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 최고의 타자 이정후(사진=키움)
리그 최고의 타자 이정후(사진=키움)

[스포츠춘추=고척]

슈퍼맨에게 크립토나이트가 약점이듯, KBO리그 최고의 타자 이정후에게도 약점은 있다. 데뷔초 롯데 브룩스 레일리 상대로 단 1안타도 못 때린 이정후가 올해는 찰리 반즈 상대로 애를 먹고 있다.

8월 11일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롯데-키움 경기는 메이저리그 3개 구단 스카우트가 지켜보는 앞에서 펼쳐졌다. 이날 미국 스카우트들은 목동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심준석 등판 경기가 우천취소되자, 이정후를 보러 고척을 찾았다. 전날인 10일에도 8개 구단 스카우트와 고위 인사가 고척을 방문해 이정후를 집중 관찰한 바 있다.

아쉽게도 이날 이정후는 타석에서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필 ‘천적’ 찰리 반즈와 상대하는 악조건에서 경기를 치른 탓이다. 이날 전까지 반즈 상대 9타수 1안타였던 이정후는 이날도 3타수 무안타 1삼진으로 꽁꽁 묶였다.

1회 첫 타석에선 빠져나가는 슬라이더에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중심이 무너지면서 배트가 크게 헛도는, 이정후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 나왔다. 

4회 두번째 타석과 7회 세 번째 타석은 유격수 땅볼로 아웃당했다. 4회에는 배트 밑에 맞고 힘없이 굴러간 공이 투수 글러브를 거쳐 앞으로 달려나온 유격수에게 잡혔다. 7회엔 비교적 잘 맞은 타구였지만 2루수 자리에 서 있던 유격수의 시프트에 잡혔다. 좀처럼 이정후다운 타격을 보여주지 못한 하루였다.

이날 경기로 이정후의 반즈 상대 성적은 12타수 1안타, 천적 관계가 유지됐다. 경기후 반즈는 이정후와 야시엘 푸이그를 제압한 비결에 대해 “공격적인 피칭을 한 게 주효했다. 빠른볼을 몸쪽과 바깥쪽으로 왔다갔다하며 공격적으로 던져서 아웃을 잡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정후의 천적이었던 브룩스 레일리(사진=롯데)
이정후의 천적이었던 브룩스 레일리(사진=롯데)

공교롭게도 이정후는 반즈가 오기 전 롯데의 좌완 에이스였던 레일리 상대로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정후의 레일리 상대 통산 성적은 17타석 15타수 무안타. 볼넷 1개, 사구 1개만 얻어내고 삼진은 6차례 당했다. 무안타도 무안타지만, 배트 중심에 제대로 맞힌 정타가 거의 나오질 않았다. 

당시 이정후는 “레일리만 만나면 이상하게 공이 잘 안 보인다”고 하소연했다. 레일리와 상대한 뒤에는 한동안 타격 밸런스를 찾는 데 애먹는 모습도 보였다. 이에 키움은 레일리 등판일에 아예 이정후를 선발 라인업에서 빼는 전략을 쓰기도 했다. 레일리가 내려가면, 그 뒤에 이정후를 교체 투입하는 방식이었다.

이와 관련해 이정후는 후반기를 앞두고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그때 나는 무조건 경기에 나가겠다고 했다. 지금은 KIA 단장인 장정석 감독님께 레일리 공을 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고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이에 장 단장은 데이터를 갖고 이정후를 설득했다고. 이정후는 “단장님이 보여주신 데이터를 보니, 레일리를 상대하고 난 직후 7~10경기 동안 내 타격 성적이 바닥을 찍었더라”면서 “단장님께선 멀리 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1년에 레일리를 많이 만나야 5번인데 그때 쉬고 다음 경기에서 잘하는 게 낫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이정후는 천적이 나온 날에도 꿋꿋이 선발 출전하며 기둥 선수다운 책임감을 보여주고 있다(사진=키움)
이정후는 천적이 나온 날에도 꿋꿋이 선발 출전하며 기둥 선수다운 책임감을 보여주고 있다(사진=키움)

레일리만 나오면 라인업에서 빠졌던 신인 시절과 달리, 프로 6년 차가 된 지금은 달라졌다. 이제 이정후는 ‘천적’이 나와도 꿋꿋이 선발 출전한다. 천적과 상대한 후유증도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6월 26일 롯데전에선 반즈가 내려간 뒤 9회 최준용 상대로 홈런을 날렸다.

이와 관련 이정후는 “이제는 내 상황이 달라졌다. 더는 어린 선수가 아니라 팀의 주축이 됐다. 상성이 안 맞는 투수가 나와도 경기에 나가야 한다” “잘 치든 못 치든 라인업을 지켜야 한다”고 의젓하게 말했다. 

이정후가 레일리, 반즈 상대로 약한 건 두 선수가 좌투수이기 때문이 아니다. 올해 이정후는 좌완 상대 타율 0.303을 우완(0.362) 만큼은 아니라도 충분한 경쟁력을 보여주고 있다. 통산 좌완 상대 성적도 타율 0.329에 OPS 0.838로 결코 약하지 않다.

좌완 상대로 약한 게 아니라 레일리, 반즈처럼 변칙적인 투구폼에 디셉션이 좋은 투수 상대로 겪는 어려움이라고 봐야 한다. 과거 이승엽, 양준혁 등 리그 최고 타자들도 이혜천이 나오면 애를 먹었다. 양준혁은 민원기, 강봉수 등 평범한 좌완 상대로도 성적이 좋지 못했다. 야구의 상대성이다. 

이날 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본 한 메이저리그 구단 스카우트는 “우리 입장에선 이정후가 외국인 투수 상대로 얼마나 성과를 냈는지도 중요한 평가 요소”라며 “메이저리그엔 반즈처럼 딜리버리와 릴리스 포인트가 특이한 투수가 즐비하다. 다양한 구종과 심한 무브먼트를 자랑하는 좌투수가 많다. 이정후가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했다.

이정후도 “여전히 리그에 까다로운 투수들이 많다. 하지만 다 대처하고 이겨내야 한다”면서 강한 의지와 책임감을 드러낸 바 있다. 천적을 만나도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이정후가 언젠가 보란 듯이 천적 반즈를 공략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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