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체결에 기뻐하는 선수와 에이전트(이미지=Bing AI)
계약 체결에 기뻐하는 선수와 에이전트(이미지=Bing AI)

 

[스포츠춘추]

주인공의 직업이 스포츠 에이전트인 영화 ‘제리 맥과이어’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는 “쇼 미 더 머니!(Show me the money!)”다. 전화통을 붙들고 이 대사를 크게 외치는 주인공 제리(톰 크루즈)의 모습은 다른 영화와 코미디에서 수없이 패러디됐고, 유명한 밈이 됐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진짜 핵심 메시지를 담은 명대사는 따로 있다. 제리가 도로시(르네 젤위거)에게 찾아가 말하는 대사 “유 컴플리트 미(You complete me)”다. 우리말로 옮기면 “당신이 날 완성해요” 정도가 되겠다. 별거 중인 아내에게 돌아와 달라고 간청하는 로맨틱한 용도로 쓰인 이 말은, 선수와 에이전트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스포츠 에이전트의 역할은 단순히 선수가 많은 돈을 벌게 해주는(“Show me the money!”) 게 전부가 아니다. 선수가 복잡한 문제에 시간과 정신을 소모하지 않고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게 에이전트의 존재 이유다. 영화에서 제리는 로드(쿠바 구딩 주니어)가 실력에 비해 저평가받는 원인인 동료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도록 돕고, 그럼으로써 로드의 가치를 극대화한다. 뛰어난 에이전트는 선수를 빛나게 하고, 선수를 완성한다.

선수가 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이미지=Bing AI)
선수가 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이미지=Bing AI)

 

에이전트 둘러싼 논란 또 논란…그래도 에이전트는 꼭 필요하다

올겨울 KBO리그에서 에이전트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한 전직 에이전트는 로드매니저와 공모해 자신의 선수를 협박하고 갈취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만약 혐의가 사실이라면, 오랫동안 자신을 믿고 따른 선수의 신뢰를 악용해 딴 주머니를 채운 셈이다. 문제가 불거진 뒤 이 에이전트는 회사를 떠났고, 그가 담당했던 선수들도 대부분 소속사를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또 FA(프리에이전트) 계약 과정에서 구단과 에이전트, 선수 가족과 에이전트가 마찰을 빚은 사례도 나왔다. 해당 선수는 에이전트가 세운 협상 전략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애초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조건으로 울며 겨자 먹기 계약을 맺었다. 계약이 끝난 뒤 에이전시는 절차와 도의의 문제를 제기하며 구단을 비판했다. 반대로 계약 결과에 실망한 선수 가족도 에이전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일련의 사태를 지켜본 에이전트들은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A 에이전시 대표는 “에이전트 업계 전체로 봤을 때 좋지 않은 상황이다. 특정 회사가 무너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업계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문제”라고 우려했다. 

B 에이전트도 “스타 선수들이 소속사에서 나왔으니 다른 회사에서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절대 그렇지 않다”면서 “이번 사건들이 에이전트를 바라보는 야구계의 시선, 선수들과의 신뢰관계에 악영향을 줄 것 같아 걱정이 많다”고 털어놨다.

에이전트 제도의 발전 과정을 잘 아는 야구 관계자는 “한국야구 선수협회가 공인 대리인 자격 제도를 도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야구에서 에이전트는 마치 ‘사기꾼’과 동의어처럼 여겨졌다”고 했다. 

2000년대 초반 여러 스타 선수의 에이전트를 맡았던 J씨가 대표적이다. 2005년 미국 진출 과정에서 J씨의 도움을 받았던 구대성은 이후 “J씨가 거액의 돈을 유용했다”며 공방을 벌였다. J씨가 미국 현지 생활에 필요하다며 거액의 돈을 송금하라고 요구했고, 이를 몰래 인출해 유용했다는 주장이었다. 

또 해외파 출신 한 선수도 “J씨의 요구로 미국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가 신용불량자가 됐다”고 지인들에게 하소연하는 일이 있었다.  2002년 진필중, 2008년 김동주 때는 국외진출이 가능한 것처럼 공수표를 날렸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J씨는 미국 사업가를 앞세워 ‘10구단 창단’을 시도하기도 했다. 

J씨를 둘러싼 여러 논란은 한국야구에서 에이전트라는 직업에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웠다. 십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야구계에서 J씨는 ‘나쁜 에이전트’의 대명사로 통한다. 실제 최근 에이전트 논란이 불거진 뒤 여러 야구 관계자가 통화에서 “다시 J씨의 시대로 돌아간 느낌”이라며 추억의 이름을 소환했다. 

이후 J씨와 같은 사례를 막기 위해 선수협은 2018년부터 공인 에이전트 자격심사와 자격시험을 도입했다. 에이전트 희망자의 채무관계, 전과, 구단 혹은 언론사와 이해관계를 면밀하게 점검한 뒤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라이센스를 발급하고 있다. 한번 시험에 합격해도 2년간 실제 대리인 업무를 하지 않을 경우 라이센스가 취소된다. 규정을 어기거나 물의를 빚은 에이전트는 자격 정지 징계도 받는다. 

