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춘추]
지난달 30일, 좌완투수 함덕주를 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신분조회 요청했다는 소식이 처음 전해졌다. 올겨울 FA(프리에이전트) 시장에 나온 함덕주가 여러 구단의 관심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긴 했지만, 알고 보니 미국에도 함덕주를 주시하는 팀이 있었던 것이다.
보통 신분조회는 국외 구단이 한국 선수 영입에 관심이 있을 때 거치는 절차다. 선수의 공식적인 신분을 KBO에 확인하는 절차로, 선수정보 시스템 등록까지 완료하면 메이저리그 구단과 계약이 가능한 신분이 된다. 신분조회가 반드시 MLB 진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진출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이 절차를 생략했다간 자칫 계약이 무효가 되는 경우도 나온다. 또 신분조회 요청이 들어왔다는 건 최소 한 개 구단이 해당 선수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의미로도 풀이된다.

에릭 페디 초대형 계약 충격…한국야구 보는 MLB 시선 달라졌다
함덕주의 신분조회 소식이 처음 알려질 당시만 해도, 실제 미국 진출이 가능할 거라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2023시즌 57경기 16홀드 4세이브 평균자책 1.62로 반등에 성공했지만 최근 몇 년간 부상과 부진으로 힘든 시간을 겪었던 탓이다. 예비 메이저리거로 거론된 적도 없었고 선수 본인이 미국행 꿈을 이야기한 적도 없다. MLB 구단이 수년간 지속해서 관찰하지 않은 선수를 덜컥 영입하는 경우는 드물다.
신분조회가 반드시 미국행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과거 사례만 봐도 2017년 정의윤(당시 SK)처럼 신분조회 요청을 받았지만 실제 영입 제안은 받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또 김재환(두산)처럼 미국 진출을 시도했다가 만족스러운 제안을 받지 못하고 소속팀으로 돌아온 예도 있다.
그러나 투수난에 시달리는 최근 메이저리그 상황을 보면 함덕주의 미국행이 아주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란 얘기도 나온다. 12월 6일 KBO리그 MVP 에릭 페디(NC)가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2년 1,500만 달러 규모의 초대형 계약에 합의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는 최근 KBO리그를 거쳐 메이저리그 유턴한 외국인 투수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계약이다.
올시즌 내내 꾸준히 페디를 관찰한 MLB 구단 아시아담당 스카우트는 “구단에 페디에 대한 보고를 계속 보내긴 했지만, 솔직히 이 정도 대우를 받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면서 “페디 계약을 보니 고우석은 물론 함덕주의 미국 진출도 전혀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페디는 불과 1년 전만 해도 ‘더는 메이저리그 수준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혹평을 받았던 투수다. 워싱턴 내셔널스 유니폼을 입고 뛴 2022년 페디는 27경기에 등판해 6승 13패 평균자책 5.81을 기록했다. 페디의 주무기인 평균 148km/h대 싱커는 타자들에게 난타당했고 커브, 커터 등의 변화구도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랬던 투수가 한시즌 KBO리그에서 압도적인 활약을 보인 뒤 2년 1,500만 달러를 받는 거물이 된 것이다. 지난해 페디가 워싱턴에서 받은 연봉은 약 215만 불 수준이었다.
페디의 대형 계약은 최근 미국야구의 심각한 투수난을 잘 보여준다. 투수가 필요한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쓸만한 투수를 찾아 중남미 지역은 물론 일본, KBO리그, 타이완까지 레이더망을 펼친다. 일본프로야구 최고 투수인 야마모토 요시노부는 올겨울 FA 투수 랭킹 ‘1순위’란 평가 속에 2억 달러 이상 규모의 초대형 계약이 확실시된다. 좌완 이마나가 쇼타도 포스팅을 통한 빅리그 진출을 준비 중이고, 역시 좌완인 마쓰이 유키는 FA로 미국행을 준비한다. KBO리그에서도 이미 페디의 미국 유턴이 확정됐고, 찰리 반즈(롯데)가 미국행을 저울질 중이며, 고우석과 함덕주는 신분조회 요청을 받았다.
