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춘추=수원]
52일 만에 승리투수가 되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투수가 있다. 승리의 환한 미소보다는 아쉬움과 자책과 불만족이 앞선다. 8일 수원 KT위즈파크에서 7.1이닝 역투로 시즌 7승째를 거둔 삼성 라이온즈 원태인 얘기다.
원태인에게 이날 경기는 특별한 의미였다. 6월 17일 두산전 이후 두 달 가까이 승리와 인연을 맺지 못했던 그에게는 어느 때보다 소중한 7승이었다. 이날 KBO리그 통산 94번째로 1000이닝 투구 기록도 세웠다. 2000년대생 투수로는 최초라서 더욱 의미 있는 기록이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승리에도, 기록에도 100%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팀이 8대 4로 승리한 경기 후 취재진과 만난 원태인은 복잡한 심경을 털어놨다. "승리투수가 되면 기분이 좋지만, 오늘 피칭은 솔직히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며 "그래도 오랜만에 승을 따내면서 스스로 분위기 전환이 된 것 같아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가장 아쉬운 건 KT 9번타자 권동진과의 승부였다. 원태인은 5회까지 1실점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투구를 이어가다 6회 권동진에게 불시의 투런포를 허용했다. 권동진은 이 경기 전까지 통산 233경기에서 단 1홈런만을 기록한 선수였다. 2021년 6월 17일 NC전 데뷔 첫 홈런 이후 1512일 동안 홈런이 없던 선수에게 통산 2호 홈런을 내준 것이다. 권동진의 홈런으로 스코어는 6대 1에서 6대 3, 두 점차가 됐다.
"6회 볼카운트 2볼에 점수가 5점 차였기 때문에 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가볍게 던진 것이 홈런으로 이어졌다. 그 상황이 두고두고 아쉽다”는 원태인의 미소에서 씁쓸함이 묻어났다.
완벽을 추구하는 원태인에게는 8회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박진만 감독님께서 두 타자만 더 해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셨고, 이때까지 내가 8회에 올라가 던진 적이 많지 않았다. 오늘은 팀을 위해서라도 던져야겠다는 생각으로 올라갔다"는 설명이다.

팀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결과는 아쉬웠다. 선두타자 황재균에게 2루타를 허용한 뒤 1사 3루에서 또다시 권동진에게 적시 2루타를 맞고 결국 강판됐다. 원태인은 "그 두 타자를 깔끔하게 막고 내려왔으면 좀 더 좋은 경기가 됐을 것 같다. 선두타자에게 2루타를 맞고도 감독님이 1사 3루에서 교체하지 않고 믿어주셨다. 감사한 부분인데, 오늘 권동진 선수에게 꽉 잡힌 것 같아 아쉽다"며 고개를 저었다.
원태인은 8회 선두타자 황재균에게 2루타를 맞은 뒤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인채 분한 마음을 드러냈다. 권동진에게 적시타를 맞고 강판될 때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신인투수 배찬승이 추가 실점 위기를 막아내고 더그아웃에 들어올 때는 환영해주면서도 활짝 웃지 않았다. 결과는 좋았지만 과정과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에도 감독님이 8회에 올라가라고 하면 올라갈 것이다. 그런데 오늘을 계기로 믿음이 조금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는 너스레 뒤에는 다음 기회에는 완벽하게 8회를 마무리하겠다는 의욕이 숨어 있다.
원태인의 승리투수 자격을 지켜준 건 후배인 신인투수 배찬승이었다. 그는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내려왔다. 만약 찬승이가 점수를 주면, 오늘 80점짜리 경기가 30~40점짜리 게임밖에 안 될 것이라 생각했다. 찬승이가 제발 막아달라고 속으로 기도했다"고 털어놨다.
원태인의 바람대로 배찬승은 앤드루 스티븐슨과 김상수를 연달아 삼진 처리하고 크게 포효했다. 삼성은 6대 4 리드를 지켰고, 9회초 터진 강민호의 쐐기 투런포에 힘입어 8대 4로 승리했다. 원태인은 “찬승이가 포효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투수라면 위기를 넘겼을 때 그런 반응이 나올 것 같다. 찬승이가 너무 좋은 피칭으로 막아줘서 경기가 끝나고도 고맙다고 말했다"는 것이 원태인의 설명이다.

잘 던지고 승리투수가 돼도 만족하지 못하는 원태인의 자세는 에이스로서의 책임감을 보여준다. 그는 "전반기에 로테이션을 두세 번 정도 빠졌기 때문에 팀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몇 위가 될지 모르겠지만 순위가 확정될 때까지는 로테이션을 거르지 않고 팀에 도움이 되는 게 제일 첫 번째"라고 강조했다.
전반기 말미 오른쪽 등 부위 뭉침과 통증으로 엔트리에서 제외됐던 원태인에게는 그 공백이 여전히 짐이다. "내가 좋은 피칭을 하든 못하든 팀에서 나를 믿고, 감독님께서도 오늘처럼 8회에도 믿어주시는 만큼 그 믿음에 보답해야 한다. 그러려면 빠지지 않고 꾸준히 경기에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각오를 다졌다.
원태인에게는 개인적 목표보다 더 큰 꿈이 있다.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팀 레전드 오승환과 함께하는 마지막 가을무대다. "오승환 선배님의 마지막 시즌을 우리가 이렇게 아쉽게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선수들도 선배님과 함께 가을야구를 한 번 더 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다. 작년에 함께 못 했기 때문에 올해라도 함께 가을무대를 밟고 싶은 마음이 정말 크다"고 말했다.
현재 삼성은 5강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이날 상대한 KT 역시 5강 경쟁팀 중 하나다. "이번 주에 자칫하면 정말 5강 싸움이 끝날 수도 있다. 그런 생각으로 간절하게 임하기로 선수들 모두 이야기를 했다"고 절박함을 드러냈다. 다행히 원태인의 승리로 7위 삼성은 6위 KT와 승차를 1경기 차로 줄이며 5강 희망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원태인에게는 또 다른 목표가 있다. 바로 국가대표 에이스 자리다. 내년 열리는 2026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원태인은 유력한 대표팀 에이스로 거론되고 있다. 그는 "팬들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될 수 없는 자리다. 인정받기 위해서 조금 더 압도적인 성적을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시즌 7승 3패 평균자책 3.12를 기록 중인 대표적인 국내 에이스는 "솔직히 대표팀에 뽑힐지 안 뽑힐지도 모르겠다”며 자신을 낮췄다. 그러면서도 "국가대표라는 자리는 정말 뺏기기 싫은 자리다. 또 한 번 WBC라는 큰 대회에 가고 싶은 마음에 후반기에 좀 더 집중해서 던지고 있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대표팀에 가서 인정받을 수 있는 피칭을 하면 팬들도 인정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좀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원태인은 다짐했다.
52일 만의 승리에도 웃지 못한 원태인. 그의 '불만족'에는 이유가 있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개인보다는 팀을, 현재보다는 다음을 생각하는 진짜 에이스에게는 완전한 만족이란 없다. 완벽을 추구하는 원태인의 여정은 계속된다. 어쩌면 먼 훗날 유니폼을 벗을 때까지도 결코 만족은 없을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