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춘추]
KBO리그 최고의 마무리는 메이저리그에서도 마무리일 수 있을까.
LG 트윈스 마무리 투수 고우석의 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행이 확정됐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는 1월 4일(한국시각) 고우석 영입을 공식 발표했다. 기본 2년 450만 달러가 보장된 계약으로 2026년 상호옵션 300만 달러와 각종 인센티브(총 240만 달러)를 합하면 최대 940만불까지 받을 수 있는 조건이다.
샌디에이고엔 이미 대형 계약을 맺은 두 명의 불펜투수가 있다. 2023시즌을 앞두고 5년 4,600만 달러에 잡은 ‘100마일 투수’ 로버트 수아레즈가 있고, 일본프로야구 최연소 200세이브 좌완 마쓰이 유키도 5년 2800만 달러에 계약했다. 몸값이 곧 기회인 빅리그에서 연봉만 놓고 따지면 고우석은 서열 1순위가 아니다.

미국 현지 매체 “고우석, 마무리 경쟁 벌일 것” 예상
그러나 미국 현지에서는 고우석도 마무리 후보 중 하나로 보는 분위기다. 고우석의 파드리스행 소식을 제일 처음 전한 ‘뉴욕포스트’ 기자 존 헤이먼은 고우석이 마무리를 맡을 것으로 예상했다. 헤이먼은 처음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한국 마무리 고우석의 샌디에이고행이 임박했다’고만 썼다가, 조금 뒤 수정해 ’마무리를 맡을 것 같다‘는 문구를 굳이 덧붙였다.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 MLB닷컴도 “고우석은 샌디에이고 불펜에 도움을 줘야 한다”며 “고우석과 마쓰이는 경기 후반 불펜 역할을 맡을 것으로 예상된다. 수아레즈까지 3명의 투수가 마무리 경쟁을 벌일 것이다. 누가 마무리를 하든 3명 모두 중요한 상황에서 던질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CBS 스포츠 역시 고우석과 수아레즈의 마무리 경쟁 구도를 예상했다.
‘디 애슬레틱’의 파드리스 담당 데니스 린 기자는 “로버트 수아레스가 9회 대부분을 맡을 것으로 예상된다”면서도 “KBO 최고의 마무리 투수였던 고우석은 파드리스에서 경기 후반에 등판할 기회를 잡을 것으로 보인다. 구단 관계자들은 고우석과 마쓰이 모두 세이브 기회를 약속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마쓰이와 마찬가지로 고우석은 승패가 걸린 중요한 이닝을 소화할 흥미로운 옵션 중 하나”라고 분석했다.
파드리스의 마이크 실트 신임 감독은 고우석 계약이 발표되기 전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가능한 한 많은 양질의 투수를 원한다. 그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방법을 알아낼 것”이라며 “우리가 마무리 투수를 절대적으로 보장하는 계약을 맺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며 마무리 경쟁 가능성을 열어놨다.
감독의 발언과 여러 정황을 종합하면, 아직 파드리스 불펜에 붙박이 마무리로 낙점된 투수는 없다고 봐야 한다. 사실 메이저리그에서 마무리는 가장 변덕스럽고 유동적인 보직으로 통한다. 마리아노 리베라, 에드윈 디아즈급 특급이 아닌 이상 한두 시즌 마무리로 좋은 활약을 했어도 부진하면 얼마 안가 교체되는 경우가 많다. 시즌 초반 마무리로 나오던 투수가 부상, 부진으로 자리를 잃고 신인급이나 의외의 이름이 세이브 기회를 받는 사례도 허다하다.

올시즌 파드리스 불펜은 혼란 그 자체다. 엘리트 마무리 투수 조쉬 헤이더와 베테랑 닉 마르티네즈, 루이스 가르시아, 스캇 발로우가 FA 자격을 얻어 팀을 떠났다. 레이 커도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됐다. 헤이더-마르티네즈-가르시아는 작년 파드리스에서 가장 많은 경기에 등판한 3인이다. 팀내 최고 불펜 5명이 한꺼번에 사라진 가운데 수아레즈와 마쓰이, 고우석을 중심으로 에녤 데 로스 산토스, 스티븐 윌슨, 톰 코스그로브, 제레미아 에스트라다, 아드리안 모레혼, 루이스 파티뇨, 조니 브리토, 알렉 제이콥 등이 불펜을 이룬다. 이 가운데 빅리그에서 한시즌 이상 마무리로 커리어를 쌓은 투수는 한 명도 없다.
유력한 마무리 후보 수아레즈는 일본프로야구에서 마무리 투수로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빅리그 세이브 기록은 1개가 유일하다. 2022년엔 뛰어난 성적을 거뒀지만 지난해엔 팔꿈치 부상으로 부진을 겪었다. 마쓰이도 일본프로야구에서 통산 236세이브를 거뒀지만 9이닝당 볼넷이 5~6개에 달할 정도로 고질적인 제구 문제를 안고 있다. 구속도 평균 140km/h 후반대로 ML 불펜 기준 정상급은 아니다. 고우석이 ’비벼볼‘ 여지가 충분하다.
고우석의 계약 세부 내용을 보면 파드리스가 마무리 활용 가능성도 염두에 뒀다고 짐작할 만한 단서가 있다. 일단 고우석은 출전경기수에 따라 인센티브를 받는다. 올시즌 70경기 등판시 보너스 10만불이 주어지고 2025, 2026년엔 40, 45, 50, 55경기 등판시 각각 10만 달러씩 연 최대 40만 달러씩을 가져간다.
여기에 경기 마무리 보너스가 있다. 경기 마무리는 세이브와는 좀 다른 개념으로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 경기를 끝냈을 때를 가리킨다. 메이저리그 마무리는 세이브 요건이 아닌 상황(4점차 이상, 동점 상황)에서 경기를 끝내는 역할을 종종 맡는데 이를 고려한 인센티브로 풀이된다.
고우석은 매년 15, 25, 35, 45경기를 마무리할 때마다 각각 12만 5천 달러씩 연 최대 50만 달러를 받는데, 이는 이듬해 연봉에 포함된다. 마무리 보직을 맡으면 인센티브를 최대 240만 달러까지 챙겨서 3년간 총액 940만 달러를 전부 받아갈 수도 있다는 얘기다. 마쓰이 계약에도 비슷한 인센티브 조항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두 선수의 마무리 경쟁을 기대하는 파드리스 구단의 속내를 엿볼 수 있다.