여기에 뜻있는 여러 에이전트들이 업계의 자정을 위해 노력하면서, 에이전트 제도는 초기의 부정적 이미지를 씻고 빠르게 정착하고 있다. 에이전트 업계를 잘 아는 관계자는 “과거 좋지 않았던 에이전트에 대한 인식이 개선된 건 몇몇 유명 에이전트가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하면서”라며 “이들은 과거의 나쁜 관행을 거부하고, 정직하고 깔끔한 일 처리로 선수는 물론 구단으로부터도 신뢰를 받고 있다”고 했다. 우수한 에이전트의 도움을 받은 스타 선수들은 과거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총액 100억 원대 대형 계약을 따내기도 했다.

최근 에이전트를 둘러싼 몇몇 논란에 야구팬 중에는 ‘에이전트 무용론’을 외치는 목소리도 나온다. 선수가 직접 협상하면 되지 굳이 에이전트가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식의 주장이다. 일부 구단 혹은 야구 관계자 중에도 에이전트의 부작용을 강조하면서 ‘에이전트 때문에 선수와 구단 사이가 멀어진다’ ‘에이전트 도입 이후 몸값 거품만 심해졌다’는 논리를 펴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선수 권익을 위해 에이전트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현행 KBO리그 규약 중엔 구단에 유리하고 선수에겐 불리한 조항이 많다. 다양한 정보와 자료를 보유한 구단을 선수 혼자서 상대하는 건 역부족이다. 일부 유별난 선수가 직접 자료를 준비하거나, 협상 기술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여기엔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모 구단 관계자는 내부 FA 선수와 식사 자리에서 생긴 일화를 들려줬다. “가족 얘기, 사는 얘기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가다 계약 얘기를 꺼내려고 하자 바로 ‘그건 에이전트와 얘기하셔야 한다’고 선을 긋더라. 결국 계약 얘기는 못하고 사적인 얘기만 하다가 식사를 마쳤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에이전트의 존재가 껄끄러운 돈 얘기, 계약 얘기로부터 선수와 구단을 분리시켜주는 면이 있다”고 말했다. 

에이전트 업계를 잘 아는 관계자는 “몇몇 선수에게 에이전트가 뭐하는 사람인지 아느냐고 물으니 ‘용품 가져다주는 사람’이라고 하더라. 하지만 에이전트가 실제 하는 일은 훨씬 방대한 영역을 포괄한다”고 설명했다. 에이전트는 계약서 조항과 옵션의 유·불리를 살펴 선수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대변한다. 또 구단이나 다른 상대와 법률문제가 발생했을 때 선수 측을 대변하며, 세금신고 등 세무 관련 문제를 돕는 일도 한다. 선수의 상품가치를 높여 더 좋은 계약과 스폰서가 들어오게 하는 것도 에이전트 업무다. 하나같이 선수 혼자 해결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열심히 일하는 스포츠 에이전트의 모습(이미지=Bing AI)
열심히 일하는 스포츠 에이전트의 모습(이미지=Bing AI)

 

“에이전트는 개인의 이익보다 선수의 이익 최우선으로 해야”

이번 에이전트 논란을 지켜본 여러 관계자는 에이전트도 선수도 구단도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구단 관계자는 “에이전트는 선수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선수대리인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 물론 선수에게 큰 계약을 안겨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에이전트 개인의 욕심이 앞서선 안 된다. 에이전트의 무리한 일처리로 선수가 손해를 보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선수들도 에이전트 선택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에이전시 업계를 잘 아는 관계자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에이전트를 선택해야 한다”며 “야구 용품 공짜로 준다고 혹해서, 혹은 술 사준다고 해서 에이전트를 맡기는 식이어선 곤란하다”고 조언했다. 

이 관계자는 “선수를 술자리에 불러낸 뒤 지인이나 사업가, 연예계 관계자를 소개하는 에이전트도 있는 것으로 안다. 선수에게 ‘누군지 아느냐’고 물어보면 ‘엄청 부자인데 뭘 하는지는 정확하게 모른다’고 하더라”면서 “이런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모든 사건 사고가 시작되는 법”이라고 경고했다. 에이전트가 선수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얘기다.

구단 역시 에이전트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한 에이전트는 “간혹 선수가 에이전트를 통해 협상하면 불쾌하게 여기는 구단이나 관계자들이 있다. 은근히 에이전트 없이 직접 대화하길 권하는 사례도 있다. 에이전트는 선수의 당연한 권리다. 이제는 구단도 에이전트의 존재를 인정할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몇해전 소속팀에서 방출당한 뒤 어렵게 새 팀을 찾아 계약한 한 선수는 지방까지 자신과 함께 동행해준 에이전트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대형 FA 계약이 아닌 소액 계약이라 에이전트에게 돌아가는 이익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 그런데도 에이전트는 하루 일정을 통째로 비워 선수와 함께했고, 계약이 마무리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 도왔다. 

“같이 와준 건 고마운데,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에이전트에게 물어보니 ‘혼자 가면 외로울 것 같아서’라고 하더라. 그 말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 이 선수의 얘기다.

여전히 제리 맥과이어처럼, 선수를 완성하기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에이전트가 많다. 일부 에이전트의 일탈과 논란이 겨우 자리 잡아가는 에이전트 제도를 공격하는 빌미가 되지 않길 바란다. 한국야구 선수들에겐 에이전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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