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FC 강 철 감독(사진=스포츠춘추 이근승 기자)
화성 FC 강 철 감독(사진=스포츠춘추 이근승 기자)

[스포츠춘추=남해]

1월 10일. K3리그 화성 FC는 공개 채용을 통해 신임 감독을 선임했다. 화성의 선택을 받은 건 한국 축구 대표팀 수비수 출신 강 철(50) 감독이다.

강 감독은 1989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축구 대표팀 후방을 책임진 수비수 출신이다. 그는 17살 때인 1989년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다. 당시 대표팀에서 대학생은 강 감독, 한국 U-23 축구 대표팀 황선홍 감독, 인도네시아 축구 대표팀 김봉수 코치뿐이었다. 

강 감독은 두 차례 올림픽을 경험했다. 올림픽 남자 축구 연령 제한(23세 이하) 도입 전 마지막 대회였던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2000 시드니 올림픽에 나섰다.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선 부상으로 낙마한 울산 현대 홍명보 감독을 대신해 와일드카드(24세 이상 선수)로 팀에 합류했다. 

강 감독은 두 차례 아시안컵(1996·2000), 2001년 국제축구연맹(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등에도 참가한 이력이 있다. A매치 통산 기록은 54경기 출전 1골. 

강 감독은 한국 중앙 수비수 최초 유럽 프로축구 1부 리그를 경험했다. 2000시즌 K리그를 마치고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1부) 라스크 린츠에 몸담았다. 정보, 에이전트 등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절 선진 축구를 경험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얻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강 감독은 2005년부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전남 드래곤즈 코치를 시작으로 U-23 축구 대표팀, 부산 아이파크, 포항 스틸러스, FC 서울, 옌볜 푸더(중국), 대전하나시티즌 등에 몸담았다. 정식으로 감독직을 맡는 건 2022시즌이 처음이다. 스포츠춘추가 강 감독을 만났다. 


화성 FC 강 철 감독 “수비수도 부지런해야 살아남는 시대”

강 철 감독은 선수들과 훈련장에서 함께 땀 흘리는 지도자다(사진=스포츠춘추 이근승 기자)
강 철 감독은 선수들과 훈련장에서 함께 땀 흘리는 지도자다(사진=스포츠춘추 이근승 기자)

2005년 전남 드래곤즈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감독으로 선임된 건 이번이 처음인데요. 새 시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새롭게 느끼는 게 있습니까.  

많죠(웃음). 오랫동안 코치 생활을 했어요. 감독은 다르다는 걸 느낍니다. 선수단, 코치진, 프런트 등 팀을 이끌어야 해요. 예전보다 더 세밀해져야 하죠. 

예를 들어줄 수 있습니까. 

코치 시절엔 선수들과의 관계와 효과적인 훈련을 진행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특히나 감독과 선수 사이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힘썼죠. 이젠 팀 안팎으로 신경 써야 할 게 많습니다. 코치, 선수가 제 역할에 충실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해요. 구단 고위층과 원활한 소통을 이어가야 하죠. 팀이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도록 중심을 잡고자 합니다. 

축구계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황선홍 감독이 지도자로 일군 업적 뒤엔 강 철 코치가 있었다는 거죠. 수비 전술을 만들어가는 능력이 한국 최고란 평가를 듣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부족한 점이 많아요. 코치로 성공만 해온 게 아니잖아요(웃음). 황선홍 감독께선 항상 제 의견을 존중하고 많이 따라주셨습니다. 더 좋은 수비 조직력을 갖추는 데 힘을 더해주셨고요. 선수들도 부족한 저를 믿고 온 힘을 다해주었죠. 축구는 팀 스포츠잖아요. 팀원들의 도움이 지도자로 행복한 순간을 만들어준 겁니다. 

팀 후방을 책임지는 선수들에게 강조하는 건 무엇입니까.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뒤부터 늘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수비수는 부지런해야 살아남는다”는 거예요. 포항 스틸러스, FC 서울 수석코치로 K리그1 우승컵을 들어 올렸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비수는 완벽해야 해요. 실수를 용납해선 안 됩니다. 수비수는 단 한 번의 실수로 팀을 패배로 빠뜨릴 수 있는 포지션이거든요. 

현대 축구에선 수비수의 발기술을 강조합니다. 정확한 패스로 공격의 시작을 알릴 수 있어야 하죠. 수비수의 역할이 이전보다 늘어나지 않았습니까. 

