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춘추]
KBO가 야심 차게 추진하는 피치클락의 내년 개막전 도입은 가능할까. 올해 마지막으로 열린 실행위원회(단장회의)에서 피치클락과 ABS(자동 볼·스트라이크 판정시스템)의 동시 도입은 무리라는 의견이 제기됐다.
12월 14일 부산 모처에서 열린 KBO 실행위원회 겸 워크숍에서는 여러 건의 KBO 규칙·규약 개정안이 테이블에 올랐다. 자리에 참석한 A 구단 단장은 “내년 도입 예정인 ABS를 비롯해 피치클락, 베이스 크기 확대, 더그아웃 전자기기 사용 등이 한꺼번에 안건으로 올라왔다”고 전했다. B 구단 단장은 “우리를 비롯해 여러 팀에서 제기한 샐러리캡 문제도 논의했다”고 밝혔다.

감독자회의도 단장회의도 ‘피치클락 속도 조절론’ 다수
이 가운데 피치클락 도입에 관해선 회의 전부터 부정적인 기류가 흘렀다. C 구단 단장은 13일 통화에서 “11일 열린 감독자회의에서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면서 “현장 감독 사이에선 로봇심판에 피치클락까지 한꺼번에 도입하면 시즌 진행이 쉽지 않을 거라는 우려가 많았다. 마무리훈련 등에서 테스트한 결과 ‘안되겠다’는 결론이 나온 것 같더라”고 전했다.
D구단 단장도 “감독자 회의에서 너무 급격한 변화를 우려하는 감독님들이 많았다고 전해 들었다. 여러 감독님이 ‘순차적인 도입’을 주장했다”면서 “우선 퓨처스리그에서 충분한 테스트 과정을 거친 ABS부터 도입하고, 피치클락은 추후 도입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이 다수였다”고 알렸다.
KBO가 처음 피치클락 카드를 꺼낸 건 7월 20일. 당시 KBO는 “선수 출신 단장들, 미디어, 해외 야구 전문가, 아마추어 야구 지도자, 학계 인사 등 외부 인사 9명과 심층적인 논의를 통해 전략 방향을 수립했다”면서 피치클락을 포함한 각종 제도 개선안을 내놨다. 이후 실행위를 거쳐 10월 18일 열린 2023년 제4차 이사회에서 ABS와 피치클락의 2024시즌 1군 경기 도입이 확정됐다.
KBO는 충분한 연구와 검토를 거쳤고 리그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변화란 입장이지만, 현장에선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A 구단 단장은 “방향과 취지는 공감하지만 여러 변화를 한꺼번에 도입하는 건 위험하다는 의견이 현장에서 나왔다”면서 “ABS는 아마추어도 하고 있고 퓨처스에서도 테스트를 거쳤으니 할 수 있지만, 피치클락은 해본 적이 없는 시도다. 1군에 바로 투입하는 건 위험하다는 의견이 많더라”고 전했다.
B구단 단장은 “현장에서 투구 사이 시간이 길어지는 건 투수나 타자보단 벤치 사인이 주된 원인”이라며 “기존 방식대로 사인을 주고받으면 시간을 맞출 방법이 없다. 벤치 사인용 피치컴을 함께 도입하지 않는 이상 피치클락을 도입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나온다”고 했다. 이어 “사인 시간을 단축할 보완책 없이 무조건 정해진 시간에 맞추라는 건 무리한 요구란 게 현장 의견”이라 했다.
C구단 단장은 “여러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면서 “피치컴을 도입하려면 더그아웃 전자기기 금지 규정도 바꿔야 한다. 시간 단축이 그렇게 중요하면 클리닝타임부터 없애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런데 클리닝타임은 중계방송 광고 때문에 없애기가 쉽지 않다. 무 자르듯 단칼에 해결 가능한 문제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결국 이날 회의에선 현장 요구대로 ‘속도 조절론’에 무게가 실린 것으로 전해진다. D 구단 단장은 “뾰족한 결론을 내리진 않았다. 시범경기 등을 지켜보면서 차례대로 도입하자는 얘기가 많았고, 내년 1월에 다시 모여 논의하기로 했다”고 알렸다. KBO 관계자는 “원래 이날 회의가 결론을 내기 위해 모인 자리는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B구단 단장은 “현장이나 구단에서 피치클락 도입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다. 필요성에 대해선 대체로 공감하는 분위기이고 이견도 없다”면서도 “조금 시차를 두고 속도를 조절하자는 생각이다. ABS는 바로 도입하고 피치클락은 전반기에 테스트한 뒤 하반기에 도입하는 식도 가능할 것”이란 의견을 밝혔다.