구속, 구위, 새로운 환경…고우석의 폭발적 성장을 기대하는 이유
KBO리그 최고 마무리가 메이저리그에서도 마무리로 활약한 선례가 있다. 2016년부터 빅리그 무대에서 활약한 오승환이 좋은 사례다. 물론 일본야구를 거쳐 진출했다는 차이가 있지만, 오승환은 빅리그 데뷔 첫해 마무리 자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기존 마무리 광속구 투수 트레버 로젠탈이 부상과 부진에 신음하면서 생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해 오승환은 76경기에 등판해 19세이브 14홀드 평균자책 1.92를 기록했다. 지난 5년간 리그 최다 세이브(139세이브)를 거둔 최고 마무리 고우석도 충분히 해 볼 만한 도전이다.
불펜투수에게 중요한 구속과 구위도 빅리그에서 충분히 통할 경쟁력을 갖췄다. 고우석은 지난 5시즌 평균구속 152km/h로 리그 전체 투수 가운데 1위를 기록했다. 2위가 안우진(151.7)이고 3위는 문동주(151.6)다. 불펜과 선발이란 차이는 있지만 고우석이 한국에서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고우석의 최근 5년 평균구속 94.45마일은 지난해 빅리그 불펜투수 평균(94.5마일)과 거의 일치한다. 25세 젊은 나이와 세계 최고 선수육성 시스템을 자랑하는 MLB 환경을 생각하면 지금보다 구속이 더 빨라질 가능성도 있다.
권위있는 유망주 평가 전문 매체 ‘베이스볼 아메리카’도 고우석의 구위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BA는 “강한 스터프와 신체적 힘을 갖춘 우완 투수”라며 “최고 구속이 98마일에 달한다. 디셉션이 부족하고 종종 빠른 볼이 밋밋해질 때도 있지만 구위로 타자를 이길 수 있는 투수”라고 소개했다.
고우석의 2번 구종 커터보다 3번 구종인 커브에 좋은 점수를 매긴 것도 눈에 띈다. BA는 “고우석의 세컨 피치는 79~83마일의 커브볼로, 일관성은 다소 부족하지만 평균 범위 안에서 들락날락한다. 90마일 초반 커터는 평균 이하로 존에 들어가면 강한 타구를 맞는다“고 평가했다. 커리어에서 가장 커브 구사율이 높았던 지난해 고우석의 커브 비율은 16.4%, 커터는 26.2%로 오히려 커터 구사가 많았다. 커브를 더 자주 던지는 방향으로 피치 디자인을 바꾸면, 고우석은 우리의 기억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지도 모른다.

몇몇 큰 경기에서 실패가 남긴 잔상 탓인지 일부 국내 팬 사이에선 고우석의 마무리 자질을 지나치게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우석은 커리어 내내 주자 없는 상황보다 유주자와 위기 상황에서 좋은 기록을 보였고, 경기 후반 클러치 상황에서도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지난 5년간 100경기 이상 구원투수 중에 고우석(19%)보다 승계주자 실점율이 좋았던 투수는 KT 조현우 12.7%와 롯데 최준용 18.8% 둘 뿐이다. 고우석이 클러치에 약하다는 건 편견이다.
한 야구 관계자는 “내가 아는 고우석의 성향으로 볼때는 투구 외적 스트레스가 덜한 미국야구가 잘 맞을 것 같다”면서 “그간 어린 나이에 중책을 맡은 부담과 실패에 따라붙는 비난으로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도 경쟁이 심한 곳이긴 하지만 이제부턴 본인 할 것만 잘 하면 된다“고 격려했다. 국내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고우석의 잠재력이 더 크게 만개할 거란 기대다. 마침 샌디에이고엔 낯선 환경 적응을 도와줄 멘토(김하성)도 있다. 올시즌 고우석이 샌디에이고의 승리를 지키러 올라오더라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등장곡은 드라우닝 풀의 ‘Soldiers’가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