전원 공격, 전원 수비로 불리는 토탈 사커의 개념이 나온 게 1970년대입니다. 수비는 기본이고 다른 능력까지 갖춰야 한 단계 올라설 수 있었어요. 기술의 발전으로 축구 역시 빠른 발전을 이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은 변하지 않아요. 상대보다 한 발 더 뛰어야 이길 가능성이 커집니다. 동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수비 라인 잡아주고, 왕성한 활동량으로 공·수를 끊임없이 오가는 수비수가 살아남습니다. 


“김민재는 100년에 한 번 나올법한 선수”

화성 FC 강 철 감독은 대표팀 후배 김민재를 향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사진=스포츠춘추)
화성 FC 강 철 감독은 대표팀 후배 김민재를 향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사진=스포츠춘추)

이야기를 듣다 보니 궁금한 게 생겼습니다. 현재 한국 최고 수비수는 김민재입니다. 후배 김민재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제가 감히 평가할 수 없는 선수죠. 대단한 선수입니다. 100년에 한 번 나올만한 선수라고 봐요. 

100년에 한 번이요?

(김)민재 키가 190cm입니다. 힘이 엄청나게 좋아요. 어떤 선수와 부딪히든 밀리는 법이 없죠. 여기에 발까지 빠릅니다. 동양인 선수가 이런 체격 조건에 운동능력을 갖춘다는 건 쉽지 않거든요. 아시아에선 민재와 같은 선수를 본 적이 없습니다. 

김민재는 터키 쉬페르리그(1부) 페네르바체 SK 주전 수비수로 활약 중입니다. 강 철 감독은 김민재의 대표팀 선배이자 유럽 리그 선배이지 않습니까.

다 지난 일이에요(웃음). 유럽 리그에서 오랫동안 경력을 쌓은 것도 아닙니다. 민재랑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어요. 


“오스트리아 린츠 초밥집 사장님 아니었으면 유럽 리그 경험 힘들었다”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라스크 린츠의 홈구장. 강 철 감독은 한국 중앙 수비수 최초로 유럽 프로축구 1부 리그를 경험했다(사진=라스크 린츠)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라스크 린츠의 홈구장. 강 철 감독은 한국 중앙 수비수 최초로 유럽 프로축구 1부 리그를 경험했다(사진=라스크 린츠)

강 철 감독은 한국 중앙 수비수 최초로 유럽 프로축구 1부 리그를 경험한 수비수입니다. 당시 이야기를 좀 들어보고 싶은데요. 포지션과 관계없이 유럽 리그에서 활약하는 한국 선수가 흔하지 않은 시대 아니었습니까. 

에이전트란 개념이 익숙하지 않았죠. 정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요. 맨땅의 헤딩이었습니다. 2001년 1월이었어요. 유럽에 도전해보겠다는 일념으로 독일로 향했습니다. 혼자 간 건 아니었어요. 한국 축구 대표팀 동료였던 (최)성용이와 함께였습니다. 정말 막막했어요. 

네?

독일 프로축구 2부 리그 몇 팀에 입단 테스트를 신청했는데 거절당했습니다. 훈련할 장소도 마땅치 않았어요. 

입단 테스트를 받기로 하고 독일로 향한 것 아닙니까. 

한국에선 독일 구단에 입단 테스트를 요청할 방법이 없었어요. 직접 부딪히는 게 유럽으로 향할 유일한 길이었죠. 한국에선 국가대표 수비수였지만 독일에선 ‘아시아에서 온 선수’일 뿐이었습니다. 관심이 없었습니다. 독일에서 입단 테스트를 허락해준 팀은 딱 하나였어요. 그마저도 통과하지 못했죠. 1월이었습니다. 독일 팀들은 시즌 중이다 보니 즉시 전력감이 아니면 영입할 생각이 없었던 거에요. 

이후 오스트리아로 넘어간 겁니까. 

독일에선 뛸 팀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애초엔 벨기에로 향할 계획이었어요. 오스트리아는 벨기에로 향하는 과정에서 잠시 들른 거였죠. 

오스트리아 구단에 입단 테스트를 요청할 계획은 없었습니까.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에 관한 정보가 아예 없었어요. 독일에서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벨기에 주필러리그(1부)를 두드려보는 게 낫다고 봤죠. 그렇게 독일에서 오스트리아 린츠로 이동했습니다. 하루 쉬고 벨기에로 이동할 계획이었죠. 린츠에 도착한 날 저녁이었습니다. 식사하려고 나왔는데 린츠에 초밥집이 있는 거예요. 오랜만에 익숙한 음식 먹을 생각에 기분 좋은 마음으로 들어갔죠. 

