 쌍을 보는 듯했다.

"그는 생각을 말하는 사람"...정치적 중립은 개나 줬나

트럼프는 오후 인판티노의 연설 전에 자리를 떴다. 하지만 인판티노는 더욱 열띤 찬양을 이어갔다. FIFA 회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 어려운 말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쏟아져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과 아주 좋은 관계를 맺고 있고, 그를 정말 친한 친구로 여긴다. 그는 월드컵을 위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정말 열정적이다.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고 이게 내가 정말 존경하는 부분이다."

인판티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행동한다. 말한 걸 실행한다. 생각한 걸 말한다. 사실 많은 이들이 생각하지만 감히 말하지 못하는 걸 그가 말한다. 그래서 그가 성공한 거다." MAGA 집회에 나온 저학력 백인이 할 법한 말인지는 몰라도, FIFA 회장이 할 말은 아니었다.

인판티노는 트럼프를 향한 비판 여론도 정면으로 반박했다. "가끔 그를 향한 부정적인 논평을 읽으면 놀란다. 트럼프 대통령은 명확하게 당선됐다. 미국처럼 위대한 민주주의 국가에선 선거 결과를 존중해야 하지 않나? 그는 공약을 실행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모두 그가 하는 일을 지지해야 한다. 꽤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FIFA 회장이 특정 국가 정치 지도자를 옹호하는 건 명백한 정치 개입이다. 국제 스포츠 기구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인판티노는 그 원칙을 발로 짓밟았다. 애초에 그런 원칙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 같다.

축구계의 태양왕 인판티노.
축구계의 태양왕 인판티노.

월드컵 추첨식, 트럼프 치적 홍보장으로 전락

인판티노는 신설 평화상을 다음 달 워싱턴 D.C. 케네디센터에서 열리는 월드컵 조 추첨식에서 수여한다고 밝혔다. 문제는 케네디센터가 이미 트럼프의 손아귀에 들어간 곳이란 점이다. 트럼프는 재집권 후 케네디센터 이사장에 올랐고 이전까지 초당적이던 이사회를 측근들로 채웠다.

스포츠 매체 '디 애슬레틱'은 앞서 FIFA가 라스베이거스에서 추첨식을 열기로 막바지 협상을 벌였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뜻에 따라 케네디센터로 방향을 틀었다고 보도했다. 인판티노가 트럼프의 요구에 고분고분 따른 셈이다. 월드컵 추첨식이 트럼프의 치적을 홍보하는 정치 행사로 전락한 것이다.

인판티노는 "10억 명이 추첨식을 지켜볼 것"이라며 "평화를 위해 많은 일을 했거나 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상을 주는 데 이보다 적합한 무대는 없다"고 말했다. 10억 명의 시청자를 트럼프 홍보에 동원하겠다는 얘기다. "골로 밀어 넣을 리더가 필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리더가 트럼프란 뜻이다.

FIFA 회장 자리, 개인 용도로 써먹는 인판티노

인판티노의 아부 행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FIFA 회장 자리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써먹어 왔다. 권력자들과 친분을 과시하고, 그들에게 아부하며, FIFA를 사유화해 왔다. 이번 트럼프 평화상 논란은 그 정점이다.

평화와는 가장 거리가 먼 정치인에게 평화상을 주겠다는 발상 자체가 우스꽝스럽다. 트럼프는 사회 분열을 조장하고, 자신의 반대자들을 조롱하며, 노골적으로 거짓 주장을 되풀이하는 인물이다. 이런 사람에게 평화상을 주는 게 FIFA의 권위를 높일까, 아니면 땅에 떨어뜨릴까. 답은 뻔하다.

인판티노는 "FIFA의 모토는 축구가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하는 행동은 정반대다. 축구를 정치 도구로 삼고, FIFA 회장 자리를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수단으로 쓰고 있다. 세계 축구를 이끄는 인물이 이런 인간이라니, 축구팬들로선 한숨만 나올 뿐이다.

12월 워싱턴 D.C.에서 펼쳐질 월드컵 조 추첨식은 이제 축구 축제가 아니라 인판티노의 아부 쇼가 될 전망이다. 10억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트럼프가 평화상을 받는 장면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세계는 FIFA가 얼마나 추락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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