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민이 16일 경기 후 취재진과 인터뷰 하고 있다. (사진=더게이트 배지헌 기자)
안현민이 16일 경기 후 취재진과 인터뷰 하고 있다. (사진=더게이트 배지헌 기자)

[더게이트=도쿄돔]

경기장을 찾은 다수의 미국 메이저리그(MLB) 스카우트들 앞에서, 안현민(22·KT 위즈)의 방망이는 또 한 번 시동을 걸었다. 5-7로 뒤진 8회, 발에 공을 맞고 비틀거리던 타자가 오히려 도쿄돔의 흐름을 바꾸는 추격포를 쏘아 올렸다.

8회 타석에서의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자신이 친 타구에 왼발을 맞으며 크게 괴로워했고, 벤치 분위기도 잠시 가라앉았다. 안현민은 “아팠다. 그래서 이번 타석만 치고 교체되겠다 싶었다”고 털어놨다. 한번의 스윙만 더, 사실상 ‘최후의 스윙’이라 생각하며 타석에 다시 섰다는 의미다.

상대 투수는 일본 대표팀 강속구 투수 다카하시 히로토였다. 안현민은 “일단 상대 투수가 너무 좋은 투수였다. 그런데 변화구 커멘드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고 짚었다. “그래서 안 좋은 공을 조금 쉽게 걸러낼 수 있었다"는 안현민은 "그래서 4구째 노린 공이 속구로 잘 들어와서 홈런을 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결과는 6-7로 한 점 차 따라가는 추격의 솔로 홈런. 다카하시의 승부구 속구를 읽고 기다렸다가, 정확히 걸어 올렸다. 다만 타구가 떠오르는 순간까지도 확신은 없었다. “배트 조금 안쪽에 맞아서 넘어갔다는 확신은 안 들었고, 넘어가주길 바랐다”고 돌아본 한 마디에는 방망이 끝 감각까지 계산하는 타자의 감각이 묻어났다.

15일 홈런을 기록한 안현민(사진=중계화면 캡쳐)
15일 홈런을 기록한 안현민(사진=중계화면 캡쳐)

이 한 방으로 한·일 평가전 2연전에서 ‘국가대표 안현민’이라는 이름은 확실히 각인됐다. 전날(15일)에는 타구속도 177.8km/h, 비거리 129m의 초대형 홈런으로 이바타 히로카즈 일본대표팀 감독의 엄지를 끌어낸 데 이어, 이날도 추격포로 스카우트들의 시선을 다시 한 번 끌어당겼다.

안현민은 그럼에도 스스로를 과하게 포장하지 않았다. “일단은 너무 좋았던 한 해의 마침표를 잘 찍게 돼서 의미 있었다. 제가 또 국가대표에 도전할 수 있었다는 것에서도 좋은 경험이었다”고 정리했다. 올 시즌 KBO리그에서의 활약을 도쿄돔에서 다시 확인받고, ‘국대’ 타이틀을 한번 더 걸어봤다는 점에 더 큰 의미를 둔 셈이다.

경기는 9회말 극적인 동점 홈런으로 이어졌다. 패색이 짙던 9회말 2사, 김주원이 7-7을 만드는 솔로 홈런을 터트리자 더그아웃은 그대로 들썩였다. 안현민은 “더그아웃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도파민이 많이 나왔다”고 웃었다. 이어 “김주원 형은 너무나 좋은 선수이고, 선수들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 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역시나 너무 좋은 타구를 내줘서 선수들도, 감독, 코치님들께서도 너무 좋아했다”고 말했다. 팀 안에서 ‘형’에 대한 신뢰, 그리고 극적인 한 방이 만들어낸 분위기를 그대로 전했다.

안현민이 6회말 고른 볼넷. (사진=일본 문자 중계 사이트 갈무리)
안현민이 6회말 고른 볼넷. (사진=일본 문자 중계 사이트 갈무리)
안현민이 16일 타석에 선 모습. (사진=네이버 중계 갈무리)
안현민이 16일 타석에 선 모습. (사진=네이버 중계 갈무리)

도쿄돔에는 수많은 MLB 스카우트들도 자리했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해외로 향한다. 안현민은 “일본 거포 내야수 오카조토 카즈마와 송성문 형을 많이 보러 와주신 것 같은데, 그 좋은 선수들 사이에서 저도 조금이라도 어필할 수 있어서 다행인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이 쇼케이스의 중심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존재감을 남겼다는 데 묵직한 의미를 뒀다.

그러면서 속도를 조절했다. “아직 저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서비스 타임을 한 해씩 계속 채워가며 좋은 퍼포먼스를 내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고 강조했다. 눈앞의 스카우트보다, 앞으로 쌓아갈 ‘서비스 타임’과 퍼포먼스를 더 크게 본다는 점에서 이미 빅리그를 바라보는 시야를 보여줬다.

이번 한·일전에서 일본 배터리가 보인 반응 변화를 통해서도 ‘경계대상 1호’가 됐다는 걸 체감했다. 안현민은 “첫 타석 상대하면서부터 나를 향하는 볼배합이 바뀌었다고 느꼈다”고 했다. “어제는 속구로 먼저 카운트를 잡고 들어왔다면, 오늘은 속구가 좋은 투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변화구로 카운트를 잡고, 속구로 승부구를 던지더라”고 설명했다. 이미 전날 보여준 장타와 선구안이 일본 배터리의 작전을 바꿔버렸다는 의미다.

욕심이 안 났을 리 없다. 하지만 뒤에는 ‘예비 메이저리거’ 송성문이 있었다. 안현민은 “사실 욕심내고 싶었는데, 뒤에 선배님(송성문)이 너무 좋은 감을 갖고 계셔서 최대한 출루에만 집중했다”고 했다. 자신의 장타 욕심보다 팀 타선 전체의 흐름을 앞세운 셈이다.

국가대항전 경험은 무엇보다 ‘다음 단계’를 향한 자극이 됐다. “저도 TV로만 보던 사람이었다. 지난해까진 예상도 못했는데, 이번 평가전 내내 내가 직접 경기를 뛸 수 있게 돼서 너무 기뻤고, 다음 목표를 향해 갈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아 다행이다”라는 말에서 실감이 묻어난다.

투수들에게 납량특집 같은 공포를 선사하는 안현민(사진=KT)
투수들에게 납량특집 같은 공포를 선사하는 안현민(사진=KT)

경기는 7-7 무승부로 끝났다. 이긴 경기는 아니었지만, 안현민의 시선은 이미 내년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향한다. “이긴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만나잖나. 그때 조금 더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될 것 같다”고 했다. 도쿄돔에서의 무승부를 ‘WBC 예고편’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2003년생 ‘황금세대’의 한 축이라는 자각도 분명했다. 안현민은 “욕심을 내야할 것 같다. 2003년생에 좋은 선수들이 너무 많다. 제가 이름을 다 나열할 수 없지만, 저희 또래들이 더 욕심을 내서 우리가 황금세대를 만들어나간다는 목표를 가지고 다 같이 하면 국제대회에서 좋은 모습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2003년생이자, 야구 국가대표에 발탁될 수 있는 선수로는 안현민을 비롯해 문동주, 김도영, 김영웅, 이재현, 이민석, 박영현 등이 있다. 모두 팀 내에서 주축이다. 안현민의 말대로 이들이 '일' 한번 낼까. 시선이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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