초밥집에서 운명적인 만남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맛있게 식사할 생각으로 들어갔는데 초밥집 사장님이 한국 사람이었습니다(웃음). 우리가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니깐 사장님이 서비스를 주시면서 말을 건 거예요. 사장님이 “린츠엔 어떠한 일로 왔느냐”고 하길래 “국가대표 축구 선수다. 유럽 리그를 경험하고 싶어 왔다. 내일 벨기에로 향할 계획”이라고 했죠. 

사장이 뭐라고 답했습니까. 

사장님이 “벨기에에 입단을 약속한 팀이 있느냐”고 물었죠. 우린 솔직하게 “아니다. 독일에선 입단 테스트받기도 쉽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사장님이 “내가 라스크 린츠 구단주랑 아주 가깝다. 도와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우연히 식사하러 찾은 초밥집 사장님이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린츠 구단주와 친분이 두터웠다는 거죠? 이런 인연이 다 있네요. 

사장님이 “입단 테스트 볼 생각 있느냐”고 해서 고민하지 않고 답했죠. “무조건 하겠다”고. 바로 다음 날 린츠에서 입단 테스트를 봤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수준이 아주 높은 건 아니었어요. 특히나 저와 성용이는 국가대표였습니다. 제 기량을 보였더니 당장 계약하자고 하더라고요. 


“유럽에서 성공하는 선수들의 공통된 특징은 자기가 무엇이 부족한지 명확히 알고 보완해 나간다는 것”

2000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했던 한국 U-23 축구 대표팀 선수들. 사진 맨 왼쪽 위부터 김용대, 박동혁, 김상식, 강 철, 박재홍, 김도훈, 김도균, 이영표, 박지성, 고종수, 이천수(사진=대한축구협회)
2000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했던 한국 U-23 축구 대표팀 선수들. 사진 맨 왼쪽 위부터 김용대, 박동혁, 김상식, 강 철, 박재홍, 김도훈, 김도균, 이영표, 박지성, 고종수, 이천수(사진=대한축구협회)

계획엔 없던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린츠에 입단한 거네요. 

신세계였습니다. 

신세계요?

프로축구단 시스템이 아주 체계적이었어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시스템이었습니다. 구단이 선수 한 명을 위해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훈련이 경기 당일에 맞춰 체계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선수 개개인의 식사부터 숙면까지 모든 걸 챙겼습니다. 가장 놀란 건 경기 직전이었어요. 

경기 직전 특별히 실시하는 게 있었습니까. 

모든 선수가 피검사를 받았습니다. 바늘로 손끝을 살짝 찔러서 나온 피를 분석했어요. 이 선수의 몸이 경기를 정상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지 확인했던 거죠. 피로도가 얼마만큼 축적됐는지까지 파악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경기에 출전할 수 없었어요. 유럽 구단엔 선수 한 명 한 명을 철저히 관리해 팬들에게 최상의 경기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습니다. 그걸 온 힘을 다해 실천하죠. 2022년이 아닌 2001년 제가 경험한 겁니다.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에서 뛰며 경험한 것 중 인상 깊었던 게 또 있었습니까. 

선수들이 경기에서 패하는 날 고개를 숙이지 않았어요. 이기든 지든 팬들과 웃으면서 소통하는 게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구단에선 홈경기 때마다 일부 팬과 스폰서 관계자를 초청해 저녁 식사를 함께했어요. 뷔페식으로 음식을 차려놓는 겁니다. 거기서 선수와 팬이 더 가까워졌죠. 이런 문화가 있다는 게 놀라웠어요. 솔직히 부러웠습니다. 

아.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이후 선수들에게 늘 강조해요. “경기에서 지는 날에도 절대 고개 숙이지 말라. 항상 당당히 걸어야 한다”고 말이죠. 또 있어요. 

시간 많습니다. 다 이야기해주세요. 

세계 어느 리그를 가든 훈련이나 경기가 끝나면 코칭스태프, 선수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하루를 정리하는 거죠. 제가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할 땐 이랬습니다. 훈련이나 경기를 마치면 감독을 삥 둘러쌌어요. 열중쉬어 자세로 감독의 이야기를 들었죠. 질문이나 반론은 상상 못했습니다. 2001년 오스트리아는 어땠는지 아세요?