구단들은 현장과의 의논, 내부 검토를 거쳐 내년 1월 다시 피치클락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KBO 관계자는 “현장과 구단의 의견을 계속 수렴하는 과정을 진행할 것이다. 피치클락 설치 등은 예정대로 진행하지만, 상황에 따라선 처음엔 피치클락 위반에 따른 페널티 없이 시행하는 것도 가능한 안 중 하나”라고 했다.

“2년 만에 폐지? 도입하자고 할 땐 언제고…” 샐러리캡 폐지, 찬반 의견 팽팽했다
한편 이날 실행위에선 최근 일부 구단이 문제 삼는 ‘샐러리캡’도 의제로 올라왔다.
올겨울 몇몇 구단은 ‘비현실적인 샐러리캡 때문에 선수단 구성이 불가능할 지경이다’ ‘외부 FA(프리에이전트)는커녕 내부 FA도 잡기 어렵다’ ‘샐러리캡의 순작용보다 부작용이 크다’면서 ‘샐러리캡 폐지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실제 ㄱ 구단은 올겨울 내부 FA와 전부 계약할 경우 샐러리캡 초과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ㄴ 구단 역시 아직 미계약 상태인 내부 FA를 잡으려면 샐러리캡 초과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ㄷ 구단은 샐러리캡 문제로 2차드래프트 당시 여러 베테랑 선수를 35인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했다가 큰 홍역을 치렀다.
그러나 구단 간에 첨예하게 의견이 엇갈리는 사안의 특성상, 애초부터 합의로 이어지긴 어려웠다. A 구단 단장은 “우리 구단은 샐러리캡을 폐지하거나 조정해야 한다는 입장인데, 반대하는 구단이 많았다. 논의가 거의 진전되지 않았다”고 했다. B 구단 단장도 “실행위에 앞서 열린 이사회에서도 같은 안건이 올라왔지만, 분위기는 비슷했다. 폐지나 재조정을 요구하는 구단과 현행 유지를 원하는 구단이 팽팽하게 대립한 끝에 결론을 내지 못했다”고 했다.
실행위와 이사회 내용을 잘 아는 야구 관계자는 “수도권 한 구단과 서울 모 구단이 ‘샐러리캡을 없애야 한다’ ‘샐러리캡 때문에 야구 발전이 어렵다’는 식으로 여론몰이에 앞장선다”면서 “모 구단의 경우 대형 FA를 영입하면서 계약 4년째에 연봉을 몰아놨던데, 아마도 이 선수의 4년 차 쯤엔 샐러리캡이 없어질 거란 계산을 한 것 같다. 샐러리캡 폐지를 얘기하는 의도가 너무 투명하게 보인다”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 야구 관계자는 “샐러리캡 제도 도입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면, 애초 샐러리캡 도입에 앞장선 분들이 지금 샐러리캡 폐지에 앞장서는 바로 그 구단 사장과 단장들”이라며 “당시엔 자기네 주축 선수들이 한꺼번에 FA 자격을 얻으면서 몸값을 감당하기 어려워지니까 샐러리캡을 만들자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랬던 구단들이 이제 와서 ‘제도가 비현실적이니 없애자’고 주장한다. 제도에 문제점이 있다면 얼마든 논의할 수 있지만, 자기들 편의에 따라 제도를 만들었다 없앴다 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고 비판했다.
E구단 관계자의 생각도 비슷하다. “일단 제도를 만들었으면 최소 3년은 유지해야 한다는 게 우리 입장”이라며 “이제 2년밖에 안 된 샐러리캡을 폐지하면, 그동안 샐러리캡 제도에 맞춰 선수단을 구성한 우리 같은 팀들은 바보가 된다. 샐러리캡을 지키기 위해 고액 몸값 선수, 베테랑 선수를 내보내고 여론의 비판을 받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다. 샐러리캡 신경 안 쓰고 구단을 운영한 팀들이 이제 와서 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걸 보면 양심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샐러리캡 문제는 이날 실행위에서 표결조차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KBO 정관 제28조 (위원회의 의결방법)에 따르면 실행위원회는 “재적위원 3분의 2이상 의 출석과 출석위원 3분의 2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하게 돼 있다. 취재 결과 최소 4개 구단이 샐러리캡 폐지 혹은 조정에 반대 입장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문제 역시 내년 1월 회의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했지만, 그사이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한편 이날 회의에선 ‘신규 영입 외국인 선수 100만 달러 상한선’ 폐지도 거론되긴 했지만,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진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D 구단 단장은 “애초 외국인 선수 제도는 안건에 올라와 있지 않았다. 피치클락 등 규약 개정과 내년 사업 계획 승인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다”고 밝혔다. 다만 대부분 구단이 외국인 선수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만큼, 내년 1월 회의에선 정식 안건으로 다뤄질 가능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