그렇다면 함덕주의 신분조회가 메이저리그 진출로 이어질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이정후, 고우석에 비해 가능성이 다소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이정후는 이미 현지에서 5,000만 달러에서 6,000만 달러 규모의 계약이 확실시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미 메이저리그 진출이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 고우석도 2개 구단이 강한 관심을 보인 것으로 확인됐고, 그 중엔 메이저 계약을 제시할 팀도 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반면 아직 함덕주에 대한 메이저리그 팀의 관심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단계다. 함덕주의 에이전시 관계자는 “시즌 중반쯤 일본과 미국에서 관심을 보인 팀이 있었는데, 그 중 한 군데에서 신분조회를 요청한 것 같다”고 전했다. 신분조회가 있었으니 최소 1팀에서 관심이 있는 건 분명한데 어느 팀인지,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어 이 관계자는 “선수야 좋은 오퍼가 있으면 미국 진출에 긍정적인 입장이다. 미국이 아니라 일본, 대만이라도 마찬가지”라며 선수에게 미국 도전 의사가 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함덕주 보는 미국야구 평가는? “관심 없었다” “타자들이 까다로울 것”
스카우트들은 함덕주를 어떻게 평가할까. 한 MLB 구단 스카우트는 “사실 근래 함덕주를 관심 있게 지켜보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이 스카우트는 “과거 두산 시절엔 함덕주에게 관심이 있었는데, 부상 이후 구속이 저하되고 마운드에서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 관심이 다소 떨어진 게 사실이다. 지금은 빅리그 감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구단에 보고서도 올리지 않았다. 우리만 이런 게 아니라 다른 팀도 비슷할 것”이라 말했다.
반대로 함덕주만의 독특한 장점을 높게 평가하는 스카우트도 있다. 다른 MLB 구단 스카우트는 “함덕주를 보면 일본프로야구에서 뛰는 비슷한 유형의 투수들이 떠오른다”며 “좌완에 디셉션이 있고 팔 각도도 독특해서 처음 상대하는 타자들이 까다롭게 여길 가능성이 있다. 부상 이후 구속이 떨어지긴 했지만 스피드는 다시 올라갈 여지도 있다고 본다”는 의견을 내놨다.
MLB 구단과 활발하게 교류하는 구단 관계자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 것 같다”면서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메이저리그 30개 구단마다 정보망이 다르고 평가 기준이 다르다. 무조건 안 된다고 단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다른 구단이 다 관심 없어도, 의외로 관심을 보이는 한 구단이 나오면서 계약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열어보기 전에는 모른다”는 의견이다.
함덕주는 포스팅을 통한 진출이 아닌 FA 신분으로 구단 허가 없이도 자유롭게 팀을 고를 수 있다. 좋은 조건이 아닌, 마이너 계약이나 스플릿 계약이라도 본인이 감수하고 미국야구에 도전하겠다면 막을 수 없다는 얘기. 다만 함덕주 측 관계자는 “조건에 관계없이 무조건 꿈을 좇아 미국에 가겠다는 생각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좋은 오퍼가 있다면”을 전제로 미국 진출도 생각해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1순위는 원소속팀인 LG다. 하지만 미국에서 좋은 오퍼가 온다면 그때는 당연히 도전해야 하지 않을까”란 의견을 전했다.
원소속팀 LG는 함덕주가 꼭 필요한 선수라며 반드시 잡겠다는 입장이다. 신분조회 소식이 전해진 뒤 차명석 단장과 선수 측이 한 차례 만남을 갖기도 했다. 샐러리캡 초과 직전인 LG는 이와 관련한 내부 논의를 진행 중인데, 이 문제가 어느 정도 정리되면 함덕주를 비롯한 내부 FA(임찬규, 김민성 등)들과 본격적인 협상을 진행할 예정이다. 그때까지 함덕주도 자신을 원하는 미국 구단이 있는지 둘러볼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