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춘추=고척]
“30년 전에는 그 이후에 벌어질 일들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LA 다저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정규시즌 개막전이 열리는 20일, 경기 전 고척스카이돔 미디어룸에서 열린 공식 기자회견에서 박찬호는 1994년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회상했다.
“당시 2점을 내줘서 부끄럽고 아쉬운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제게 토미 라소다 감독은 허그와 함께 공 하나를 건네줬습니다. 당시엔 영어를 잘 못했고, 통역이 야구장 안에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에 ‘이 공을 왜 주나’하고 그냥 받았어요.”
박찬호가 데뷔전을 망쳤다는 아쉬움과 자책에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라소다 감독이 다가와 기념구의 의미를 설명했다. “감독님은 ‘이건 역사에 남는 공이 될 거야’라고 했습니다. ‘한국 선수가 처음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삼진 아웃을 잡은 공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죠. 그 이후로 그 공은 저에게 소중한 보물이 됐습니다.”
라소다의 예언은 현실이 됐다.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에이스급 투수로 큰 성공을 거뒀고, 2010년까지 17시즌 동안 훌륭한 커리어를 쌓았다. 박찬호를 시작으로 수많은 한국인 선수가 메이저리그 무대에 도전해 이름을 날렸고, 일본과 타이완(대만)에서도 많은 유망주가 미국 무대를 밟았다. 20일과 21일 고척에서 열리는 MLB 월드투어 서울시리즈엔 아시아 출신 내야수 최초로 골드글러브를 수상한 김하성, 야구계 최고의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 역대 투수 최대규모 계약을 맺은 야마모토 요시노부까지 여러 동양인 선수가 출전한다.
“30년 전에 저는 혼자였습니다. 이듬해인 1995년에 노모 히데오 선수가 미국으로 건너왔죠.” 박찬호가 한국어에 감정과 뉘앙스를 담아 대답했다. “노모 선수와 제가 함께 다저스 팀메이트로 활약하면서 동양인 선수들 앞에 메이저리그의 문이 활짝 열렸고, 더 당당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박찬호는 류현진, 추신수, 김하성, 이정후 등 한국인 메이저리거와 궈홍치 등 타이완 출신 빅리거들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동양인 선수들을 보면서 노모의 나무가 정말 튼튼하게 자랐구나, 또 박찬호의 나무가 굉장히 튼튼하게 자랐단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동양의 선수들이 메이저리그를 꿈꾸면서 더 크고 훌륭하게 성장하고 도전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이번 서울시리즈는 한국에서 열리는 첫 메이저리그 경기다. 이처럼 역사적인 경기에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된 사나이가 시구자로 나서는 건 너무도 자연스럽고 적절해 보인다. 박찬호는 “오늘 아침 일어나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며 “시구 하나를 던지는 게 마치 한 경기를 다 던지는 것처럼 긴장된다. 너무도 뜻깊은 하루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 야구의 발전, 30년이 지나 이런 일이 벌어지는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것에 대해 굉장히 감명 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찬호의 말이다.
이날 박찬호는 30년 전에 사용했던 글러브를 들고 야구장을 찾았다. 그는 “이 글러브는 30년 전 제가 국내에서 썼던 글러브인데, 고향에 있는 박물관에서 가져왔다. 오늘 의미 있는 시구에 사용하려고 갖고 왔다”고 말했다.
“처음 데뷔했을 때 제 손가락 움직임이 많아서, 그걸 보고 타자가 어떤 공인지 알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 제게 롤링스사에서 새로 만들어준 글러브입니다. 보기엔 좀 흉하지만 굉장히 가치 있는 물건이죠. 이걸 30년이 지난 오늘 다시 쓰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정말 기쁩니다.” 박찬호의 말이다.

박찬호에게 다저스 구단은 어떤 의미일까. 그는 미소와 함께 “처음으로 저를 통해 한국 야구팬들에게 (메이저리그를) 알려줄 수 있었고, 어떻게 보면 한국 국민들에게 ‘첫사랑’ 같은 팀”이라고 말했다.
“IMF 시기 한국이 굉장히 어려웠을 때 우리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었고, 야구를 넘어 삶의 한 부분이 됐으니까요. 한국인들에겐 (다저스가) 가슴 깊이 좋은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LA라는 도시는 제 고향 같은 도시이기 때문에 더 의미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다저스와 샌디에이고 두 팀과 모두 깊은 인연이 있는 박찬호는 특정 팀의 승리보단 이번 시리즈가 갖는 의미를 강조했다. 그는 “오늘 경기에서 어떤 팀이 이겨야 한다는 생각은 없다”며 “오늘내일 역사적인 두 경기가 열리는 만큼 한국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승부로, 멋진 경기로 잘 치러졌으면 한다”고 힘줘 말했다.
끝으로 박찬호는 “30년 전과 지금의 한국야구를 비교하면 많은 발전이 있었다. 앞으로도 더 많은 경기가 한국의 야구 꿈나무들에게 전해졌으면 한다”며 “과거엔 박찬호 야구만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다양한 선수들의 활약을 보면서 메이저리그의 꿈을 갖고 한국 야구를 이끌어가는 훌륭한 선수가 배출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