글쎄요. 

선수가 감독이 말하는 데 누워서 얘길 들었어요. 공을 깔고 앉아 있는 선수도 있었죠. 감독의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반박하는 선수도 있었고요. 처음엔 안절부절 어쩔 줄 몰랐죠. 저랑 성용이가 잘못한 것 같았어요(웃음). 

직접 뛰어본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는 어땠습니까. 

제가 린츠에서 중앙 수비수와 스트라이커 두 포지션을 봤습니다. 학창 시절 스트라이커를 맡았던 경험을 살렸죠. 기회가 있으면 무조건 잡아야 하니까. 그런데 동료들이 패스를 안 줬어요. 상대 페널티박스 안쪽에서 툭 건들면 골인 위치인데 안 줬습니다. 

동료들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았습니까. 

언어도 잘 안 통하고 하니깐 답답한 게 많았어요. 그래서 A매치 기간 선물 보따리를 가지고 왔죠. 대표팀이 2001년 이집트 원정 평가전을 치렀을 때였어요. 그때 아내도 이집트로 향했습니다. 아내에게 한국 인삼, 절편, 꿀 등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죠(웃음). A매치 마치고 팀에 복귀하자마자 선물을 나눠줬어요. 이후 훈련장에서나 실전에서나 동료들과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하고자 했고요. 

효과 있었습니까. 

선물 효과 좀 봤죠(웃음). 오스트리아에서 뛰며 유럽은 마인드가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K리그 외국인 선수는 경기력과 관계없이 대우받을 때가 많아요. 오스트리아는 아니었습니다. 감독, 코치의 생각은 ‘외국인 선수면 그에 맞는 활약을 펼쳐야 한다. 여긴 프로고 알아서 적응해야 한다’였죠. 알아서 동료들에게 인정받고 좋은 경기력을 발휘해야 하는 겁니다. 그걸 못하면 제 자릴 다른 외국인 선수에게 내주는 거고요. 

감독, 코치, 선수 등 축구인으로 평생을 살고 있습니다. 현재 김민재를 보면서 유럽 리그 진출을 꿈꾸는 유망주 수비수가 많은데요. 후배들에게 조언해주고 싶은 게 있습니까. 

유럽 최고 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을 유심히 보면 공통된 특징이 있어요. 자기가 무엇이 부족한지 정확히 알고 그 부분을 채워나갑니다. 한국엔 감독, 코치 눈치 보면서 개인 운동하는 선수가 많아요. 그 선수들에게 ‘너는 무엇이 부족한 것 같으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해요. 그냥 하는 겁니다. 효과가 있을 리 없죠. 더 큰 무대로 나아가고 싶다면 바뀌어야 합니다. 축구는 반복 운동이에요. 강점은 살리고 부족한 점은 채워갈 수 있도록 꾸준히 해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존경하는 축구인은 한국 U-23 축구 대표팀 황선홍 감독”

강 철 감독(사진 가운데)은 한국 U-23 축구 대표팀 황선홍 감독(맨 왼쪽)과 1989년부터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사진=대한축구협회)
강 철 감독(사진 가운데)은 한국 U-23 축구 대표팀 황선홍 감독(맨 왼쪽)과 1989년부터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사진=대한축구협회)

화성 FC는 2월 27일 화성종합보조구장에서 펼쳐지는 김해시청 축구단과의 대결로 2022시즌 K3리그 정상 도전을 시작합니다. 

1월 10일 화성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이제 한 달이 조금 넘었죠. 감독과 코치의 역할은 확실히 다르다는 걸 느껴요. 제 강점을 유지하면서 선수단을 잘 이끌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처음 감독을 맡는 데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의 신뢰와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모든 걸 쏟아붓겠습니다. 

강 철 감독의 축구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강철 감독은 수석코치로 부산 아이파크(2008~2010), 포항 스틸러스(2011~2015), FC 서울(2016~2018), 대전하나시티즌(2020) 등에서 한국 U-23 축구 대표팀 황선홍 감독을 보좌했습니다. 대전 시절엔 황 감독이 물러난 이후 감독대행을 맡기도 했습니다. 

제 축구 인생에서 황선홍이란 사람을 만난 건 대단한 행운이에요. 1989년 처음 대표팀에 뽑혔을 때부터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당시 대표팀 내 대학생이 딱 3명이었어요. 저, 황 감독, 김봉수 코치였죠. 

대한축구협회는 2020 도쿄 올림픽을 마친 뒤 황선홍 감독에게 U-23 축구 대표팀 지휘봉을 맡겼습니다. 2021년 9월 15일이었죠. 당시 축구계는 강 철 코치도 U-23 축구 대표팀으로 향할 것으로 봤습니다. 지금까지 쭉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부산 시절부터 이어온 인연이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주변에서 많이 물어봤어요. 황선홍 감독님과 틀어졌느냐고(웃음). 사실이 아닙니다. 황 감독님이 2월 10일 유럽에서 활약 중인 선수들의 몸 상태를 점검하고자 유럽 출장을 떠났어요. 직전에 경상남도 남해를 찾았습니다. K리그 구단들의 동계 훈련을 지켜보고 화성 훈련장도 찾았죠. 사이가 틀어졌다면 황 감독님이 오셨겠습니까. 

강 철, 황선홍은 축구계에서 서로 간의 신뢰가 가장 두터운 지도자 아닙니까. 

신뢰로 부산 시절부터 쭉 함께해왔던 거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의 성공을 바라고 있어요. 저는 항상 황 감독님을 응원합니다. 존경하고요. 황 감독님을 모시면서 매 순간 온 힘을 다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황 감독님부터 모든 걸 쏟아냈으니까. 저는 황 감독님이 편히 주무시는 걸 본 적이 없어요. 부산 시절부터 대전 시절까지요. 

잠을요?

24시간 팀이 어떻게 하면 발전할까만 생각한 겁니다. 좋은 성적을 낸 순간에도 다르지 않았어요. 어찌하면 우승컵을 지킬 수 있을까 고민했죠. 감독님이 그리 뛰는데 수석코치가 가만있을 수 있습니까. 감독님이 보내준 신뢰와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모든 걸 쏟아냈죠. 감독님과 함께하면서 배운 게 참 많아요. 감사한 시간입니다. 

2005년 코치 생활을 시작했어요. K리그에서 강 철 감독만큼 코치 경력이 긴 지도자를 찾기 어렵습니다. 일찍이 감독직에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습니까. 

욕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러나 황선홍 감독님 곁을 떠나야겠다고 다짐한 적은 없었어요. 한국 최고 지도자와 함께하는 순간순간이 행복했거든요. 감사했고요. 황 감독님을 보좌하면서 세 차례 감독 제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와 비슷한 축구 철학을 가지고 굳건한 신뢰까지 보내주신 분의 곁을 떠날 수 없었어요. 

아. 

인간적으로도 참 훌륭한 분입니다. 황선홍 감독님은 우리 가족을 항상 챙겼어요. 솔직히 친형이나 다름없는 분이에요. 황 감독님에게 말했어요. “감독님, U-23 대표팀에서 꼭 성공하십시오. 감독님의 오랜 꿈인 국가대표팀 감독도 꼭 맡으십시오. 그 뒤에 감독 대 감독으로 붙어봅시다”라고요. 황 감독님도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우린 여전히 둘도 없는 사이에요(웃음). 

강 철 감독이 화성에서 보일 축구는 황선홍 감독의 축구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까요. 

저는 수비수 출신입니다. 실점을 최소화하는 축구를 구사할 거에요. 어느 한 선수에게 의존하지 않고 11명이 똘똘 뭉친 팀을 만들겠습니다. 화성이 K3리그 팀이지만 인프라가 아주 좋아요. 수도권이고 경기장 시설이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선수들이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에요. 이 얘길 꼭 하고 싶습니다. 

네. 

선수들에게 얘기합니다. “축구에만 집중할 수 있을 때 모든 걸 쏟아내야 한다”고 말이죠. “1년만 축구에 미치라”고 해요. “누구든 K리그 구단의 제안을 받으면 웃으면서 보내주겠다”고 했습니다. 선수들은 강 철이란 축구인의 후배이기도 하잖아요. 꿈이 있는 친구들입니다. 자기 재능을 꽃피울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그럴 겁니다. 

지금도 축구가 재밌습니까. 

중요한 전술 훈련이 아니면 선수들과 같이 몸을 풀어요. 볼 뺏기 훈련 같은 건 함께합니다(웃음). 살아있는 걸 느껴요. 축구장에서 계속해서 호흡할 수 있어 아주 행복합니다. 코치, 선수와 축구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요. 이들과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공유하면서 성장하겠습니다. 2022시즌 화성 많이 응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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